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내쫓았다고?
하지만 로벤하프의 빠른 귀가는 데온의 바람으로 끝났다.
“내가 가고 싶어도 아버지께서 로드윅 공작님과 나누실 말씀이 있어서.”
능청스럽게 웃는 저 모습.
자신이 자리를 뜬다면 로드윅 가의 사용인들에게 리체에 대해 묻고 다닐 게 빤했다.
데온은 감시 겸 로벤하프의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히베츠만 공작님께서는 사냥제 때문에 오신 건가?”
“맞아. 두 달 남았잖아.”
“넌 왜 따라왔어? 공작님 혼자 오셔도 됐을 텐데.”
“나야 뭐, 네 얼굴도 볼 겸.”
전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데온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나는 네 여동생한테 관심 없으니까.”
그 말에 한층 더 경계가 강화됐다. 불신이 가득한 붉은 눈.
로벤하프는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내리며 볼멘소리를 했다.
“진짜라니까?”
이틀 전, 로드윅 공작가에서 수양딸을 들였다고 공표했다.
로드윅 공작 가문에서 평민을 공녀로 들이다니?
제국의 모든 사람의 입에서 그 이야기가 한 번쯤 오르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바깥은 난리였다.
그렇지만.
로벤하프는 맹세할 수 있었다. 자신은 새로운 공녀에게 큰 관심이 없다고.
‘그’ 로드윅 공작이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게 신기하긴 했지만, 그뿐.
‘그깟 평민 따위한테 관심 두는 귀족이 이상한 거지.’
히베츠만 공작가는 특히 명문을 중시하는 가문이었다.
올해로 9살인 로벤하프는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성향이었으나, 그도 뼛속까지 히베츠만.
귀족과 평민의 경계는 태생부터 정해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한 번 귀족은 영원한 귀족, 한 번 평민은 영원한 평민이었다.
“내가 널 뭘 믿고.”
“믿어줘라. 좀. 데르케디온, 지금 네 모습이 어떤지 알아? 경계하는 새끼 늑대 같아.”
“뭐?”
“앗. 미안. 새끼 늑대는 세르디야 공작가의 둘째인데.”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봐? 날 그 짐승에다 비교해?”
“으앗. 정말 미안. 실수였어.”
그러니 로벤하프는 여동생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르케디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나 매사에 관심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그였다.
‘데르케디온한테만 그럴 게 아니야.’
로드윅 공작도 조금 이상했다.
조금 전, 인사치레로 한 자신의 말에,
“로드윅 공녀에게 인사해도 될까요?”
“…….”
순간 주변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냉기를 다루는 능력은 히베츠만이 아니라 사실은 로드윅의 능력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말로 삭막하다니까. 이 집은.
‘그런 두 사람 모두 그렇게 나오니 궁금하기도 하고. 평민이 그만한 가치가 있나?’
두 달 뒤면 건국제와 함께 사냥제가 열린다.
사냥제에는 네 공작 가문의 능력자들과 황족이 참석했다.
오늘 히베츠만 공작이 로드윅 공작을 찾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냥제랑 로드윅 공작님께서 평민을 입양하는 거랑 관련이 있으려나.’
공작들보다 힘이 약한 황제는 최근, 민심을 잡겠다고 평민들의 복지에 관한 이런저런 정책들을 내놨다.
하지만 탁상공론으로 나온 정책이어서, 실용성 없이 원성만 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께서 로드윅 공작이 평민을 입양한 게 황족을 견제하기 위함일 지도 모른다고 하셨지.’
그게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걸 걱정하는 것은 어른인 제 아버지의 몫이지, 9살인 제가 할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데온이 저러는 이유에 흥미가 당겼다. 순전한 호기심이었다.
“있잖아, 데르케디온.”
데온은 로벤하프의 생글거리는 얼굴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저건 분명, 리체를 보고 갈 표정이다. 저 녀석도 다른 의미로 성격이 꼬였으니까.
“꿈 깨라.”
“응?”
“걔, 못 봐.”
그러면 아예 희망의 싹을 뽑아버리면 그만이지.
데온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저택 밖으로 내쫓았거든.”
“뭐? 내쫓아?”
“그래.”
“왜? 네가 놀이 상대로 온 귀족 자제들을 내쫓는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걔는 네 동생이잖아? 공작님께서 허락하셨어?”
로벤하프의 눈이 동그래졌다.
데온은 흥, 하고 대꾸 없이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사실은 옷을 사러 나간 것이었지만, 굳이 말을 정정해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 꼬맹이, 갑자기 웬 외출인가 했더니. 히베츠만 공작 쪽 사람들이 와서 아버지가 피신시킨 거군.’
말로 티를 내지 않는다 해도, 그 히베츠만 공작이 평민 출신인 리체를 고운 시선으로 볼 리는 없을 테니. 때로는 말보다 분위기가 상처가 되는 법이다.
그러다 눈매를 좁혔다. 어제 제드가 자신을 약 올리고 간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도련님, 제가 전생에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글쎄. 가주님께서 리체 아가씨 옷 쇼핑에 따라갔다 오라고 하시지 뭡니까? 이것 참. 도련님께서 사랑하는 동생분의 첫 나들이인데, 제가 가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랑……. 헛소리하지 마.”
벌레 씹은 얼굴을 하긴 했어도 동생이란 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 데온의 모습에 제드는 안타까움을 연기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셔도 속상하시죠? 근신이 하루 늘어나지만 않았어도 제가 아닌 도련님께서 같이 가셨을 텐데.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도련님 대신! 리체 아가씨의 오빠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골라 드리고 오겠습니다. 오빠처럼 말입니다!”
젠장. 그냥 신경을 쓰지 않으면 되는 일인데.
지금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건, 제드의 헛소리에 일방적으로 놀림을 받았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결코 꼬맹이의 오빠 역할을 빼앗겨서가 아니라.
“데르케디온. 정말 말 안 해 줄 거야? 왜 쫓아냈는데?”
로벤하프는 급기야 데온이 기대앉은 소파 옆으로 다가와 그에게 설명을 졸라댔다.
데온은 제게 들이대는 로벤하프의 얼굴을 아무렇지 않게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생각을 이어갔다.
‘오빠 노릇?’
그래봤자 지금 오빠는 저였다.
제드는 그 녀석한테 오빠 소리 한 번 들어본 적도 없지 않은가. 자신은 몇십 번쯤 들은 그 소리를.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진정되는 것도 같고.
데온의 입꼬리가 티 나지 않게 씰룩거렸다.
* * *
“뭐 해? 빨리 안 내리면 두고 간다.”
안나는 거리에 서서 열린 마차 문 안을 향해 말했다.
그녀의 품에는 방금 막 마차에서 내린 리체가 안겨 있었다.
제드는 귀를 툭툭 치던 손을 털고는,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죄송해요. 아가씨. 갑자기 귀가 간지러워서요.”
“사과 안 해도 괜찮은데요…….”
당황해 고개를 젓는 리체의 손바닥 위에서 다람쥐로 변한 파이톤스가 하품을 했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괜찮기는요. 아가씨, 제드 트레앙은 봐주지 마세요. 끝도 없이 기어오를 걸요."
리체와 트레앙 남매가 도착한 곳은 로드윅 가문 영지의 번화한 도시였다.
그들이 타고 온 마차는 고급지지만 가문의 문장이 없는 평범한 마차였는데, 혹시 모를 적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아시죠? 성은 말씀하시면 안 돼요. 아가씨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공작님께서 수양딸을 들이셨다는 이야기가 쫙 퍼졌으니깐요.”
조용히 말하는 제드의 당부에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체 일행은 멈춰선 마차 앞의 옷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귀족들의 옷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이니만큼, 내부가 호화로워 리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드가 익숙하게 이름을 말하자, 안쪽에서 나온 직원이 그들을 귀빈실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려한 차림새의 디자이너가 들어왔다.
그녀는 소파에 앉은 리체를 보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세상에! 두 분. 누구를 데려오신 거예요? 이 불순물 하나 없이 태어난 듯한 완벽한 존재라니! 오, 이 트라펫, 이날을 위해 살아온 모양이에요.”
[호들갑이 심하네. 저 인간.]
파이톤스는 자신을 트라펫이라 칭한 디자이너가 이마를 짚고 휘청이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계약의 효과로, 파이톤스와 리체는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대화가 가능했다.
지금 말한 것도 리체 외에는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귀엽죠? 우리 아가씨예요.”
리체의 옆에 앉은 안나가 트라펫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귀여운 건 아가씨인데 왜 네가 뿌듯해하고 그래?”
제드의 핀잔에 안나가 웃는 얼굴로 그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억, 하고 제드가 상체를 숙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트라펫의 호박빛 눈동자가 리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
그녀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리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트라펫은 과연, 이라고 말하며 붉은색으로 칠한 입술을 시원스레 올렸다.
“공작님께서 양녀로 들이시겠다 했을 만하네요.”
‘공작님?’
그녀의 말에 놀란 리체가 옆에 앉은 제드를 바라봤다.
분명 들키면 큰일 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저 사람은 이미 제 정체를 아는 듯한 눈치인데.
“걱정마세요. 트라펫은 로드윅 출신이에요.”
“로드윅 출신요?”
“제가 첫날에 로드윅은 새로운 이름을 받은 사람이 많다고 했잖아요? 우리 공작님 취미가 사람 줍는 거라. 트라펫도 어릴 적에 주워져서 3년 정도 로드윅 공작성에서 지냈었어요.”
사람을 줍는 게 취미라니.
……그래서 자신도 주웠던 걸까. 리체는 블레이크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트라펫은 제드의 말에 제 양손을 마주 잡았다.
“맞아요. 공작님께 이름을 받았죠. 그리고 공작성에서 바느질을 하다가 제 눈부신 재능을 깨달아버렸답니다!”
하지만 공작 가문의 하녀에 불과한 그녀가 재능을 꽃피울 방법은 옷을 수선하는 정도가 다였다.
신분 앞에 좌절하던 트라펫에게 블레이크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공작님께서 아카데미 추천서를 써주셨어요. 덕분에 디자인을 공부할 수 있었죠.”
트라펫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디자인에 열정을 쏟았다. 그녀의 노력과 재능은 빛을 발해, 각종 대회를 휩쓸고, 귀족들의 예약이 밀려들었다.
성공한 디자이너의 삶을 살던 그녀는, 돌연 모든 사업을 접고 남부 변방으로 와서 의상실을 하나 차렸다.
로드윅 공작령에 속한 소도시였다.
“이 정도 실력이면 로드윅 공작님 가족의 옷을 만들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 마님께 해드리고 싶었던 디자인도 잔뜩 있었는데…….”
트라펫은 눈가를 훔치며 말을 채 잇지 못했다.
훌쩍.
리체는 갑자기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트라펫의 이야기를 듣고 눈시울이 붉어진 안나였다. 마님이라는 단어 때문인 듯했다.
[마님?]
‘데온의 어머니인 로드윅 공작부인을 말하는 거야. 7년 전에 돌아가셨대.’
머릿속으로 들어온 파이톤스의 질문에 리체가 속으로 대답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눈물을 흘릴 정도니, 좋으신 분이었나.
리체는 인자한 공작부인의 모습을 상상해보려고 했으나 무리였다.
“벌레 같은 것! 너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어머니라는 말은 리체에게 단 하나의 이미지로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지난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요-!”
트라펫은 분위기를 환기하려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녀는 리체를 보며 자신만만히 웃었다.
“제 고객 1순위는 로드윅 공작님과 그 가족분들이시라고요. 아가씨께서 이름을 받으셨단 이야기를 듣고 손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있었어야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옷을 가져올게요.”
얼마 지나지 않아, 트라펫이 만들었다는 옷이 귀빈실에 줄지어 도착했다.
문제는 입는 것마다 리체에게 찰떡으로 잘 어울린다는 거였다.
“제 뮤즈를 여기에서 만날 줄이야.
“아가씨! 아가씨! 아래층에 진열된 드레스도 입어보면 안 돼요?!”
“어, 어…….”
“……와.”
감탄과 흥분을 금치 못한 트라펫과 안나는 의상실의 아동용 드레스를 죄다 가져왔다.
리체는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주는 대로 옷을 갈아입었고.
제드는 두 사람의 기세에 눌려 리체가 새로운 옷을 입고 나올 때마다 박수하는 역할을 맡았다.
“제드 트레앙. 영혼 어디 갔어. 좀 더 마음을 담아서 치라고.”
“두 사람 이제 진정하는 게 어때? 아가씨 많이 힘들어 보이시는데.”
결국 반복되는 상황에 지친 제드가 말을 꺼냈다.
그의 말처럼, 조용해서 괜찮은 줄로만 알았던 리체는, 볼이 붉어진 채 넋이 나가 있었다.
“헉. 아가씨.”
“어머나. 여기까지만 할까요? 그러면 성으로 보낼 옷을 추려야겠어요.”
트라펫은 안나와 함께 귀빈실과 연결된 자신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기진맥진해진 리체와 제드는 귀빈실의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리체는 직원이 가져다준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열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제드는 그런 리체를 향해 손부채로 바람을 부쳐주며 말을 걸었다.
“도련님하고는 좀 친해지셨어요?”
“모르겠어요.”
푸하, 다시 오렌지 주스를 들이켜고 컵을 아래로 내린 리체가 고개를 저었다.
그림책 사건 이후로 데온은 다시 별채에 갇혔고, 지금껏 얼굴을 볼 일이 없었으니 친해질 새가 없었다.
“아, 맞다.”
리체는 제드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동글동글한 눈에 할 말이 있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귀여워. 제드는 그런 생각을 하며 태연히 손부채질을 계속했다.
“오빠는 인간이 싫다던데요. 왜 그런 거예요?”
“아, 그 소리를 아가씨한테도 하셨어요? 우리 도련님도 참. 그게 말이죠-.”
“꺄악!”
그때였다. 트라펫의 작업실에서 비명이 들린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