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13)화 (13/89)

13화 냄새난다며

로벤하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길에 선 누군가를 발견하곤, 푸른 눈이 크게 뜨였다.

“어, 얼리지 마.”

귀족의 자제인 듯, 고급 아동용 드레스를 입은 귀여운 어린애였다.

딱 떨어지는 단발에 쓴 폭넓은 머리띠가 앙증맞았다.

로벤하프의 앞에 선 게 꽤 용기를 낸 행동이었던지, 두 손으로 꽉 잡은 풍성한 치맛자락에 구김이 졌다.

동글동글한 은빛의 눈이 로벤하프를 똑바로 바라봤다.

“아는 사람이야.”

“…….”

리체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보는 로벤하프가 당장이라도 트라펫을 얼릴까 봐 마음을 졸였다.

리체의 눈에만 보이는 로벤하프의 기운이 일렁였다.

과거 게르웨르 공작가의 지하실. 자신을 데려가려던 하녀와 하인을 한순간에 얼려버린 능력.

리체는 저 소년의 능력을 본 순간 확신했다.

‘그때 지하실로 왔던 사람 중 한 명이야. 미래의 히베츠만 공작.’

왜 그 당시에 세 명의 공작이 한꺼번에 자신을 찾아왔었을까. 

짧은 의문이 들었지만, 거기에 대해 깊게 생각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 사람은 가만히 놔둬 줘. 부탁이야.”

“…….”

로벤하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데온도 그렇고. 능력자들은 제 말에 대답을 안 하기로 담합이라도 한 걸까.

언제쯤이면 능력자들과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할지. 리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싸우려고?]

그런 리체의 어깨 위에서 파이톤스가 신난 어조로 물었다.

[좋아! 그 녀석들의 잔재 따위는 이 파이톤스 님에게 아기 손바닥 힘보다 못하지! 괴물 같은 네 능력을 보여 주라고!]

리체가 제 상식 밖의 존재였다는 충격은 능력자와 대결한다는 기대에 잠시 잊은 듯했다.

‘대장.’

한편,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가주 호위대가 시선을 교환했다. 

능력자인 히베츠만 공자에게로 걸어가는 리체 아가씨.

위대한 별과 르티옴이란 대단한 힘을 가진 둘이었으나,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어린아이와 다람쥐의 조합은 그저 약하게만 보일 뿐이니.

이번에야말로 위급상황이다.

‘아니.’

대장인 쇼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수신호를 보냈다.

‘대기한다.’

한편, 리체는 파이톤스의 응원으로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내 힘을 팍팍 갖다 쓰라고! 쟤를 눌러 버려!]

‘싸우려는 게 아니라 대화를 해보려-.’

“으앗.”

퐁퐁 걸어가던 리체의 발이 쑥-, 하고 위로 치솟았다.

“저, 저기!”

작은 몸이 뒤로 넘어지던 중, 리체의 시야에 로벤하프가 들어왔다.

붉어진 뺨, 크게 당황한 듯한 표정, 제게 손을 뻗으며 달려오는 모습까지-.

잡아주려는 건가? 하지만 그전에 넘어질 게 분명했다. 지금 데온이 없길 망정이지. 아니면 또 둔해 빠졌다고 한 소리를 들을…….

“……?”

엉덩방아를 예상하고 눈을 꼭 감았는데, 아프기는커녕 몸이 하늘로 붕 떴다.

다시 자세가 안정됐다. 누군가의 단단한 가슴팍, 이제는 꽤 익숙해진 은은한 코롱 냄새.

“리체.”

거기에 자신을 부르는 차분한 중저음의 목소리.

상황을 인지한 리체가 정신을 번뜩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블레이크의 붉은 눈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블레이크의 품이다.

“아, 아빠.”

식은땀이 흘렀다. 블레이크가 제드 옆에 꼭 붙어 있으라고 했는데.

지금 이런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민폐 덩어리의 어린애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블레이크를 실망하게 했을지도.

블레이크는 걱정으로 복잡해진 리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멀리까지 나왔군. 다친 데는 없나?”

“……네.”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블레이크는 그런 딸을 보며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히베츠만 공작이 로드윅 저택을 떠난 직후, 블레이크는 마차를 타고 도시로 내려왔다.

의상실로 직행하던 중,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 마차를 세웠다.

그런 뒤 상황을 알아보려 골목 안으로 들어왔다가 제 눈을 의심할 만한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행인을 포함한 모든 것이 얼어붙은 거리, 세르디야의 늑대들, 히베츠만 공자, 그리고…….

‘……리체?’

로벤하프에게 걸어가다 미끄러지는 리체.

마침 제가 도착해서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리체가 차가운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블레이크의 눈이 주변 구조물을 쓱 훑었다. 가주의 심상치 않은 눈빛에 숨어 있던 호위대가 움찔했다. 

‘그런데.’

블레이크는 정면으로 고개를 돌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로벤하프를 바라봤다.

평소라면 “안녕하세요, 공작님.” 하며 넉살 좋게 다가와 상황을 설명했을 아이였다.

그런데 왜 저렇게 얼을 빼고 있는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물어보는 게 편하다.

“로벤하프. 왜 혼자 여기에 있지? 히베츠만 공작은?”

“아, 로드윅 공작님.”

그제야 정신을 차린 리벤하프가 공작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러고는 평소처럼 웃으며 지금의 상황을 설명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는 길에 어머니께 드릴 선물을 사신다고 하셔서요. 저는 따로 거리를 구경 중이었는데, 말이 제 쪽으로 달려오지 뭐예요? 그 뒤로는 세르비야 공작님네 늑대가 있고. 공작님 댁 디자이너가 납치되는 것 같아서 일단 얼렸…….”

술술 말하던 로벤하프의 얼굴이 화르르 붉어졌다. 

자신을 보는 초롱초롱한 은색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직후였다.

“일단 얼렸다?”

블레이크는 로벤하프에게 질문했다.

능력으로 본인의 입도 얼려버린 건 아닐 텐데, 로벤하프는 마치 양 입술이 붙어버린 것처럼 말을 잃었다.

그러다 블레이크의 질문에 서서히 입술을 움직이긴 했지만.

“아, 그러니까……. 얼려서……. 얼린 다음에…….”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더 말 안 해주려나? 트라펫을 어떻게 하려고 했었던 건지 듣고 싶은데.’

영문을 모르는 부녀가 멀뚱히 그런 로벤하프를 바라보던 중, 리체를 발견한 제드가 헐레벌떡 골목을 달려왔다.

“가, 가주님~! 아가씨!”

블레이크는 제드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리체와 함께 공작성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열흘 뒤.

데온 앞으로 로벤하프의 편지가 도착했다. 

친애하는 내 친구, 데르케디온 로드윅에게.

로드윅 영지에 커다란 종탑이 있어? 그게 내 고막을 고장 냈나 봐. 온종일 귓가에 종소리가 들려서 시끄러워.

무슨 헛소리야. 그딴 게 어딨다고.

로벤하프가 드디어 미친 모양이다. 어디 의원이라도 소개해 줘야 하나.

추신. 그런데 공작님께서 데리고 가신 애가 혹시 네 여동-.

데온은 썩은 표정으로 편지를 휴지통에 던져넣었다.

* * *

“히베츠만 공작님께서 협조해주신 덕분에 잘 끝났습니다. 해동된 세르디야 쪽을 심문했는데, 정말 모피 때문에 트라펫을 납치한 거라더군요. 다른 꿍꿍이는 없어 보입니다.”

블레이크의 서재.

제드는 요 며칠간 처리했던 트라펫 납치 사건에 관련된 일을 블레이크에게 보고하는 중이었다.

블레이크는 보고 있던 회중시계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세르디야, 그쪽은 아직도 후계자 때문에 시끄러운가?”

“그런가 봐요. 장남이 발현돼야 했는데. 하필이면 뒷배가 없는 차남이 능력자로 발현이 돼서.”

제드는 질린다는 얼굴을 했다.

네 공작 가문의 가주는 능력자밖에 될 수 없다는 게 암묵적이고 깨어지지 않는 규칙이었지만.

가끔 그 규칙에 반박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가령, 현 세르디야 공작부인의 세력처럼.

명문가 출신인 세르디야 공작부인의 아들은 장남이었으나 능력자로 발현하지 못했다.

발현된 자는 올해 8세인 차남, 지크베르트 세르디야.

6년 전, 지크베르트가 능력자가 된 날부터 세르디야 공작가는 후계 문제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가난한 자작 가문 출신의 후처에서 나온 자식이 가주가 된다는 걸 인정할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저희 도련님께서는 그럴 걱정은 없어서 제가 마음이 다 놓인다니까요. 게다가 귀여운 리체 아가씨가…….”

아. 제드는 하던 말을 멈추고 식은땀을 흘렸다. 리체 아가씨 얘기는 아직 꺼내면 안 되는데.

블레이크가 뭐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차마 옆을 볼 수가 없었다.

다른 곳을 보고 있어도 느껴지는, 제 볼을 찌르는 저 따끔거리는 시선이라니.

결국, 제 발 저린 제드가 블레이크를 향해 호소했다. 

“저 정말 억울합니다. 아무리 안나와 대화 중이었어도, 제가 리체 아가씨가 나가시는 기척을 못 느꼈을 리가요.”

제드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며칠 전, 트라펫의 귀빈실. 시선은 안나가 잡은 침입자에게 있었으나, 리체가 앉은 소파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7살의 아이가 나가는 것쯤, 제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파이톤스가 리체의 기척을 숨겼기 때문이었으나. 

제드가 알 리가. 그러니 그저 억울할 뿐이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봤는데요.”

“무슨 생각.”

“가주님, 리체 아가씨가 천재가 아닐까요?”

그게 아니고서야, 그렇게 의상실을 빠져나가실 수 있을 리가요.

제드는 시답잖은 소리를 듣는 듯한 블레이크의 무표정에 개의치 않고 제 말을 늘어놓았다.

“교육을 따로 받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글도 잘 읽으시고, 얼마 전에 붙인 가정교사한테 예법 배우는 속도도 무척 빠르시다 칭찬도 듣고요.”

“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제드의 말에 블레이크도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애가 똑똑하긴 하지.

“몇 년 뒤에 리체 아가씨가 황립 아카데미에 입학하시면 수석 자리는 따놓은 걸지도요.”

“그렇군.”

황립 아카데미.

블레이크는 그 말에 씁쓸히 입꼬리를 올렸다.

리체가 귀족들이 들어가는 황립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면 10살일 테니. 그때가 되면 자신이 이 자리에 없을지도 몰랐다.

그것을 상기시키듯, 블레이크의 가슴이 꽉 조이듯 저려 왔다.

그에게 쌓인 옴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블레이크의 증상을 눈치챈 제드가 조용히 품에서 갈색 약병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통증을 완화해주는 약이었다.

“그 모습을 가주님께서도 보셔야죠. 그러니까 오래 사세요.”

능력도 제발 사용하지 마시고요.

제드는 뒷말을 삼키며 당부했다.

오래 살라니. 이루어질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블레이크는 약병을 집으며 제드에게 대답했다.

“그래.”

* * *

“야.” 

로드윅 공작성의 복도.

반대쪽에서 걸어오던 리체와 마주친 데온이 인상을 썼다.

리체가 자신을 보자마자 두 손을 모아 입과 코를 가렸기 때문이었다.

“뭐 하냐……?”

“…….”

“뭐 하냐고.”

데온의 사교성 없는 말투에도 리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쪼르르 벽으로 걸어가 데온에게 길을 터주기까지 했다.

“…….”

왜지.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이 꼬맹이가 지금 뭐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알겠다.

‘나를 피하는 거잖아?’

데온은 뻥 뚫린 복도를 걸어가는 것 대신, 옆으로 몸을 틀었다.

벽에 바짝 붙은 리체에게 다가가 물었다.

“너, 나 피해?”

도리도리.

리체가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 피하잖아.”

데온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리체는 턱까지 뒤로 집어넣으며 머리통을 바짝 벽으로 붙였다.

피하는 거 맞네.

“왜 피해.”

데온의 추궁에, 리체가 입과 코를 가린 손바닥 아래로 웅얼거렸다.

“냄……ㅅ…….”

“냄?”

“냄새난다며!”

리체는 부끄러움에 눈물을 글썽였다. 

데온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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