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9)화 (9/89)

9화 괜찮아져서 다행이다

데온이 깨어난 건 저택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라.” 

블레이크에게 잔뜩 혼이 난 데온은 일주일간 별채의 방에서 근신 처분을 받았다.

어차피 나갈 생각도 없었으니 갇혀있는 건 상관없었지만.

그 강아지를 닮은 꼬맹이가 걱정되긴 했다.

“그러길래 마물의 숲에 일반인을 데리고 들어가시면 어떻게 해요? 7살밖에 안 됐는데.”

“시끄러워.”

오늘 아침. 병문안이란 명목으로 찾아온 제드는 데온의 속을 긁고 갔다.

블레이크가 직접 주워 어렸을 때부터 키웠기 때문인지, 제드는 로드윅 가에서 유일하게 가주와 데온을 편하게 대했다.

자신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제대로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크. 우리 도련님 화나셨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걔는 어떻게 됐어?”

제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리체가 무척이나 신경 쓰인다는 티가 팍팍 나는 데온을 보며 씩 웃었다. 어디까지나 속으로.

‘의원이 곧 깨어날 거라 하긴 했으니까.’ 

제드도 리체가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밤잠도 못 이루는 안나나 블레이크만큼은 아니었다.

물론 어제오늘 제가 찾아올 때마다 리체의 안부를 묻는 데온만큼도 아니었고.

제드는 데온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안 깨어나셨어요.” 

한낮이지만 모든 창문에 커튼을 친 방은 밤처럼 어두웠다.

데온은 소파에 누워 만년필을 던졌다 받기를 반복했다.

‘이틀이나 지났는데 안 깨어났나?’

겁도 없는 건방진 꼬맹이.

데온은 이제 자신이 겁을 주려 노력해도 리체를 로드윅 가에서 쫓아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꼬마는 처음부터 절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무서운 척 연기를 한 것일 뿐.

‘젠장.’

데온은 미간을 좁혔다.

신경 쓰여.

리체가 깨어나지 않는 것도 신경 쓰이고, 자신이 정신을 잃었을 때 일어난 일도 신경 쓰였다.

‘하나도 기억이 안 나.’

갑자기 몰려온 마물들 때문에 무리해서 능력을 사용했다.

그 여파로 쓰러졌고, 다시 눈을 뜨니 저택에 돌아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리고 왜 아프지 않은 거지?’

숲에서 사용한 능력의 부작용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데온은 심장 부근에 손을 가져갔다.

항상 느껴지던 고통이 없었다. 날카로운 검에 베이는 듯하고 심장이 죄이는 듯한 고통.

어렸을 때부터 몸에 쌓인 기운 때문이었다. 로드윅 가문의 능력자들은 그 기운을 ‘옴’이라고 불렀다.

데온은 잠재력이 높은 만큼 옴이 잘 쌓이는 체질이었다.

그렇기에 블레이크는 데온에게 성인이 될 때까지는 능력을 가급적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그랬는데.

‘옴이 하나도 안 느껴져.’

이토록 개운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도대체 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자신은 이렇게 멀쩡해지고 그 아이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걸까.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데.’

데온은 만년필을 다시 공중으로 던졌다.

숲속에서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미안하다는 소리조차 못했다. 여차하면 절 버리고 가길 바랐다.

“멍청이 아니야?”

그런데 왜 절 두고 가지 않은 건가. 

정신을 잃을 만큼 위험한 일이 생겼으면 자신을 두고 도망쳤어야지.

“숲에서 얼마나 귀여웠는지 아세요? 아가씨가 글쎄, 도련님 손을 꼭 잡고 있더라니까요?” 

데온은 리체가 잡고 있었다던 제 오른손을 접었다 폈다.

머릿속에 작은 체구의 은발 여자애가 떠올랐다.

손까지 잡고 있었다고? 진짜 멍청이다.

똑. 

그때였다. 데온의 귓가에 뭔가가 유리창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휙, 하고 데온의 손에서 벗어난 만년필이 유리창 옆 커튼에 박혔다.

뾰로통했던 데온의 얼굴에는 어느새 무표정이 자리 잡았다.

‘방 안으로 들어온 건 아닌가 보네.’

데온이 갇힌 방은 인적이 드문 별채의 1층이었다.

소리가 들린 창문 반대편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이 아닌 화단이었고.

‘이번에 기사들을 새로 뽑았다고 했지. 겁도 없는 쥐새끼가 또 숨어들어 왔나?’

로드윅은 유달리 적이 많았다. 

그렇기에 다른 귀족이나 황족들이 사용인이나 기사로 위장한 첩자를 보내는 일도 종종 있었다. 

‘본보기가 필요해.’

이번에는 다른 때와 달리 능력을 사용해서 적들에게 경고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 꼬맹이가 저택에 있으니까.

‘적어도 걔는 건들지 못하게-.’

인기척을 죽이고 창문으로 걸어간 제드는 커튼을 열어젖혔다.

“으앗!”

“……?”

깜짝 놀란 누군가가 창 너머에서 소리를 질렀다.

뭐 이런 허술한 첩자가 다 있지?

데온은 창틀로 뛰어올라, 창 아래를 살폈다.

“아야…….” 

“너……!”

화단에 엉덩방아를 찧은 리체가 있었다.

분명 아침에 제드가 아직 안 깨어났다 하지 않았는가. 그새 깨어난 건가?

데온이 창문을 열려고 했지만,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탓에 열리지 않았다.

“야, 너 넘어졌어?”

조그맣고 둔하기까지 하다. 어떻게 하면 화단에서 넘어지지? 태어난 지 한 달 된 강아지도 아니고.

당황한 데온과 리체가 눈이 마주쳤다.

리체의 동글동글한 눈이 데온의 상체를 잠시 주시하다, 사르르 접혔다.

“다행이다! 괜찮아졌네!”

환히 웃는 리체의 밝은 목소리가 창을 타고 데온에게 전해졌다.

데온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벽에 박힌 만년필을 뽑아와 창틀을 만지작거렸다.

‘뭐 하는 거지?’

리체는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두 손을 짚은 채, 창문 너머의 데온을 구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깍, 거리며 잠금장치가 풀렸다.

데온은 창문을 열고 리체의 앞에 섰다.

“야.”

“……?”

“누가 누구보고 괜찮대?”

“어……?”

왜 갑자기 시비지.

리체가 당황해서 데온을 바라봤다. 

제가 실수했나. 

열도 가라앉은 것 같고, 검은 기운도 모두 정화된 걸 확인했으니 괜찮아졌다고 한 건데.

‘아직 아픈가?’

데온은 속으로 걱정하는 리체를 일으켜 세운 다음,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등을 내밀었다.

“?”

“업혀.”

* * *

“도련님께서 탈출하셨습니다!”

데온의 방을 지키던 기사의 보고를 받았다. 블레이크는 결재하던 서류를 마무리하고 서재를 나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치는 아들 덕분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가주 자리에 앉기 전에는 철이 들어야 할 텐데.’

단명하는 가족력 때문에, 공작들은 이른 나이에 가주 자리에 앉았다.

블레이크가 가주가 된 것도 16세였다.

자신이 이제 32세이고, 데온이 9세이니.

통상적으로 생각한다면 데온도 16세쯤 가문을 물려받겠지만.

‘3년 정도 남았나.’

로드윅은 그날이 다른 이들이 예상하는 시기보다 빠르게 올 것이란 걸 직감하고 있었다.

제 삶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아이는 데온 하나뿐이어도 괜찮아.”

“제가 아쉬워서 그래요. 데온에게 가족을 남겨주고 싶거든요. 당신이나 저나, 허락된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을 테니깐요.”

그렇게 말한 그의 아내는 울음소리 한 번 못 내본 둘째 아이와 함께 먼저 명을 달리했다.

블레이크가 먼저 떠난 가족들의 곁으로 갈 날도 곧이었다.

그전까지는…….

“리체는 방에 있나?”

블레이크는 복도를 걸으며 제 뒤에서 걸어오는 제드에게 물었다.

리체가 깨어난 건 오늘 아침이었다. 

데온이 방 밖으로 나갔다면 리체에게 갔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리체의 방문에 호위를 붙여놓았다. 

큰일은 없을 터였다.

“저도 마지막으로 본 게 가주님과 함께 갔을 때라. 안나한테 물어보겠습니다.”

“됐어. 방으로 가보면 알겠지.”

블레이크는 성큼성큼 걸어가 계단을 내려갔다.

서재가 있는 3층에서 리체의 방이 있는 2층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금세 방문 앞에 도착했다. 

블레이크가 노크하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가려던 안나였다. 블레이크와 눈이 마주친 그녀의 얼굴은 사색이 돼 있었다.

“가, 가주님 오셨어요?”

“리체는 안에 있나?”

“네. 안에 계세요.”

“안나, 너 얼굴 무슨 일이야? 며칠 화장실 못 간 사람 같아.”

안나는 제드를 흘겨보며 뒤로 고개를 돌렸다. 

너도 보면 기겁할 거다. 그런 의미가 담긴 고갯짓이었다.

과연. 말보다는 눈이 빨랐다.

“…….”

이미 방 안의 광경을 목격한 블레이크는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제드는 어버버 거리더니, 안나와 다름없이 사색이 되어 중얼거렸다.

“이거 꿈이야?”

그들이 보고 있는 건, 웃으며 리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는 데온이었다.

* * *

“내가 생각해봤는데요, 아가씨는 인간이 아닌 거 같아요.”

“……?”

오물오물.

식탁에 앉은 리체는 안나가 뜯어준 빵을 씹으며 제 앞에 앉은 제드를 바라봤다.

제드는 그런 리체와 시선을 마주하다, 별안간 가슴께를 쥐었다.

“윽. 그렇게 귀엽게 본다고 제가 넘어갈 거 같아요?”

‘왜 저러지.’

“뭐래. 아가씨 아침 드시는데 갑자기 와서 시비야." 

안나가 제드를 타박했다.

제드는 억울하다는 듯이 제 동생을 향해 항변했다.

“안나, 너도 어제 봤잖아! 웃어? 우리 도련님이? 고작 9년 살고 인생 다 산 것처럼 하찮다는 표정만 짓고 다니는 우리 도련님이?! 얼마나 아가씨가 귀여웠으면!”

꿀꺽.

빵을 다 씹어 삼킨 리체가 제드에게 말했다.

“그건 절 놀리느라 그런 거예요.”

어제. 깨어난 리체는 데온이 걱정돼서 방까지 찾아갔고, 정화가 제대로 된 것을 확인하고 기뻐했다.

그런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데온은 다리도 짧은 게 어느 세월에 갈 거냐고 불평하며 리체를 방까지 업어다 줬다.

그리고 거기에 원인이 있었다.

침대 옆 협탁에 안나가 갖다 놓은 그림책.

“야, 너 글씨 모르지?” 

“……아는데?”

“그러면 읽어봐. 읽으면 믿어줄게.” 

데온의 도발에 울컥한 리체의 그림책 읽기가 시작됐다.

하필이면 개 그림이 잔뜩 있는 그림책이었다.

데온은 글씨를 술술 읽어나가는 자신을 보고 놀라지도 않고, ‘이 개는 널 닮았다. 저 개는 널 닮았다.’ 같은 소리만 늘어놓았다.

거기에 리체가 지지 않고 ‘이 개가 데온을 닮았다. 저 개가 데온을 닮았다.’ 하고 받아치자 데온이 기가 찬다는 웃음을 터트린 게 사건의 진상이었다.

‘9살이랑 진심으로 싸우다니…….’

제가 그래도 데온보다는 10년은 더 살아온 경험이 있는데.

살짝 자괴감이 들긴 했지만, 이상하게 데온한테는 지고 싶지 않았다.

“아니에요. 데온 도련님이 웃은 건 아가씨가 귀여운 탓이라니까요.”

정색하고 반박하는 제드에게 리체는 입술을 달싹이다 다물었다.

자신은 귀엽지 않다, 라고 말할 뻔했다.

‘깎아내리는 말 금지.’

리체는 다시 제게 주어진 임무를 명심했다.

깨어난 리체에게, 블레이크가 정해준 몇 가지 규칙이었다.

“노예란 단어 금지, 더럽다는 말 금지. 그리고 또…….”

블레이크는 수많은 금지 속에 머릿속이 복잡해진 리체를 안아 들었다.

“공작님 금지.” 

“그러면…….” 

공작님을 공작님이라 부르지 못하면 뭐라고 불러야 하나.

“말했잖나. 아빠라 부르라고.”

“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다. 그러니 한번 해 봐.”

“아, 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블레이크도 만만치 않았다.

부끄러워하는 리체에게 끝내 아빠란 소리를 듣고 만족한 듯 돌아갔다.

“데온 도련님은 오늘 못 오실 거예요. 다시 방에 갇히셨거든요.”

제드는 이만 가봐야겠다며 데온의 소식을 전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평화로운 하루가 흘러갔다.

블레이크와 점심과 저녁을 함께 먹고, 하녀들과 공작성을 산책하고, 이른 밤에 침대에 누워 안나가 읽어주는 그림책을 봤다.

“아가씨, 주무세요?”

졸음에 끔뻑이던 리체의 눈이 완전히 감겼다.

안나는 조용히 일어나 방의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나갔다.

“…….”

잠시 뒤.

혼자 남은 리체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말똥말똥한 은빛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했다.

[르티옴.]

그곳에는 작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빛 하나가 있었다.

[이제 우리 둘만 남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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