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10)화 (10/89)

10화 계약해

이 세계는 두 개로 나뉜 세계였다.

하나는 인간들이 문명을 일군 인간계. 

또 하나는 잊혀진 별들이 잠든 다른 차원의 세계.

별들은 그곳을 ‘무덤’이라 불렀다.

뛰어난 여섯 개의 별이 무덤을 관장했다. 

그러던 중 위대한 별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네 개의 별은 인간계로 넘어와 네 명의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뿔싸.”

침대에 앉은 리체의 맞은편에는 양손으로 머리를 싸매는 다람쥐가 있었다.

눈이 부신다는 리체의 말에 별이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주겠노라며 변한 모습이었다.

왜 하필 다람쥐일까 생각했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해준다고 해서 말을 끊지 않고 듣는 중이었다.

“인간계랑 우리 세계랑 환경이 안 맞는 거지. 환경이.”

인간은 별의 힘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별들은 새로운 몸을 찾아 배회했고, 무덤에 남은 위대한 별 하나가 그들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그 호구 같은 녀석이 걔네한테 자기 힘을 빌려준다네?”

다람쥐는 털이 잔뜩 부푼 꼬리를 침대에 팡팡 내리쳤다.

위대한 별은 무덤에서 인간계에 자신의 힘을 담은 운석을 떨어트렸다.

힘은 땅에 흡수돼 마물의 숲을 만들어냈고, 보름달이 뜨는 날에만 생기는 호수가 무덤과 인간계를 잇는 장소가 되었다.

위대한 별은 우연히 호수로 온 인간을 모체로 삼아 자신의 힘을 담은 르티옴을 탄생시켰다. 첫 번째 르티옴의 탄생이었다.

르티옴은 몸속의 힘을 매개체로 위대한 별의 힘을 사용했다.

다른 위대한 별들을 받아들인 인간들의 몸에 쌓인 부작용을 정화해주는 힘.

“하지만 환경은 중요했지. 르티옴이 있으면 뭣해. 그 녀석들이 인간계에 적응하지 못하는데.”

약해질 대로 약해진 네 개의 별은 다시 무덤으로 돌아와 깊은 잠에 빠졌다.

남은 힘은 인간들의 피를 통해 계승됐다. 로크샤 제국의 네 공작 가문의 시초였다.

르티옴 또한 힘이 계승됐지만, 피를 통한 것은 아니었다. 

“르티옴과 함께 흙으로 돌아간 힘은, 인간계의 땅을 떠돌며 다시 새로운 모체를 찾아 르티옴을 탄생시켰어. 그게 문제였지. 새로운 르티옴이 계속 태어나는 게.”

“문제?”

“별이 직접 인간계로 가서 만들어진 능력자들과 달리, 르티옴은 우리 세계에서 인간계에 간섭해 만들어진 결과였거든.”

두 세계를 잇는 존재, 르티옴.

능력자들의 정화를 위해 만들어졌으나, 인간의 몸으로는 위대한 별의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위대한 별은 새로운 르티옴이 어느 정도 자라면 핏속의 힘을 이용해 호숫가로 오도록 유도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별은 잠시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르티옴이 호수에 왔을 때 힘을 거둬들이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그 능력자인지 뭔지 하는 인간들이 뭐가 불쌍하다고.”

그때마다 위대한 별은 무덤을 나갈 수 없는 자신 대신 다른 별들에게 르티옴과의 계약을 부탁했다.

무덤의 존재와 계약해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데 용이하도록.

그러던 중 르티옴의 다른 부가적인 기능이 발견된 것이다.

‘별들의 유희.’

르티옴과 계약한 별은 한시적이나마 무덤을 탈출해 인간계에 머물 수 있었다.

갑갑한 무덤에서 따분함을 호소했던 별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유희 거리는 없었다.

르티옴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계약을 맺으면 몸에 무리 없이 정화할 수 있을뿐더러, 계약한 별의 힘 일부도 사용할 수 있었으니.

하지만 새로운 르티옴이 태어나고, 계약하고, 힘을 사용하는 반복된 그 과정에서.

“호구에게 무리가 간 거지.”

결국 르티옴을 만들어낸 위대한 별마저 깊은 잠에 빠졌다.

“그 영향으로 인간계에 있는 그 녀석의 힘도 영향을 받았지. 새로운 르티옴이 태어나는 주기가 점점 길어졌으니까. 이제는 르티옴이 백 년에 한 명 정도로 나온다며?”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위대한 별이 잠들고, 새롭게 태어나는 르티옴들은 호수를 찾지 못했다.

호수에 대한 것을 함구하는 것이 역대 르티옴들과 위대한 별의 약속이었으니, 새로운 르티옴을 비롯한 그 누구도 ‘별과의 계약’이나 ‘호수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니 그 녀석이 잠든 뒤에 태어난 르티옴들은 고생 좀 했을 거야. 별과 계약하지 못하고 힘을 썼을 테니까. 그렇다고 내가 르티옴을 불쌍하게 생각하느냐? 그건 아니야. 르티옴이 태어날 때마다 그 녀석이 잠들어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다람쥐 모습을 한 별은 양 앞발을 허리에 얹고 씩씩거렸다.

“그래서 무덤에서 이를 갈고 벼르고 있었지. 호구의 힘을 빼먹는 가증스러운 르티옴이 내 눈에 띄면 없애버리려고.”

“그러면…….”

지금껏 말을 아꼈던 리체가 입을 열었다.

데온을 정화할 때, 제 심장이 터지지 않은 건 제 몸속으로 들어온 별이 도와줬기 때문이라 했다.

숲에서 봤던 호숫가는 무덤과 인간계를 잇는 통로 같은 곳이라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눈앞의 별이 르티옴을 끔찍이 싫어한다면, 왜 자신을 그때 죽게 두지 않았던 걸까.

“나를 없앨 거야?”

“글쎄. 호수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별은 쪼르르 리체의 팔을 타고 어깨에 올라갔다.

살랑이는 꼬리가 뺨에 닿아 간지러웠다.

“너 이번이 두 번째 삶이지?”

확신에 찬 어조였다.

리체는 뜨끔했지만,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믿지 않을 이야기라 말하지 않은 것이지, 딱히 과거로 온 걸 숨길 생각은 없었다.

“맞아.”

별은 그럴 줄 알았다면서 콧김을 내뿜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건 그 녀석밖에 못 해. 호구긴 해도 위대한 별이니까. 널 과거로 보낸 건 잠들어 있는 걔란 소리지.”

“……르티옴을 만든 존재가 나를 다시 살린 거야?”

“그래. 그리고 나는 걔가 널 과거로 보낸 이유를 알고 싶어.”

뺨에 닿는 꼬리의 감촉이 사라졌다.

다시 찬란한 빛으로 변한 별이 허공에 둥둥 떠 리체에게 말했다.

[나와 계약해. 인간. 누구보다 강하게 만들어줄 테니.]

미성의 목소리에는 제가 한 말을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하지만 리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강한 것보다 아프지 않은 게 좋아.”

[아프지 않게? 그것도 가능하지. 내 계약자에게 못할 것은 없으니.]

아프지 않으면 그걸로 족했다.

리체는 계약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서로가 동의했으니 계약을 진행하겠어.]

별이 물었다.

[르티옴, 네 이름은?]

“내 이름은…….”

리체는 잠시 망설였다.

지난 삶의 이름은 버렸고, 이번 삶의 이름은 최근에 생겼으나.

제가 아직 그 이름으로 살아가도 좋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빨리 말해. 나는 참을성이 없으니까.]

“트, 트아리체 로드윅……!”

별의 재촉에 리체가 엉겁결에 이름을 외쳤다.

그러자 별은 기다렸다는 듯 크기를 키웠다.

성스럽게 빛나는 빛 속에서 미성 대신 근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이름은 파이톤스. 여섯 개의 위대한 별 중 하나. 트아리체 로드윅의 동의를 얻어 별의 계약을 맺는다.]

거대한 빛이 리체의 몸에 스며들었다.

이어, 문양 하나가 리체의 손바닥을 가득 채운 채 떠올랐다가 사그라들었다.

바뀐 게 없는 것 같은데.

“……끝난 거야?”

“그래.”

리체는 손바닥을 향해 질문했으나, 대답은 그녀의 뒤쪽에서 나왔다.

뒤를 돌아보자 침대 헤드에서 마른 세수를 하는 다람쥐 한 마리가 있었다.

파이톤스였다. 귀엽고 하찮은 입에서 그와 걸맞은 가벼운 톤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 계약자가 된 걸 영광으로 알라고. 꼬마야.”

* * *

날이 좋은 오전.

블레이크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지만, 신경은 온통 문 너머에 있었다.

“…….”

복도에서 들리는 앙증맞은 발소리.

분명 리체의 발소리가 분명한데, 들어오지는 않고 문 앞을 왔다 갔다 하는 소리만 들렸다.

한 시간 전부터였다.

문 앞에서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고, 또 한참을 조용해졌다가 다시 움직이고.

저러니 신경이 쓰여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있나.

물론 리체는 블레이크가 제 인기척을 눈치채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모를 테지만.

‘내게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급기야 블레이크는 펜을 완전히 손에서 놓고 문을 주시했다.

제드가 옆에서 봤다면 입을 떡 벌릴 만한 행동이었다.

블레이크는 그게 이상하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지난번 데온과 그림책을 읽었지. 그것과 관련이 있는 일인가.’

며칠 전, 블레이크가 목격한 모습은 과히 놀라웠다.

데온이 누군가와 저리 즐겁게 지내다니?

같은 능력자이자 동갑내기인 히베츠만 공자와 함께 있을 때조차 찬 바람이 쌩쌩 부는 아이였다.

긍정적인 데온의 변화에 흐뭇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블레이크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살짝 아쉬움을 느꼈다.

“아가씨를 데려온 건 가주님이신데 도련님과 더 친해지셨네요. 원래 목적이 그거였긴 했지만요.” 

제드가 한 말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 건, 블레이크의 정곡을 찔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데려온 건 자신인데 왜 저랑은 서먹하게 구는지.

“고, 공작님.”

트아리체 로드윅이 되었어도 아이는 여전히 절 공작님이라 불렀다.

그래서 며칠 전, 끈질긴 걸 알면서도 아이에게 아빠란 말을 받아냈다. 제 예상보다 꽤 듣기 좋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리체가 블레이크를 아빠라 부르는 일은 없었다.

부끄러워하는 듯해 더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자신을 찾아온 게 아빠라 부르기 위함이라면?

“아빠, 그림책 읽어주세요오…….”

말도 안 되는 환청이었으나, 블레이크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결국 오늘도 서류는 뒷전. 

블레이크는 문을 슬쩍 열었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작은 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원래 인기척을 내고 다니지 않는 블레이크의 습관 탓에, 리체는 문이 열린 지도 모르는 듯했다.

“크흠.”

갑자기 말을 걸면 놀랄까 헛기침을 냈다.

하지만 그런 배려는 문을 열기 전에 해야 했다. 

헛기침 소리에 고개를 돌린 리체는 무뚝뚝한 표정의 블레이크를 보고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까, 깜짝이야.’

블레이크가 그런 리체를 향해 물었다.

“내게 부탁할 거라도 있나?”

근엄한 태도였으나, 그의 차분한 시선이 닿은 곳은 리체의 비어 있는 두 손이었다. 

……그림책은 아니군. 

리체는 블레이크의 말에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저……. 다람쥐 키워도 돼요?”

“다람쥐?”

갑자기 다람쥐라니?

블레이크는 다람쥐가 사람의 손을 타는 동물이었나를 잠시 고민했다. 

그 사이, 리체의 어깨 위로 다람쥐 한 마리가 쪼르르 올라왔다.

갈색 털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작고 귀여운 생김새였다.

“얘인데……. 작으니까 밥도 많이 안 먹을 거예요. 안 될까요? 고, 공…….”

공작님.

블레이크는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실룩였다.

또다시 공작의 심기를 건드렸나 싶어 리체는 가슴이 철렁했다.

‘화가 나셨나? 역시……. 객식구 같은 내가 반려동물까지 들인다고 하면 화가 나겠지.’

하지만 파이톤스를 몰래 데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별은 인간계의 환경 때문에 계약한 르티옴의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했으니.

크게 결심한 리체가 블레이크를 올려다보았다.

“안 될까요……?”

그러고는 머뭇거리며 마저 뒷말을 덧붙였다.

“아빠.”

“…….”

붉은 눈이 리체를 바라봤다.

처음 마주쳤을 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블레이크는 상당한 미남 귀족이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흐르는 귀품. 역시 제 아빠라 말하기에는 너무 고귀했다.

지금, 말없이 저를 쳐다보기만 하는 블레이크가 무서운 건 별개의 이야기였지만.

마침내 블레이크의 입이 떨어졌다.

“그러거라.”

“……!”

리체의 얼굴이 환해졌다.

블레이크는 고민 끝에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겠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조용히 지내게 할게요! 있는 듯 없는 듯요!”

“…….”

있는 듯, 없는 듯이라니. 

블레이크의 얼굴에 아쉬움이 감돌았다.

그가 좀 전까지 ‘다람쥐 사육장으로 별채만 한 온실 하나면 적당할까.’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리체가 알기에는 아직 먼 이야기였다.

* * *

데온은 별채 밖으로 나왔다.

따사로운 햇살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탈출했던 날이 근신 기간에서 제외됐기에, 8일 만에 벗어나는 별채였다.

“데온 도련님.”

그런 데온을 로드윅 가의 집사, 폴이 맞이했다.

“손님이 와 계십니다.”

“손님?”

로드윅 공작가까지 절 찾아올 손님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데온은 겁도 없는 그 면상을 보기 위해 응접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는 소년을 보고 얼굴을 구겼다.

그런 데온의 태도에 전혀 개의치 않은 소년이 푸른 눈을 반달로 접어 웃었다.

“어어, 왔어? 데르케디온.”

누가 보면 제집 거실인 줄 알겠다.

하늘색 머리카락만큼이나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인 로벤하프 히베츠만. 그 또한 히베츠만 공작가의 능력자였다. 

냉기를 다루는 능력을 가진 9살의 소년.

“왜 왔어?”

“너 여동생 생겼다며?”

“가라.”

네 집에.

데온은 입을 연 지 10초 만에 로벤하프에게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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