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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5)화 (5/89)

5화 새로운 이름을 얻으셨군요

데르케디온 로드윅. 

블레이크의 외아들이었다.

넘치는 사랑을 받았으나 사랑을 모르는 아이.

사랑받아 본 적이 없기에 사랑을 모르는 아이.

‘그 둘이 한 저택에 있다, 라…….’

고심하던 블레이크는 책상 위의 종이를 구겨 버린 뒤, 새로운 종이에 이름 하나를 적었다.

“가주님?”

“제드, 집사에게 가져다줘.”

그러고는 종이를 넣은 봉투를 제드에게 건넸다.

“내일 아침에 아이한테 전해주라 해. 그때까지 아무도 봉투를 열어보지 말라 하고.”

“꼬마의 이름입니까?”

“아직은.”

제드의 물음에 블레이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일을 꾸밀 때 가끔 짓는 표정이었다.

“아이가 그 이름을 읽으면 그 애의 것이 되겠지. 못 읽으면 자네가 적당히 이름을 지어줘.” 

“꼬마가 읽으면 주신다고요……?”

제드는 떨떠름했다.

글자를 읽어야 이름을 받을 수 있다니. 

이 세계에서 글자를 쓰고 읽는 것은 고등교육에 속했다. 당장 하루하루를 버티기에 급급했던 아이가 글을 읽을 리 만무했다.

그건 지금껏 보고를 들은 블레이크도 알고 있는 내용일 텐데-.

‘한 번도 이러신 적이 없으셨는데. 갑자기 웬 심술이시지. 끙. 나한테 애 이름 짓는 걸 떠넘기시는 건가?’

도통 블레이크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지만, 아이의 이름을 짓는 건 제 몫이 될 모양이었다.

아까 아이에게 더 달라진 삶을 살 거라고 장담한 것도 있기에, 제드는 막중한 책임을 느꼈다.

‘그 귀여운 꼬마에게 어울릴 만한 이름을 고심해봐야겠군.’

제드는 물러가라는 손짓에 꾸벅 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방을 나서는 그의 뒤로 블레이크가 말했다.

“그리고 아이가 이름을 받으면, 그 외삼촌한테 한 번 더 다녀와.” 

“네?”

“돈을 좋아하는 작자라며? 보상을 두둑이 주는 게 좋겠어. 평생 일을 못 할 것 같으니.”

블레이크의 말에 제드는 알겠다는 의미로 씩 웃었다.

“아무렴요. 이름을 받으면 그 꼬마도 로드윅의 사람이니깐요.”

* * *

깊은 밤.

“오늘은 내 숙소에서 같이 자자. 2인실인데 나 혼자 사용하고 있었거든.” 

아그네스는 안나의 숙소에 있었다.

바닥에서 자겠다고 했다가 안나에게 한 소리를 듣고 침대에 누워있는 참이었다.

‘암살자 가문이지만 인정이 넘치는 곳인가 봐.’

노예에게도 침대를 내어주다니.

마구간이나 창고 한쪽에서 잠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푹신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침대가 어색했다. 아그네스는 이불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맞은편 벽에 붙은 침대에서는 안나가 곤히 자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으면 꼭 깨워야 한다?”

아까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아그네스는 어둠이 드리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누운 지 시간이 꽤 흘렀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낯선 환경인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아까 제드에게 들었던 말 때문이었다.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삶…….’

꿈이라기에는 지난 이틀이 생생했다.

그렇기에 아그네스는 자신이 처한 환경을 현실이라 여기기로 했다. 

죽기 전 찾았던 신의 안배인지, 혹은 다른 어떠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제게 기회가 주어졌다.

거기에 조만간 갖게 될 새로운 이름.

‘무슨 이름을 갖게 될까?’

아그네스는 블레이크의 얼굴을 떠올렸다.

블레이크는 자식을 둔 아버지라 여기지 못할 정도로 젊어 보이는 데다가, 상당한 미남이었다.

흐르는 분위기도, 기품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런 남자가 지어주는 이름이라면, 비록 노예의 이름이라 할지라도 멋스러울 거야. 

아그네스는 심장이 콩콩 뛰었다.

‘기왕이면 강해 보이는 이름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고통받지 않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그네스는 이런저런 이름을 상상하다가, 이상한 인기척을 느꼈다.

눈을 감고 있던 것도 아니건만, 언제 왔는지도 알지 못했다.

소년은 침대의 바로 옆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틀이 살짝 열려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아하니, 창문으로 들어온 듯했다. 

‘아, 로드윅 공작의 아들.’

시선이 마주쳤다.

냉랭한 붉은 눈동자가 아그네스를 바라봤고, 말똥거리는 은빛 눈동자가 데온을 바라봤다.

안나는 여전히 자고 있었고, 두 사람의 묘한 대립은 한동안 계속됐다.

먼저 입을 연 건 데온이었다.

“야. 멍멍이.”

“……멍멍이요?”

“네 머리 개털 같아.”

“…….”

아그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비죽거렸다.

목욕을 하기 전이면 몰라도, 지금 제 머리카락은 안나의 노력 덕분에 어둠 속에서 보아도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 제 머리카락을 개털 같다고 말하는 건, 안나의 노고를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않은가.

아그네스는 데온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개털 아닌데.”

반발심에 “……요.”라는 말은 조금 뒤늦게 나왔다.

그래도 존댓말은 했으니 주인의 아들을 무시한 건 아니다.

데온은 무척이나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아그네스를 바라봤다.

“내가 안 무섭냐?”

아그네스는 “무섭지 않다.”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무서워해야 하는 건가?’

데온에게 겁을 먹기엔, 그가 너무 어렸다. 아그네스의 정신은 열아홉 살이었으니.

그래도 원하는 대로 반응해주면 별로였던 첫 만남을 만회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던 아그네스는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와. 무섭다.”

“…….”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은 연기에는 소질이 없다는 걸. 게다가 데온에게 반말을 하는 실수까지.

나름대로 노력한 연기는, 역시나 데온의 성에 차지 않은 모양이었다.

데온은 아그네스가 자신을 놀린다 생각했는지, 험악한 얼굴을 했다.

“내가 로드윅이라는 걸 모르는 거야?”

데온은 언제 꺼냈는지 모를 검을 아그네스의 목을 향해 겨눴다.

“지금처럼 인기척도 없이 다가와서 널 죽일 수 있어.”

“……절 죽일 거예요?”

“그래.”

거짓말.

능력자들이 살의를 품고 있을 때의 기운을 아그네스는 알고 있었다.

모든 걸 불태워버릴 것만 같은 새빨간 핏빛.

하지만 데온의 기운은 평상시와 다름없는 검은색이었다.

‘죽일 생각이 없는데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아그네스의 눈에 달빛을 반사하는 칼날이 비쳤다.

검은 싫었다. 도망 횟수가 두 자리가 됐을 때, 게르웨르 공작은 기사들에게 검으로 그녀를 위협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 후로 아그네스는 자유조차 꿈꿀 수 없었다.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 그녀의 세상은 게르웨르 공작가의 지하실 우리였다.

“…….”

검을 마주하자 떠오르는 지난날의 기억이 아직 선명했다.

아그네스는 땀이 나는 손바닥을 침대 시트에 문지르며, 데온을 향해 태연한 척 물었다.

“그 검으로 찌를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할 거 같아?”

“안 찔렀으면 좋겠어요. 부탁이에요.”

데온은 침대 위에 누운 아그네스를 바라봤다.

조그만 아이가 애원한다.

그간 제 아버지가 데려온 다른 놀이 상대들도 그랬다.

한밤중에 나타나 겁을 주면,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제게 빌었다.

“…….”

데온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검을 거뒀다. 

검에 잘린 아그네스의 은발 몇 가닥이 공중에 흩어졌다.

“그러면 내일 당장 여기서 꺼져.”

울지 않는 저 얼굴이 조금 찝찝했지만, 이렇게 겁을 주었으니 다른 놈들처럼 내일 아침이면 저택을 나간다고 하겠지.

데온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침대에서 흘러나온 작은 목소리가 그의 걸음을 잠시 잡았다.

“……왜요?”

데온은 고개를 돌려 아그네스를 바라봤다.

소년의 붉은 눈에는 좀 전과 다른 확연한 적의가 담겨 있었다. 

“나는 인간이 싫으니까.”

* * *

‘인간이 왜 싫지?’

잠들기 직전까지, 그리고 일어난 뒤부터 지금까지. 데온의 말을 고민해봤지만,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능력자여서 인간을 싫어하나?’라는 게 제일 그럴듯했지만.

그렇게 되면 블레이크 또한 인간을 싫어한다는 말이 될 테니, 그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열어보시지요.”

집사의 인자한 목소리가 아그네스의 상념을 깨웠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타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집사실이었고, 손에는 방금 집사에게 건네받은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제드가 아침을 먹으러 가는 아그네스를 중간에 낚아채 이곳으로 데려온 덕분이었다.

“가주님께서 이름을 주셨어! 기대되지?” 

봉투를 여는 아그네스의 손을 두 쌍의 눈이 유심히 지켜봤다.

집사와 제드 또한 종이에 적힌 이름을 이 자리에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마침내 종이가 펼쳐지고, 세 사람은 글자를 확인했다.

‘아하, 가주님도 은근히 장난을 좋아하신다니까. 그나저나 요 꼬마 이름을 뭐로 해주지. 로즈랑 소피아 중에서 고민이 되는데. 흐음.’ 

당연히 아이가 이름을 읽지 못하리라 생각했기에, 제드는 블레이크가 장난을 친 것이라 여겼다.

그러니 제가 지은 이름이 아이의 이름이 되리라.

후보를 놓고 고심하는 그의 옆에, 다른 생각을 하는 집사가 있었다.

‘……이 이름을?’ 

집사는 덤덤한 표정이었지만, 속으로는 무척 당황했다.

블레이크가 준 아이의 이름이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름을 받게 된다면, 이 아이의 앞날은…….

‘……아니지. 직접 읽어야 이름을 주신다고 하셨으니.’

그러다 블레이크가 한 말을 떠올리고는 혼란을 가라앉혔다. 

아이가 글을 읽을 리 없을 테니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종이를 빤히 바라보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어제도 생각했지만, 정말이지 귀여운 아이였다. 특히 저 은색으로 빛나는 머리칼과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온갖 근심 걱정도 잊힐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흐뭇한 심정이 된 집사와는 달리, 아이는 매우 곤란한 표정으로 그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집사님.”

“……못 읽겠습니까?”

“잘못 주신 거 같아요.”

“잘못 드리진 않았습니다만.”

“하지만…….”

아이는 잠시 우물쭈물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집사의 잘못을 지적하는 양, 상당히 불편한 기색으로 종이를 힐끔거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기에 트아리체 로드윅이라고 적혀 있는걸요…….”

“……!”

“헉. 꼬마, 글자 읽을 줄 알아?!”

집사는 말문이 막혔고, 제드는 놀라 그녀를 추궁했다.

“네.”

“그래……?”

제드는 세상이 무너진 얼굴이었다. 제가 지은 로즈란 이름이 허공에 날아가 버렸다는 시답잖은 이유로 좌절한 것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아그네스는 자신이 또 실수한 모양이라 생각하며 난감해했다.

글을 안다는 걸 밝힐지 말지 잠시 고민했지만, 받은 이름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고민을 길게 할 수 없었다.

‘로드윅이라니.’

같을 성은 사용한다는 건 가족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적어도 제가 아는 지식으로는 그랬다.

‘잘못 받은 게 분명해.’

아그네스는 확신했다.

저 이름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이름일 게 분명했다. 그것도 혈통이 무척이나 고귀한.

손에 든 종이가 무거웠다. 고작 종이일 뿐인데 말로 할 수 없는 무게가 저를 누르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집사가 빨리 제 손에 들린 종이를 가져가 주길 바랐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눈으로 저를 보기만 하던 집사는, 이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트아리체 로드윅. 잘 어울리는 이름이군요.” 

“……네?”

“새로운 신분을 얻으신 걸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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