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아무것도 없는데
“다른 문?”
“네? 뭐라 말씀하셨나요?”
“아, 아니요.”
리체의 혼잣말에 얀이 뒤를 돌아봤다. 리체는 고개를 절레 젓고는 파이톤스에게 물었다.
‘어디로?’
파이톤스는 주머니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킁킁거렸다.
[세 번째 문. 거기에 뭔가가 있어.]
‘또 위대한 별이야?’
[아니, 그것보다는 재밌는 거.]
재밌는 거라니.
당장에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리체는 얀에게 파이톤스가 말한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음, 세 번째 문이요? 전전대 가주님께서 사용하셨던 도서관이네요. 오래된 물건들을 모으는 고풍스러운 취미를 갖고 계셨던 분이라, 아가씨께서 보실만한 책이 없을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귀여운 호기심 정도로 생각했는지, 얀은 순순히 열쇠를 꺼내 문을 열어주었다.
문 안쪽은 은은한 푸른 빛이 깔린 복층의 넓은 도서관이었다.
차분하고 중후한 느낌이 들었다.
전 주인이 오래된 물건들을 모았었다는 말처럼, 도서관 내부에는 책 외에도 이런저런 물건들이 진열돼 있었다.
“어디 보자, 그림책이…….”
얀은 도서관 내부를 눈으로 훑으며 그림책이 있을 만한 곳을 살폈다.
함께 그림책을 찾아줄 생각인 듯했지만, 리체가 이 도서관으로 들어온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저기……. 얀, 저 혼자 보고 싶어요.”
혹여 마음이 상할까 조심스럽게 꺼낸 부탁에, 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실래요? 마음껏 둘러보세요. 아가씨께는 모두 허락된 공간이랍니다. 흠집을 내시는 건 제가 많이 곤란해지니까 그것만 봐주세요.”
“네. 조심히 볼게요!”
“고맙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절 불러주세요. 항상 로비에 있으니깐요.”
얀은 후후 웃으며 도서관의 전등을 켜주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리체는 아까보다 환해진 도서관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제 뭘 하면 돼?”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리체는 고개를 숙였다. 주머니가 휑했다.
“파이톤스?”
“여기야! 여기!”
오랜만에 듣는 가벼운 톤의 목소리였다. 들린 곳은 도서관의 안쪽, 일정한 간격으로 나열된 책꽂이들 사이.
리체는 그곳으로 걸어갔으나 보이는 거라고는 책이 가득 꽂힌 책꽂이들뿐이었다.
“어디에 있어?”
“대각선 아래!”
말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니 책꽂이와 벽 사이의 좁은 틈에 반쯤 낀 다람쥐 몸통이 보였다.
그리고 버둥거리는 짧은 다리와 바짝 선 꼬리.
“……거기서 뭐 해?”
“꺼낼 게 있어서. 이익. 이게 왜 안 잡혀? 조금만 더 하면 잡힐 거 같은데.”
파이톤스는 삐익삐익 성을 내며 틈에 있는 무언가를 꺼내려 했다.
그 옆의 책꽂이 선반에는 접시만 한 거울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저러다 떨어뜨리겠다 싶었다.
리체는 거울을 품에 안고, 그 뒤에 쪼그려 앉아 파이톤스에게 물었다.
“저거 빼면 돼? 내가 대신 빼줄까?”
“아니, 명색이 위대한 별인데 이쯤은 내가…… 으악. 미끄러졌잖아!”
경악하는 소리와 동시에, 틈 사이에서 단단한 구슬 같은 게 바닥으로 떨어져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파이톤스는 파바박 틈에 낀 몸을 빼더니, 네 발로 책꽂이의 반대편 끝을 돌아 달려 나갔다. 리체가 그 뒤를 쫓았다.
책꽂이를 네 개 정도 지나자, 한 평 남짓한 빈 공간이 나타났다.
파이톤스는 그곳의 벽에 붙어 대리석 바닥을 짚었다.
“바닥 아래로 들어갔어?”
“응……. 제길. 아까 떨어진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었던 모양이야. 으. 꽤 깊숙이 들어갔잖아. 바닥 아래에 공간이 있는 건가?”
리체는 파이톤스 옆으로 가 같이 바닥을 살폈다.
단단한 바닥은 웬만한 힘으로는 뚫리지 않을 듯 보였다.
“뭐였는데? 구슬?”
“별 조각.”
“그게 뭔데?”
파이톤스가 궁금해하는 리체에게 설명했다.
“몇십 년에 한 번꼴로 무덤이 답답하다며 인간계로 넘어가는 별들이 있어. 그런데 대부분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인간계에서 서서히 힘을 잃지. 그렇게 자아마저 유지할 힘마저 잃어버리면, 별은 수명을 다하고 석화가 진행돼.”
“돌이 돼 버린다는 뜻이야?”
“맞아. 진주만 한 작은 크기의 돌로 변하지. 그게 별 조각이야. 내가 말했나? 강하든 약하든, 별마다 고유의 능력이 있다고. 별 조각에는 그 능력이 녹아 들어 있어. 그걸 가지면 그 힘을 사용할 수 있고.”
리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대단한 돌이 있었으면 한 번쯤은 들어볼 법도 한데.
“처음 들어.”
“당연하지. 인간계에 있는 별 조각은 수도 적고 크기도 작아서 발견하기 힘들다고. 별을 탐지할 수 있는 나니까 가능하지. 그리고 찾았어도 말이야, 인간들이 별의 존재를 알겠어? 저게 뭔지도 모를걸.”
여기 전 주인이란 자도 뭔지 모르니까 아무 데나 굴러다니게 뒀겠지.
중얼거리던 파이톤스는 바닥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리체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해바라기 씨앗 같은 까만 눈동자가 원하는 게 있는 듯 반짝였다.
“계약자, 우리 훈련 성과 좀 내볼까?”
리체가 그간 훈련한 파이톤스의 능력은 파괴였다.
즉, 능력으로 바닥 좀 깨서 별 조각을 찾아보자는 얘기였다.
“안 돼.”
그 뜻을 알아들은 리체가 고개를 저었다. 품에는 아까 책꽂이 선반에서 집어 든 거울을 안고 있는 채였다.
“얀이 그랬잖아. 흠집 내면 곤란해진다고.”
“저거 인간계에서는 엄청 귀한 건데? 바닥 타일 하나만 깨보자. 내가 꺼낼게!”
“원상복구 할 수 있으면. 그게 안 되면 안 돼.”
“그건 어쩔 수 없어. 계약자. 내 능력은 전투에 특화돼 있단 말이야. 그렇지만, 어? 바닥이 깨져도 다른 물건으로 가리면 감쪽같을걸!”
안타깝게도 파이톤스에게 파괴 능력은 있어도 복구 능력은 없었다.
멀쩡히 되돌릴 수 없으면 아예 건드리지 않는 게 맞았다.
몇 번의 설득에도 리체가 완강히 반대하자, 파이톤스는 콧바람을 내뿜으며 투덜거렸다.
“이 조그만 계약자가 왜 이렇게 욕심이 없담!”
그가 아쉬워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느낀 별의 기운으로 따지면, 생전에 중간급 정도의 힘을 가진 별의 조각이었다.
어떤 능력이 나온다 해도 쓸만한 능력일 터인데.
[저기.]
“그래도 안 돼.”
[내 말 들려?]
“들었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걸.”
리체는 습관처럼 대답하다 의문을 느꼈다.
머릿속이 아닌 귀로 들리는 목소리인데, 파이톤스의 입은 벙긋 한 번 하지 않았다.
나 지금 누구랑 대화하는 거지?
그 의문은 파이톤스도 마찬가지였던 듯, 리체와 맞춘 눈을 끔벅이며 입을 열었다.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순간 기묘하게 변한 분위기에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저기.]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거울이었다.
“으, 으앗!”
깜짝 놀란 리체가 품에 안고 있던 거울을 떨어트렸다.
퍽 하고 바닥에 엎어진 거울에서, 쩌저적 하고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 * *
“어라, 오늘은 빨리 나오셨네요?”
얀은 개인 도서관에서 나오는 데온을 보며 말을 걸었다.
한 번 들어가면 몇 시간은 나오지 않는 데온인데, 이번에는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냥.”
데온은 슬쩍 로비를 둘러보며 물었다.
“……얘는?”
“리체 아가씨요? 도서관에 들어가 계세요.”
“아직도?”
무슨 그림책을 고르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려.
데온은 익숙하게 두 번째 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린이들이 보는 책은 대개 그곳에 보관하니.
그런 데온의 뒤에서, 얀이 로비 책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두 번째가 아니라 세 번째 도서관으로 들어가셨어요. 전전대 가주님의 개인 도서관이었던 곳이요.”
“세 번째?”
걸음을 잠시 멈춘 데온이 미간을 좁혔다.
세 번째라니. 늦는 이유가 있었잖아.
‘거기는 이상한 것투성인데.’
로드윅 가문은 전대 가주 대부터 양지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암살자 가문으로 음지에서 활동하는 성향이 짙었다는 뜻이었다.
리체가 들어간 도서관은 그런 음지에서 모은 전전대 가주의 마니악한 수집품들로 가득했다.
“거기서 애들 읽는 걸 어떻게 찾는다고.”
데온은 자신은 어른이라도 되는 듯한 말투로 투덜거리며 방향을 틀었다.
얀은 그런 데온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엄청나게 좋아하시네. 리체 아가씨.
“야, 멍멍이. 여기 너 볼 거 없으니까 다른 데로 가ㅈ-.”
데온이 도서관의 문을 열고, 안쪽을 향해 말하던 그때였다.
후다닥.
안쪽에서 작은 형체가 열린 문을 향해 달려왔다.
“오, 오빠!”
반짝이는 은발에 동그란 은빛 눈. 리체였다.
달려온 리체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데온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데온의 붉은 눈이 놀라 크게 뜨였다.
“야, 왜 그래?!”
다급한 데온의 물음에, 리체는 눈을 꼭 감고 눈물을 글썽이며 외쳤다.
“귀, 귀, 귀신!”
“뭐?”
“귀신!”
얘가 뭐라는 거야. 첩자면 몰라도, 귀신?
데온은 바들바들 떠는 리체의 정수리를 바라보다,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도 필사적으로 달려오길래 뭐라도 쫓아오는 줄 알았더니, 도서관은 조용하기만 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있어!”
리체가 소리쳤다.
‘시끄러워.’
아무래도 여기를 벗어나는 게 좋겠다. 미간을 찌푸린 데온은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리체가 그런 데온에게 새끼 코알라처럼 매달려 걸어갔다.
“리체 아가씨, 괜찮으세요?”
그러다 제 쪽으로 걸어온 얀의 목소리에 푹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얀, 죄송해요. 제가 뭘 하나 깼는데요, 아빠께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근데 얀은 그거 만지면 안 돼요! 귀, 귀, 귀신이-!”
“네?”
“야, 너 그냥 업혀라.”
데온은 귀찮다는 듯 다시 울먹거리기 시작한 리체를 제 허리에서 떼서 등에 업었다.
“도련님, 아가씨께서…….”
“냅둬. 아버지께는 말하지 말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온은 겁에 질린 리체를 업은 채, 도서관을 나갔다.
* * *
“…….”
어느 웅장한 저택의 고요한 복도.
7, 8살쯤 되었을까. 금발의 어린 소년이 외진 곳에서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귀족 도련님처럼 보이는 차림새였다.
썩 좋아 보이지 않는 안색이었음에도, 수려한 이목구비가 빛이 났다.
소년은 잔기침을 뱉으며 복도를 걸어갔다.
“도련님!”
까랑까랑한 목소리의 여자가 소년을 불러세웠다.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장이었다.
“약을 안 드셨더군요.”
하녀장은 다소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만한 발걸음으로 소년의 앞에 섰다.
잘 뻗은 눈썹 아래, 금빛의 눈동자가 그녀를 올려봤다.
“오늘은 몸 상태가 괜찮아서…….”
“공작님께서는 매일 약을 드시라고 하셨습니다.”
하녀장은 단호한 어조로 소년의 말을 잘랐다.
그러고는 소년을 향해 약병을 쥔 손을 내밀었다.
“드세요. 오늘치 약입니다.”
“…….”
뚜껑을 연 약병에서 익숙한 냄새가 흘러나왔지만,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다. 지병을 낫게 해주는 약이라며 매일같이 먹었지만, 이상하게 약을 먹을수록 몸이 더욱 안 좋아지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안 먹고 싶은데…….”
“드십시오.”
자신의 말은 전혀 듣지 않을 듯한 완강한 태도였다.
소년은 마지못해 약병을 받아들었다.
약물이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 갔다. 약물의 쓴맛을 잊으려, 소년은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누구였을까.’
어머니의 유품 중 하나인 그것은 거울이었으나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소년은 이따금 유품들을 갖다 놓은 방에 들어가 그 거울을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그러던 오늘.
[이 조그만 계약자가 왜 이렇게 욕심이 없담!]
거울에 손을 대는 순간, 발을 차며 두 팔을 들어 올린 다람쥐의 모습이 비쳤다. 성질을 내는 가벼운 톤의 목소리와 함께.
소년은 놀라 잠시 숨을 삼켰다가, 조심히 거울에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보이는 건 여전히 다람쥐뿐이었다.
‘누가 말하는 거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궁금했지만, 두어 번 들려온 목소리는 갑자기 잠잠해졌다.
이대로 끝인 건가. 조급해진 소년은 거울을 향해 다시 말을 걸었다.
“저기.”
[으앗!]
여자아이가 놀라 지르는 소리,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듯한 각도로 비친 누군가의 작은 실루엣, 퍽, 하고 무언가 터지는 소리.
그러고 거울은 다시 아무것도 비치지 않게 되었다.
‘또 들을 수 있을까.’
어쩌면 실루엣의 주인이 목소리의 주인일지도 몰랐다.
소년은 다 비운 약병을 하녀장에게 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