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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8)화 (8/89)

8화 너, 르티옴이네?

“열이 있잖아.”

리체는 정신을 잃은 데온의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몸이 열로 펄펄 끓었다.

‘큰일이야.’

고열은 아이의 몸에 좋지 못했다.

과거. 같이 지내던 아이들이 사라지던 건, 시끄럽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따금 지금의 데온처럼 열이 나고 식은땀이 나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런 아이들은 다음 날이면 사라졌고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그게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는 것은 리체도 알고 있었다.

‘아침이면 숲을 나갈 수 있다고 했지.’

그때까지 데온이 버틸 수 있을까.

리체는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마물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데온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아픈지 신음도 흘러나왔다.

‘마물한테 주려고 했다고?’

왜 못된 소리만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겁만 주고 자신을 구해주려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울컥한 마음을 내뱉느라 대꾸하지 않았으나, 데온이 하는 말은 다 듣고 있었다.

“어쩌지.”

19살인 예전의 몸이었다면 데온을 업고 안전한 곳이라도 찾아볼 텐데.

지금은 7살 꼬마밖에 되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으, 으으…….”

리체는 데온의 가슴께에 넘실거리는 검은 기운을 바라봤다.

손가락을 뻗자, 검은 기운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손가락에 감겼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손끝이 떨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두려움. 리체가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망설이던 리체는 손끝으로 정화의 힘을 흘렸다.

기운은 먹이를 향해 돌진하는 뱀처럼 반짝이는 빛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악!”

불에 달궈진 날카로운 송곳이 손끝을 파고드는 감각.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리체는 힘을 멈추고 손을 뒤로 뺐다.

검은 기운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일렁였다.

‘못 해.’

그 게르웨르 공작도 리체가 9살 생일을 맞기까지 기다렸다.

후에 재밌는 이야기처럼 털어놓기를, 그 전에 정화를 시켰더라면 몸이 버티지 못했을 거라 했다.

“죽고 말았겠지. 르티옴의 힘은 심장에서 뻗어 나오는 것이니까. 네 몸속으로 들어간 내 저주의 기운이 네 심장을 터트렸을 거다.” 

익숙한 고통은 리체를 지난 기억 속으로 집어넣었다.

“정화해.”

“아파, 아파요……!”

리체의 작은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이번에는 고통받지 않는 삶을 살아보겠노라고 다짐했는데.

“쿨럭. 쿨럭.”

데온의 상체가 크게 들썩였다.

조금 전의 짧은 정화가 기운을 자극해 오히려 독이 된 듯했다.

데온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아까와 달리 짧고 거칠게 내뱉는 숨이, 곧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리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이틀.

어제와 오늘, 자신은 아프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었고, 따뜻한 물로 목욕을 했다.

푹신한 침대에서 잠을 청했고, 저를 다정히 대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짧게나마 희망을 다시 품었고, 새로운 이름도 생겼다.

실감이 나지는 않았지만 아빠와 오빠도 생겼다.

어쩌면 신이 제게 선물한 것은 게르웨르 공작의 발길이 끊긴 뒤의 짧은 안식인지도 몰랐다. 원래는 지하실에서 끝났을 삶이었다.

“아빠라고 부르거라.”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으면 로드윅 공작에게 아빠라고 한번 말해볼걸.

평생 불러 볼 일 없던 호칭이었는데.

결심보다는 단념에 가까웠다. 다시 제 삶을 놓을 준비를 한 리체가 데온을 향해 벌벌 떨리는 손을 뻗었다.

싸아아아아.

다시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들끼리 스치는 소리가 났다.

마물들이 쓰러진 땅이 사라지고 새로운 길이 생겼다.

숲이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죽지 마. ……오빠는.”

리체는 이를 악물었다.

곧 덮쳐올 거대한 고통을 각오하며, 정화의 힘을 사용하려던 그때였다.

“어……?”

쿠웅.

변화를 마친 숲. 그리고 아이들 앞에 펼쳐진 거대한 호숫가의 풍경.

시원하게 펼쳐진 밤하늘은 무수한 별들로 뒤덮여 있었다. 잔잔한 호수가 그 밤하늘을 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반짝였다. 마치 보석을 흩뿌려 놓은 것처럼.

리체는 그 고요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시선을 빼앗겼다.

통, 통.

호수 속의 별들 중 하나가 물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리체의 주위를 빠르게 날아다녔다.

‘……뭐지?’

리체는 고개를 돌려 별을 쫓았지만, 빠른 속도 때문에 보이는 거라곤 빛의 잔상뿐이었다.

그런 리체의 귓가에 해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너, 르티옴이네?]

* * *

끼에엑!

촤악.

달려드는 마물 한 마리가 제드의 검에 쓰러졌다.

제드는 뿌듯한 기분으로 블레이크를 돌아보았다.

“가주님, 보셨습니까? 방금 제 검 실력…….”

을…….

하지만 자랑은 도중에 들어갔다.

블레이크의 일격 한 번에 마물 세 마리가 쓰러지고 있었다.

“뭐라고 했어?”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정말 가주님 혼자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따라올 필요는 없었을지도.

새삼 제 주인의 비상식적인 실력을 실감한 제드가 고개를 저었다.

‘가주님이 괴물인 거야. 나 정도면 뛰어나지, 아무렴.’

제드가 스스로 위안하는 동안, 블레이크는 검을 든 채 주변을 살폈다.

조금 전, 숲이 다시 움직여 모습을 바꿨다. 이로써 두 번째.

리체라 생각되는 아이의 비명이 들린 방향으로 달려가던 중이었다.

‘데온이 혼자 두지는 않았을 텐데.’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데온은 매정한 편이 아니었다.

암살자 흉내를 내는 것도 고작 겁을 주기 위함이 아닌가. 제 곁에 사람이 오지 않도록. 사실 데온은 사람 한 번 죽여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리체가 잘못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블레이크는 불안했다.

‘하필 보름달이 뜨는 날…….’

밤은 숲의 시간이었다.

개중에는 달의 크기에 영향을 받는 것도 있었다.

마물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보름달이 뜬 날,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 숲을 배회한다는 이야기도 예로부터 돌았으니.

블레이크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마물을 아무렇지 않게 베어버리며, 걸음을 옮겼다.

“제드.”

“넵. 넘어가죠.”

밤공기가 차가웠다.

* * *

[진짜 르티옴이다!]

첫 번째 별이 호수에서 나온 뒤, 다른 별들도 물 밖으로 나와 리체의 주변으로 날아왔다.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한밤중인데도 낮처럼 주변이 환했다.

[나랑 계약해!]

[아니야, 나랑!]

[내가 더 강해!]

그러고는 앉아 있는 리체를 가운데 두고 자신들끼리 경쟁을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리체는 어리둥절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데온의 곁을 지켰다.

“으윽…….”

데온의 상태는 여전했다.

‘르티옴이란 소리는 못 들었겠지……?’

아무 말도 없이 신음만 내뱉는 걸 보면 그런 듯했다.

리체가 고통스러워하는 데온의 손을 잡아주려 할 때였다.

[안 돼!]

[힘을 쓰려면 계약해야 해!]

빽, 지르는 소리가 한쪽 귀를 뚫고 반대편 귀로 나갈 정도로 시끄러웠다.

그저 손을 잡으려던 것뿐인데.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귀에 가져간 리체가 별들을 향해 말했다.

“저기, 미안한데 조금 시끄러워……. 작게 말해주면 안 될까?”

[그러면 계약해 줄 거야?]

“계약?”

리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부터 묻고 싶긴 했지만,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해 물어보지를 못했다.

“무슨 계약을 말하는 거야?”

[무슨 계약이긴! 르티옴이랑 하는 계약이지!]

“나랑? ……왜?”

[르티옴이랑 계약하면 우리는 밖으로 나갈 수 있어.]

“밖? 밖이 어딘데?”

[네가 있는 세계.]

리체와 대화하는 게 즐거운 듯, 별들은 꺄르르 웃어 댔다.

그러다 조용히 해달라는 리체의 말이 떠올랐는지, 자신들끼리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계약, 빨리해야 해.]

[가장 큰 별이 나오면 큰일 나.]

[계약 싫다고 했어. 르티옴을 보면 없애버린다고 했어.]

[걔는 무서워.]

[강하니까 무서워.]

‘가장 큰 별?’

그런 리체의 궁금증에 답하기라도 하듯, 호수에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조금 전, 별들이 밖으로 나올 때 통통거리던 소리와 달리 묵직한 소리였다.

[꺅!]

[도망쳐!]

리체 주변에 모여있던 별들이 쏜살같이 사라졌다.

어둠이 다시 찾아왔지만, 잠시였다.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찬란한 빛이, 리체의 앞에 나타났다.

눈부심에 리체는 실눈을 떴다.

그것은 리체를 관찰하듯 허공에 떠서 번쩍이다가, 키득거렸다.

[너, 처음이 아니구나?]

“……?”

[마음에 들었어.]

빛은 리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가장 큰 별이 르티옴을 없애버릴 거라고 했잖아.’

그 전에 데온을…….

리체는 재빨리 데온의 손을 잡고 정화의 힘을 사용했다.

‘아파……!’

온몸이 찢기는 고통, 고르게 변하는 데온의 숨소리, 자신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빛 덩어리.

찰나에 느껴지는 커다란 감각들 속에, 리체는 정신을 잃었다.

* * *

“……가씨, 아가씨!”

리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침대 위였다.

일전에 안나와 함께 사용했던 사용인들의 침실이 아닌, 호화로운 방의 커다란 침대였다.

‘여기는…….’

눈을 뜬 리체는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새도 없이,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

안나였다.

“괜찮아요?!”

“괘, 괜찮…….”

안나는 다행이라는 말을 다섯 번쯤 반복한 뒤에, 리체에게 물을 건네주며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가주님께서 두 분을 찾으러 숲으로 들어가셨어요.” 

아침까지 기다리지 못한 블레이크와 제드가 두 사람을 찾으러 숲속으로 들어갔다.

숲이 세 번째 모습을 바꿨을 때, 다행히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쓰러진 데온과 리체가 있었다고 했다.

“시기가 좋았어요. 더 늦었으면……. 조류형 마물이 근처 나무에서 두 분을 노리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마물을 처리한 블레이크와 제드는 아이들 옆에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런 뒤, 정신을 잃은 아이들을 업고 숲을 나왔다고 했다. 

그게 어제 아침의 일.

정신을 잃은 리체는 침대 위에서 꼬박 하루를 잠들어 있었다. 

“만 하루 동안 깨어나지 않으셔서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그렇게 말하는 안나의 얼굴이 퀭했다.

하룻밤 내내 리체의 곁을 지키고 있던 탓이었다.

“배는 안 고프세요?”

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안 고파요.”

“그래도 점심 먹기 전에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수프를 가져올게요. 하루를 안 드셨으니 빈속에 식사하시면 배가 놀랄 거예요.”

침대에 앉은 리체는 그런 안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안나는 그런 리체를 보며 속으로 앓는 중이었다.

‘아으. 진짜 귀엽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동글동글한 눈으로 저를 보는데, 어찌나 귀여운지.

다시 껴안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했지만 놀랄 테니 참아야지.

‘깨어나서 다행이야. 마물의 숲에 들어갔다고 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아이가 다친 곳 없이 블레이크의 품에 안겨 돌아온 뒤에도 시름을 놓을 수 없었다.

도통 깨어나질 않으니. 혹여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마음고생을 꽤 했다.

“금방 가져올게요.”

“저기…….”

리체가 문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트는 안나를 잡았다.

왜 제게 존댓말을 하는지, 공작님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이런저런 질문은 많았지만, 그래도 제일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도련님, 아니. ……오빠는요?”

“아, 도련님요?”

안나는 속 시원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갇히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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