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12)화 (12/89)

12화 도대체 뭘 되돌린 거야?

“제드.”

리체는 자신이 앉은 소파 앞에 서 있는 제드를 불렀다. 그는 닫힌 작업실을 주시하고 있었다.

제드는 뒤쪽의 리체를 힐끔 바라봤다가, 주변을 경계하며 속삭였다.

“위험하니까 가만히 계세요.”

“하지만 비명이 들렸는데요. 도와주러 가봐야 하지 않아요……?”

하지만 제드는 묵묵부답이었다. 

다시 심상치 않은 비명이 들렸다. 물건이 깨지고 가구가 쓰러지는 소리도 났다.

‘나라도 도와줘야 해.’

리체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리체의 앞을 커다란 손바닥 하나가 가로막았다.

제드였다. 뒤통수만 보여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도, 저도 여기에 있는 편이 좋겠어요. 두 사람한테는 미안하지만, 제 임무는 아가씨 호위라서요.”

[마음에 드는 녀석이군.]

파이톤스가 히죽였다.

리체만이 어떻게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었다.

그때, 작업실의 문이 열렸다. 갈색 머리의 젊은 여자. 안나였다.

“안나, 피 나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제 피가 아니에요.”

뺨에 묻은 피를 닦는 안나의 다른 손에는 정신을 잃은 남자가 있었다.

로드윅 가문의 하녀를 자청했지만, 몇 년 전까지는 제드와 함께 훈련받고 자랐던 그녀였다. 실전은 자신 있었다.

안나는 남자를 귀빈실 바닥에 던지며 제드에게 말했다.

“세르디야 공작 쪽이야. 놈들이 트라펫을 납치했어.”

“세르디야?”

제드는 그렇게 물으며 슬쩍 옆으로 이동했다.

몸으로 리체의 시야에서 쓰러진 사내의 모습을 가렸다. 애가 보기에 썩 볼만한 광경은 아니었으니.

[공작? 능력자 가문이지?]

‘응. 저 사람은 능력자가 아니지만.’

[시각화된 기운으로 구분하는 건가? 재밌네.]

‘파이톤스는 안 보여?’

[난 안 보여. 르티옴의 능력은 그 녀석 고유의 것이니까.]

리체가 파이톤스와 속으로 대화하는 사이, 제드와 안나의 대화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놈들이 왜 트라펫을 납치해?”

“나도 모르지. 공격할 때 트라펫이 자초한 일이라고 그러던데.”

“저기…….”

누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소란을 듣고 깜짝 놀라 귀빈실까지 온 트라펫의 조수였다.

제드와 안나가 고개를 돌렸다. 조수는 자신에게 쏠린 두 쌍의 갈색 눈동자에 쭈뼛거리며 아는 것을 털어놓았다.

“트라펫 님의 다음 시즌 신작이 모피거든요……. 세르디야 쪽에서 모피를 쓰지 말라고 몇 번 경고가 오긴 했었는데, 트라펫 님께서 무시를…….”

“모피? 그것 때문에 트라펫을 납치했다고?”

“웃겨. 자기네들은 허구한 날 입고 있으면서.”

어이없다는 어투로 두 사람이 말했다. 쓰러진 사내의 허리띠도 여우 가죽이었다.

조수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게, 늑대 가죽으로…….”

“아.”

“이런.”

트레앙 남매는 탄식했다.

세르디야 공작 가문의 능력자들은 수인화 능력을 사용했다. 

많은 동물 중 늑대로 변하는 걸 즐겼고, 세월이 흐르며 세르디야 가문의 상징은 늑대가 되었다. 가문의 문장에도 늑대의 얼굴을 넣을 정도로.

머릿속이 아찔해진 안나가 얼굴을 짚었다.

“세르디야 공작 영토로 넘어가면 트라펫 씨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라.”

이번 대의 세르디야 공작은 유독 호승심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말이 좋아 호승심이지 다혈질 기질이 심했다.

트라펫의 고집도 문제였다. 디자인에 관해선 로드윅 공작 가문의 의뢰를 제외하고는 타협이 없으니.

세르디야 공작이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면 아가씨하고는 아예 무관한 일인가?”

제드가 중얼거렸다. 트레앙 남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트라펫을 데려간 세르디야의 공작령은 로드윅 공작령에서 마물의 숲을 가로지르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거리로만 따졌을 때는 열흘 정도 걸리는 거리였으나, 열 번의 밤을 마물의 숲에서 버틸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러니까 숲을 우회해서 가겠지. 로드윅 공작령을 벗어나려면 적어도 하루는 걸릴 거야.”

안나의 말에 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트라펫은 가주님께 보고한 뒤에 쫓기로 하고.

우선은 아가씨의 안전을 위해 공작성으로 돌아가자, 라는 판단을 내릴 때쯤.

“그리고 손님들…….”

조수가 한 곳을 가리켰다. 제드가 손가락이 향한 방향을 보고 눈을 끔뻑였다.

“나?”

“아, 아뇨.”

조수가 가리키는 건 제드의 뒤.

“같이 오신 아가씨께서 사라지셨는데요.”

“뭐?!”

“아가씨!”

트레앙 남매가 동시에 제드의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텅 빈 소파뿐이었다.

* * *

의상실을 나온 리체는 거리를 뛰고 있었다. 

[계약자, 달릴 만해?]

파이톤스가 쪼르르 리체의 어깨 위로 올라와 말을 걸었다.

다람쥐로 변신한 그의 목에는 멋스러운 리본이 달려 있었다.

아까, 리체의 옷을 고를 때 트라펫이 어울리겠다며 달아준 리본이었다.

‘응. 그런데 역시 말을 하고 나왔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걔네가 퍽이나 보내줬겠다.]

조금 전, 리체는 파이톤스의 재촉에 트레앙 남매의 눈을 피해 자리를 떴다.

[계약자! 빨리 나가! 별의 기운이 느껴졌어!]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파이톤스가 너무 다급했다.

위대한 별 중 하나의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너 말고 남은 다섯 개의 위대한 별은 잠들었다고 했잖아.’

[그렇지. 아, 저기서 오른쪽.]

갈림길이 나오자 파이톤스가 방향을 지시했다.

리체는 그곳으로 달리며 파이톤스에게 말했다.

‘……별의 힘을 가진 능력자가 아닐까? 세르디야 공작이 같이 왔을 수도 있잖아.’

[나를 뭐로 보고. 그런 것도 구분 못 할까. 이건 능력자들 피에 있는 힘의 잔재 따위가 아니야. 녀석들 중 하나가 직접 인간계로 나왔다고. 젠장, 넷 중에 누구지?]

파이톤스는 머리를 싸맸다. 

별의 기운을 느낄 수는 있었으나, 누구의 기운인지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르티옴이 이렇게 움직이고 있으니, 그 호구는 여전히 자고 있을 테고.

[정말로 그 녀석들 중 하나라면, 찾아서 어떻게 깨어났는지 알아내야 해.]

‘왜?’

[별의 영면을 깨우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거니까.]

‘별들을 깨우려고?’

[아니.]

파이톤스는 고개를 저었다.

[놈들은 깨어나서는 안 돼.]

분노에 찬 어조. 때마침, 새로운 갈림길이 나와 대화가 끊겼다.

지금까지 달리고 있던 큰 거리와 그 옆에 난 골목길.

‘어디로 가?’

멈춰 선 리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파이톤스에게 물었다.

하지만 파이톤스는 방향을 짚을 수 없었다.

[기운이 갑자기 끊겼어.]

눈치챘나? 그럴 리는 없을 텐데. 

다른 별을 탐지하는 것은 무덤 관리자들 중에서도 제 고유의 권한이었다.

[…….]

파이톤스는 갈림길과 리체를 번갈아 본 뒤, 말을 걸었다.

[이봐. 계약자. 인간계라 내 능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것 같은데. 힘을 빌려줄 테니까 네가 해 봐.]

‘내가?’

리체가 놀라 어깨 위의 파이톤스를 바라봤다.

[겁먹을 건 없어. 사용할 능력의 종류와 힘은 내가 알아서 흘려줄 테니까. 너는 마음만 먹으면 돼.]

‘마음을 먹는다고?’

[그래. 별을 찾겠다고 생각하면서 주변을 살펴봐. 느껴지는 게 있을 테니.]

파이톤스의 말에 리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돌연 골목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저기야!’

[뭐?! 벌써 찾은 거야?! 너, 너, ……천재구나! 계약자!]

파이톤스가 환호했다.

다람쥐의 검은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지고, 털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다 골목 안쪽의 새로운 모퉁이를 돈 순간. 

리체의 뺨에 제 뺨을 비비던 파이톤스의 흥이 급격히 떨어졌다.

[……별이 아니잖아?]

“트라펫을 찾았어.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거든.”

모퉁이 안쪽에 숨은 리체가 속삭였다.

그래, 뭐. 잘 찾긴 했는데.

파이톤스는 팍 식은 눈으로 리체와 함께 모퉁이 너머를 훔쳐봤다.

커다란 늑대 두 마리와 사람 셋.

정신을 잃은 트라펫은 가장 덩치가 큰 늑대의 등에 업혀 있었다.

[마차로 이동할 계획인가 본데?]

파이톤스는 그들의 앞에 정차한 마차를 보며 말했다. 

때마침 마부가 내려와 한 남자와 얘기하기 시작했다.

리체의 눈이 빈 마차를 확인했다.

‘데려가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거 아니야?’

[나서게? 어떻게 하려고? 넌 기껏해야 7살 꼬마인데.]

파이톤스의 말에 리체가 몸을 움찔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이대로 트라펫이 납치되는 걸 보고 있어야만 하나?

트라펫은 로드윅의 사람이었다. 블레이크를 위해 살겠다며 눈을 빛내던 그녀의 모습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

[뭘 그렇게 고민해?]

‘응?’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파이톤스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다분했다.

조금 전에 했던 말은 리체를 놀리는 거라고 말하듯.

[벌써 잊은 거야? 내가 말했잖아. 내 계약자에게 못할 것은 없다고]

‘트라펫을 구할 수 있어?’

[당연하지.]

파이톤스는 자신만만하게 마차를 가리켰다.

[아까 별을 찾을 때 했던 감각, 기억하지? 이번에도 내가 힘을 빌려줄게.]

‘어떻게 하려고?’

마차를 보면서 별을 찾으라는 건 아닐 테고.

리체의 의문에 파이톤스가 답했다. 

[일단 마차 바퀴를 폭파하자. 소란이 일어나면 틈을 타서 저 여자를 구출하든지.]

말든지. 파이톤스는 뒷말은 속으로 생각했다.

트라펫을 구하든 말든 상관은 없었지만, 제 계약자가 무능력한 건 제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다.

파이톤스는 바퀴를 폭파할 만큼의 힘을 리체에게 흘려보내려 했다.

[이제 해 봐.]

리체는 바퀴가 폭파되는 상상을 하며 바퀴를 바라봤다.

[계, 계약자! 잠시만!]

순간, 파이톤스의 다급한 외침이 리체의 머릿속을 울렸고.

콰아앙!

굉음과 함께 회색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가 어느 정도 사그라든 뒤에 보인 건, 폭발로 사라진 마차와 그을음만 남은 바닥.

히이잉-!

마차와의 연결부가 풀린 말 두 필이 폭발에 놀라 앞발을 들고 거리를 헤집기 시작했다.

“…….”

본인들이 저지른 광경에 리체와 파이톤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호구…….”

자신이 르티옴에게 주려던 힘은 마차 바퀴를 폭파할 정도의 약한 힘.

하지만 리체는 제가 주려던 힘보다 더 많은 힘을 끌어다 썼다. 

별의 힘의 주도권을 가진 존재라니.

‘도대체 뭘 과거로 되돌린 거야?’

파이톤스가 턱이 빠진 다람쥐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뭐랑 계약한 거고……?”

* * *

한편, 마차 폭발에 놀란 건 리체와 파이톤스뿐만이 아니었다.

주변 구조물들에 숨어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로드윅 가의 가주 호위대.

일반적인 로드윅 가문의 기사들과 달리, 특수한 훈련을 받은 전력들이었다.

주로 그림자처럼 숨어, 있어도 없는 듯 가주를 따라다니며 호위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

오늘은 블레이크의 명령을 받아 리체를 호위하게 되었는데-.

‘폭발물?’

‘세르디야의 적인가?’

의상실을 혼자 나와 거리를 달리던 리체가 납치된 트라펫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폭발한 마차.

호위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시선을 주고받았다.

위급상황에서는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 가주, 지금 상황에서는 리체를 지켜야 하나.

‘나갈까요?’

‘아직.’

그 위급상황이 로드윅 수준에 맞춰진 것이 문제였다.

부하의 눈짓에 대장인 쇼가 고개를 짧게 저었다.

목숨을 위협당하시는 건 아니니까 위급상황은 아니다.

게다가 모퉁이 너머에 잘 숨어있으시니. 세르디야가 아가씨를 발견한 것도 아니고.

여기서 나간다면 블레이크나 데온에게 호들갑 떨지 말라며 한소리 들을 상황이었다.

“무슨 일이야!”

“습격? 트라펫의 끄나풀인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마부는 도망갔고, 세르디야의 세 사람은 검을 뽑고 소리치며 주변을 둘러봤다.

두 마리 늑대도 으르릉거리며 이빨을 드러냈다.

후각이 뛰어난 늑대가 모퉁이에 숨은 리체의 냄새를 맡았다.

커다란 앞발을 그 방향으로 내딛으려던 순간.

“크르-.”

앞발은 땅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멈췄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길에 발을 붙이고 있던 모든 것이 뻣뻣이 얼었다.

날뛰던 두 마리의 말도, 도망가던 마부도, 세르디야의 세 사람도, 커다란 두 늑대도.

얼어붙은 길을 한 소년이 걸어왔다. 

하늘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가진, 한여름의 청량한 호수를 닮은 소년.

“…….”

로벤하프의 손이 늑대 위의, 아직 얼지 않은 트라펫에게 향했을 때였다.

“그, 그만둬!”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 들린 여자아이의 목소리.

로벤하프는 손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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