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15)화 (15/89)

15화 거기 말고 다른 데

요 며칠, 로드윅 공작성은 조용하게 흘러갔다.

그동안 소란스러웠던 날들을 보내서인지, 조금 낯설게까지 느껴보는 평화로움이었다.

그 조용함에는 데온의 역할이 컸다.

로드윅 가에서 사건과 사고를 도맡던 데온이 잠잠했던 것이었다. 

“리체 아가씨 효과인가 봐요. 가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오빠가 되신 거에 책임을 느끼시는 걸지도요.”

제드의 말처럼 그러면 좋으련만.

폭풍 전의 고요는 아니겠지. 

데온이 무슨 일을 벌인다는 것이 아니라, 제 인생이 그랬다. 

조용하다 싶으면 꼭 사건이 일어났다. 주로 안 좋은 쪽으로. 

블레이크의 깊은 눈매 속 붉은 눈이 조용히 빛났다.

“사냥제에 수양딸도 데려올 생각인가? 내가 자네에게 호의적이니 충고하는 거지만, 썩 좋은 꼴은 못 볼걸.”

이 주 전. 로드윅 공작가에 방문한 히베츠만 공작이 한 말이었다.

한 귀로 듣고 흘리긴 했지만, 영 없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니었다.

고위 귀족들이 득실거리는 사냥제에 리체를 데려간다는 건, 마치 고양이들 앞에 물고 뜯을 먹음직스러운 생선을 가져가는 거나 다름없으니. 

‘고민이군.’

블레이크는 앉은 의자의 팔걸이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리체의 앞날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평생을 다른 귀족과 큰 접점이 없게, 공작성에서 풍족한 생활을 하며 지내게 할 수도 있었다. 

혹은 아이가 원하는 장래가 있다면 황립 아카데미에 입학시키거나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응원해줄 수도 있었다. 

뭐가 됐든 선택은 빠를수록 좋았다.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으니.

‘처음 왔을 때보다 많이 컸어.’

리체는 공작성에서 잘 먹고 잘 자서인지, 앙상한 이전에 비해 적당히 살이 올랐다.

키는 여전히 또래보다 작긴 했지만, 아이들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금방 자랐다. 리체도 곧 클 것이다. 

동글동글한 은색의 눈동자가 블레이크의 머리를 채웠다.

‘한번 물어볼까.’

오늘도 블레이크는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루에 한 번 이상 찾아오는 리체란 유혹에 매번 지고 있었다.

늘 지금 같은 나름의 구실이 있었으니 본인은 알지 못했지만.

“……?”

서재 문을 연 블레이크는 옆에서 들린 가벼운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복도를 걸어오던 중, 서재 문이 열린 것을 보고 짧은 거리를 후다닥 뛰어온 리체였다.

리체는 블레이크 앞에서 멈춰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 아빠!”

그 소리에 블레이크의 눈이 살짝 커졌다.

리체가 먼저 찾아와 다급히 저를 부른다. 블레이크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져 물었다.

“무슨 일이지?”

리체는 다음 말이 잘 나오지 않아 입을 달싹였다. 

부끄러워 귀 끝을 붉힌 리체의 어깨에서 파이톤스가 재밌다는 듯 꼬리를 살랑거렸다.

“아, 아빠. 그림책 읽어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리체의 손에는 블레이크와 함께 보려고 가져온 그림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

블레이크는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마음이 살짝 벅차올랐기 때문이었다.

리체가 언제 제게 와서 부탁한 적이 있던가? 다람쥐를 키워도 되냐고 물었던 적 외에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제가 조금 더 밀어붙여야 마지못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던 리체인데.

“그림책 말이군.”

아이의 성장이 기특했다.

쉽게 감동하지 않는 로드윅의 타고난 성정 탓에, 몇 년 만에 느껴보는 감동이었다.

블레이크는 리체를 품에 안았다.

“얼마든지 읽어주지.”

그러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으며, 리체에게 말했다.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보는 블레이크의 미소에, 리체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

“아빠, 저 내일 또 올게요!”

“그래.”

블레이크의 배웅을 받으며 리체는 서재 밖으로 나왔다.

막 블레이크와 그림책을 읽고 나온 참이었다.

‘오늘도 해냈어……!’

서재 문이 닫히자, 리체는 신이 나 복도를 가볍게 뛰었다.

마담 미셸이 봤다면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라 말하겠지만, 복도에는 아무도 없으니 괜찮겠지.

그보다는 오늘도 블레이크 몰래 기운을 정화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리체는 블레이크의 기운을 정화했던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루에 한 번씩. 티 나지 않을 정도로만 정화하면 내가 르티옴인 걸 들키지 않아.’

매일 하루치의 생명을 깎아 먹는 기운만큼을 정화하려는 계획이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자신이 블레이크 곁에 있는 한, 적어도 블레이크가 쌓인 옴 때문에 죽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렇기에 리체는 매일 블레이크와 만나는 일정을 만들었어야 했고.

제일 그럴듯한 핑계로 보였던 게 그림책 읽기였다.

바쁜 시간을 뺏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했었으나, 매일 그림책을 읽어달라는 리체의 부탁을 블레이크는 흔쾌히 수락했다.

벌써 삼 일째.

블레이크의 옴 정화는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아빠가 허락해줘서 다행이야.’

리체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다 이제는 속으로도 자연스럽게 블레이크를 아빠라 부른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슬쩍 숙였다. 

또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에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자주 올라갔다.

“야.”

블레이크의 서재가 있는 3층에서 자신의 방인 2층으로 내려가려던 리체를 누군가 불렀다.

로드윅 저택에서 리체를 그런 식으로 부를 수 있는 건 한 명뿐.

2층과 3층 사이 계단참의 난간에 데온이 기대어 서 있었다. 

“어? 오빠.”

블레이크의 기운을 정화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져서일까, 데온이 유난히 반가워 보였다.

리체는 웃으며 데온에게 쪼르르 내려갔다.

“왜 여기에 있어?"

“무슨 상관이야."

그러다 데온의 뾰로퉁한 얼굴을 보고 숨에서 난다는 냄새를 떠올렸다.

‘아, 역시 냄새나나 보다.’

데온도 은근히 착한 구석이 있으니까. 지난번 일은 자신을 신경 써주느라 냄새가 안 나는 척한 걸지도 몰랐다.

슬금 리체가 뒷걸음질하자, 데온이 눈가를 찡그리며 리체의 팔을 잡았다.

“어, 어? 왜?"

“…….”

갑자기 잡힌 팔에 리체가 당황했다. 

데온은 그런 리체를 보다, 툭 말을 내뱉었다.

“너 안 이상해.”

“응?”

리체는 뜬금없는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데온은 제가 할 말을 고르다 그냥 본론을 털어놓았다.

“내가 지난번에 했던 말 신경 쓰지 말라고.”

아.

리체는 며칠 전 데온이 복도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르티옴인 걸 들켰을까 봐 마음을 졸인 거지, 그 말에 상처받은 적은 없었는데.

이상하다는 말을 며칠 동안 신경 쓴 건 리체가 아니라 데온인 듯했다.

“그 말 하려고 여기서 나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럴 리가 있겠냐.”

데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등을 돌렸다. 그게 상황이 민망할 때 데온이 하는 행동이라는 걸, 리체는 알고 있었다.

역시 행동이 훤히 보이는 게 아직 9살이다. 무뚝뚝한 뒷모습이 귀여워 보여 리체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가며 말을 걸었다.

“왜 따라와?”

“오빠, 오늘 오후에 뭐 해야 해?”

“어.”

“뭐 하는데?”

“몰라. 있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모른다고.”

툴툴거리지만 대답은 다 해준다. 그만 쫓아오라는 말도 하지 않고.

데온과 입씨름을 하며 쭉 걷다 보니 어느새 본채를 나와 낯선 길을 걷고 있었다.

데온이 걸음을 멈춘 곳은, 건물 하나를 따로 지어 만든 로드윅 공작가의 도서관이었다.

“도서관?”

처음 보는 건물에 리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데온이 그런 리체를 힐끔 바라봤다.

“더 따라올 거야?”

“어…….”

리체는 머뭇거렸다. 데온이 부끄러워 자리를 피하는 줄만 알았는데, 정말 갈 곳이 있었다니.

너무 까불거렸나. 새로운 장소를 제집처럼 헤집고 다닐 자신은 없었다. 리체는 어깨를 늘어트린 채, 고개를 저었다.

“안 따라갈래. 오빠, 공부 열심히 해.”

“어.”

데온은 손을 두어 번 휘적이고는 리체를 두고 도서관 문으로 향하는 낮은 계단을 올랐다.

그러다 세 칸쯤 올라갔을 때, 걸음을 멈추고 뒤로 몸을 반쯤 틀었다.

축 처진 한 손에 그림책을 들고 시무룩해져 돌아가는 리체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랑 무슨 상관이야.’

데온은 다시 계단을 밟고 올라가려 했다.

그런데.

터덜, 터덜.

묘하게 힘이 없는 발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휴…….”

데온이 도서관에 들어간 줄 알고 내뱉는 작은 한숨까지.

데온은 얼굴을 찡그리다,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흔들었다.

“야, 멍멍이.”

리체가 뒤를 돌아봤다.

왜인지 짜증이 난 얼굴의 데온이, 엄지만 세운 손으로 도서관을 가리키며 리체에게 말했다.

“들어가서 그림책 가져가라.”

* * *

“와.”

도서관 내부로 들어온 리체는 눈을 빛냈다.

아늑해 보이는 노란 색조의 도서관은 마치 작은 궁궐 같았다. 

벽을 가득 채운 책과 중간중간 놓인 식물들. 

아치형의 천장은 한쪽이 유리로 돼 있어 햇살이 로비에 쏟아졌다.

“어서 오세요. 도련님. 오늘은 리체 아가씨도 같이 오셨네요?”

로비 책상에 앉아 책을 읽던 사서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동그란 안경을 쓴 20대 초반의 여자였다.

사서는 리체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사서 얀이에요. 저는 멀리서 아가씨를 몇 번 뵀는데, 아가씨께서는 절 처음 보시죠?”

“아, 안녕하세요……!”

“얘는 그림책 가지러 왔어.”

데온은 그렇게 말하며 로비를 가로질러 갔다. 반대쪽 벽에 있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리체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고만 있자, 얀이 말을 걸었다.

“아가씨, 도서관 로비 모양이 특이하죠? 정팔각형, 아, 그러니까, 같은 길이인 여덟 개의…….”

“알아요. 정팔각형.”

“우와. 똑똑하시네요. 그러면 각 면에 있는 일곱 개의 문이 보이시나요?”

얀은 리체에게 감탄하며 검지를 들어 주변을 한 바퀴 훑었다.

정문과 연결된 통로를 제외한 나머지 7개의 벽에는 장식이 새겨진 고급스러운 나무 문이 달려 있었다.

“로드윅의 성을 사용하시는 분들은 문을 하나씩 가지실 수 있어요. 문 안쪽은 개인 도서관으로 사용하실 수 있답니다. 방금 도련님께서 들어가신 곳은 도련님의 개인 도서관이에요.”

로드윅의 성을 사용하는 분이라면. 

그건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설마, 제게로 도서관을 내어줄까.

리체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기대가 아니라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이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얀은 그런 리체의 마음도 모른 채 생긋 웃음 지었다.

“아가씨께서는 내년쯤 개인 도서관을 사용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안에 책이 많아서 정리하는 데 일 년 정도가 걸리거든요.” 

“아…….”

다행이다. 당장 받는 게 아니라서.

그런 의미로 내뱉은 감탄사였으나, 얀은 리체가 아쉬워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는지 위로를 건네듯 말했다.

“그렇지만 도서관은 그 전이라도 언제든지 이용하실 수 있어요! 가주님과 도련님의 도서관을 제외한 다섯 개의 도서관은 아가씨 마음대로 이용하셔도 된답니다. 거기에는 역대 가주님들의 컬렉션이 가득하죠. 오늘은 그림책을 가지러 오셨다고 했죠?”

“네.”

얀은 재밌는 그림책을 찾아주겠노라며 두 번째 문으로 리체를 안내했다.

리체가 얀을 따라가던 그때였다.

[계약자.]

주머니 속에 있던 파이톤스가 리체의 머릿속에 속삭였다.

[다른 문으로 가고 싶다고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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