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17)화 (17/89)

17화 도저히 안 되겠다

리체가 도서관에서 귀신을 봤다고 말한 지 한 달 정도가 흘렀다.

블레이크와 데온은 황도로 가는 마차 안에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이틀 뒤 열리는 사냥제 때문이었다.

로드윅 영지에서 황도까지는 마차로 여드레 정도가 걸렸다. 

오늘 저녁이면 황도에 도착하니, 그 말은 로드윅 부자가 리체를 보지 못한 지 8일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리체가 걱정이군.”

블레이크가 말했다.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던 데온이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꾀병이잖아요.”

이 주 전, 리체는 사냥제에 능력자 가문과 황족들이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을 했다.

그 뒤로 다람쥐를 데리고 뭔가를 꾸미는 듯하더니, 출발 이틀 전부터 몸이 너무 아파 사냥제에 가지 못할 것 같다며 꾀병을 부렸다. 

걔는 연기 진짜 못 한다니까.

데온은 어색하게 기침을 흉내 내던 리체를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 가는 게 나아요. 사냥제에는 로벤하프도 있고.”

종소리가 들린다는 헛소리를 적어 보낸 로벤하프는, 그다음부터 로드윅 공작가에 놀러 가도 되냐는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본인 딴에는 자제하며 보낸다고 적혀 있었지만, 글쎄.

데온의 손에 구겨진 편지는 벌써 열 통이 넘었다.

“그렇지.”

안 가는 게 낫다는 데온의 말에, 블레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리체가 아픈 척을 한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지만, 억지로 데려가고 싶지는 않았기에 속아주는 척을 했다.

귀족들, 능력자들, 황족들이 득실거리는 사냥제에 가봤자, 리체가 구경거리가 될 게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그들 앞으로 나가는 게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겠지만, 그게 지금 당장일 필요는 없었다.

“요새 몸은 좀 어떠세요?”

그러다 블레이크의 귓가에 데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

블레이크는 몇 년 만에 자신의 안부를 묻는 아들을 바라봤다.

표정 변화는 크게 없었으나, 얼굴 근육이 살짝 경직돼 있었다. 데온이 긴장했다는 의미였다.

늘 물어보고 싶었지만, 쉽게 꺼내지 못했던 질문.

두 부자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주제였기 때문이었다.

블레이크의 몸 상태를 묻는 것은, 이제 남은 삶이 얼마인지를 묻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괜찮다.”

“…….”

블레이크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데온의 머리를 토닥였다.

“정말로 괜찮아.”

주변인들에게 늘 하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았다.

이 정도의 몸 상태가 얼마 만인가 싶을 정도로. 

가슴 통증 때문에 약을 먹는 횟수가 줄어 주치의가 놀랄 정도니.

가장 상태가 좋았던 건 저택을 떠나는 날 아침이었다.

“아빠, 오늘 같이 자 주시면 안 돼요……?” 

전날 밤, 리체가 제 방을 찾아왔기 때문인가.

이런 말을 하면 제드가 또 딸바보라 하겠지만, 요새는 그 말을 딱히 부정할 생각도 안 들었다.

오히려 썩 마음에 든다는 게, 정말 딸바보라도 된 기분이었다.

“……걔 때문인가?”

그러다 데온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블레이크가 무슨 뜻이냐는 듯 눈짓하자 데온은 고개를 저었다.

평소 말수가 적은 부자지간이었기에, 이만큼 대화한 것도 많은 대화였다.

말이 끊긴 마차는 침묵이 가라앉았다.

“……아버지.”

한참 뒤, 데온이 뜬금없이 블레이크에게 말했다.

창밖으로는 저 멀리 황궁을 품은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상한 애를 동생으로 데려오셨네요.”

블레이크는 그런 아들의 속을 꿰뚫어 보는 양 물었다.

“마음에 들지?”

“……뭐. 겁먹고 시끄럽게 우는 놈들보단 나아요.”

“네가 암살자란 소리만 안 했으면 그 아이들도 안 울었겠지.”

데온이 쫓아낸 귀족 자제들을 말하는 거였다.

사실 리체도 지난번 도서관에서 시끄럽게 굴긴 했지만. 데온은 구태여 그날 일을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리체가 자신을 오빠로 의지한다는 것에 느낀 뿌듯함을 무시하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약해빠진 게 잘못이죠.”

과연. 리체와 함께 있어 유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데온은 여전히 데온이었다.

불현듯 걱정이 밀려왔다. 블레이크는 데온에게 슬쩍 말했다.

“황족은 울리지 마라.”

* * *

로드윅 공작 가.

“…….”

“와. 얘 완전히 뻗었네, 뻗었어.”

“다람쥐가 영 기운을 못 차리네요. 아까 의원님께서 얼음 좀 먹이면 괜찮을 거라 하셨는데.”

리체, 제드, 안나는 탁자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탁자 위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쿠션에 액체처럼 널브러진 파이톤스가 있었다.

[아이고. 나 죽네, 죽어.]

‘많이 아파?’

[말도 마. 인간계가 이런 곳이었다니. 이러다 나도 잠들게 생겼어.]

파이톤스는 리체에게 힘들다며 제 상태를 토로했다.

인간계에 넘어온 몸이, 맞지 않는 환경에 결국 탈이 난 것이다.

리체와 계약했으니 잠들지도 모르겠다는 말은 엄살이었지만, 무리가 간 것은 확실했다.

몸을 움직일 기운마저 없었으니.

“벌써 더위를 타면 여름에는 큰일 나겠어요. 갈수록 날이 더워질 텐데.”

“그러게요…….”

리체가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상태로 여름까지 인간계에 있으면 어떻게 하지.

점점 흐물거려 액체처럼 녹아내릴지도. 그렇게 변한 파이톤스를 병에 넣고 다녀야 할지도 몰랐다.

“아가씨께서 걱정하시잖아. 힘내라, 땅콩.”

[이, 이놈이 또 그딴 이름으로 나를!]

캬악.

제드의 말에 발끈한 파이톤스는 위협하는 소리를 내며 상체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내 다시 뒤로 넘어가 쿠션과 한 몸처럼 찰싹 붙었다.

[아이고. 죽겠다.]

“제드 트레앙. 아가씨 다람쥐가 그 말 싫어하는 거 알면서 꼭 그렇게 말하더라.”

“성질부리는 게 귀엽잖아. 놀리는 말이란 걸 어떻게 알아듣지?”

제드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파이톤스의 팔을 슬쩍 들었다가 떨어트렸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파이톤스의 수염이 부들 떨렸다.

‘저 한심한 놈을 어째.’

안나는 제 오빠를 딱한 눈으로 보았다가, 자신과 제드 사이에서 파이톤스를 걱정스럽게 보는 리체에게 물었다.

“아가씨, 다람쥐 이름은 아직 안 지으셨어요? 지난번에 고민 중이라고 하셨잖아요.”

“아, 그게…….”

리체가 고개를 옆으로 올려 안나를 바라봤다. 다정히 웃는 게, 별 뜻 없이 묻는 것 같았지만 리체는 조금 당황했다.

[알고 있지? 내 진명은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면 안 돼.]

때마침, 안나의 말을 들은 파이톤스가 리체의 머릿속에 일렀다.

위대한 별들의 이름은 이런저런 효력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진명을 입에 담는 순간 말한 이의 위치가 그 이름을 가진 별에게 노출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름이 알려지면 아주 귀찮다고. 사방에서 나 여기 있어요, 하고 소리치는 것 같은 기분이야.] 

파이톤스가 리체에게 다른 위대한 별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것도 조금은 다르지만 비슷한 맥락의 이유였다.

트라펫의 의상실에서 느꼈던, 인간계에 왔는지도 모를 위대한 별에게 르티옴과 자신의 위치를 밝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리체나 자신이 이름을 말하는 순간 위치가 발각될 테니.

‘지금 다람쥐 이름 고민하시는 건가?’

‘귀여워. 가주님 안 따라가길 잘했네.’

안나와 제드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 리체의 모습을 훈훈하게 지켜봤다.

하지만 둘의 평화로움과는 달리, 리체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바빴다.

‘그러면 뭐라고 해?’

[대충 아무거나 지어.]

‘네 이름인데?’

[그래. 뭐든 상관없어. 땅콩만 빼고.]

파이톤스는 그렇게 말한 뒤, 더 얘기할 기력도 없는지 끙끙거렸다.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해도…….’

어떻게 아무 이름이나 짓는단 말인가.

블레이크에게 이름을 받기 전날, 설렜던 마음을 떠올리면 좀 더 고심해서 지어야 했다.

리체는 파이톤스에게 들리지 않게 혼자 생각했다.

‘다람쥐에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줘야 하나. 원래 이름이 파이톤스니까. 파이, …….’

“아가씨, 얘 그냥 땅콩이라고 부르는 건 어때요?”

그러다 훅 들어온 제드의 제안에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말했다.

땅콩은 안 된다고 했잖아. 파이톤스가.

“아, 아뇨! 피칸이에요!”

[……너무 대충 지었잖아. 인마.]

이름의 출처가 어제 먹은 피칸 파이라는 것을 깨달은 파이톤스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출처를 알아본 것은 트레앙 남매도 마찬가지였다.

제드는 땅콩이랑 비슷한 이름에 웃음을 터트렸고, 안나는 피칸 파이를 오늘 저녁 디저트로 내올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얼마 뒤, 제드와 안나가 각각의 볼일로 잠시 자리를 비웠다. 방에는 파이톤스와 리체만이 남았다.

“미안.”

리체는 여전히 누워있는 파이톤스에게 조용히 사과했다.

“내가 좀 더 멋진 이름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차라리 이름을 바꿨다 하자며, 리체는 떠오르는 이름을 줄줄 읊었다. 

열 개 정도를 말했을 때, 파이톤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안 되겠다!”

“다 마음에 안 들어?”

“뭐가? 이름? 그딴 건 아무 상관 없어.”

파이톤스는 비틀거리는 몸을 두 발로 지탱한 채, 리체에게 말했다.

“가자.”

“어디를?”

“마물의 숲.”

인간계에 도저히 못 있겠어.

파이톤스는 우욱 거리며 헛구역질했다.

* * *

로크샤 제국은 건국제의 전날, 사냥제를 여는 것이 관습이었다.

황가와 네 공작 가문만이 참가. 우승자가 다음 날 있을 건국제에서 제국민들 앞에서 포상받는, 일종의 권력 과시용 행사였다.

그 목적에 걸맞게 참관객들은 고위 귀족들이 대부분이었고. 자연스레 사냥제는 그들의 화합의 장이 되었다. 

참석한 가문들의 천막이 사냥제가 열리는 숲 초입에 쳐졌다. 각 천막은 귀족들의 사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런 여느 천막과 달리, 주인이 있음에도 한산한 천막이 있었으니.

“저기 봐요.”

“로드윅 공작님 혼자 계시는군요.”

로드윅 가문의 것이었다.

“그 유명한 평민 공녀는 안 데려오셨나 보네요.”

“황제를 견제해서 평민을 입양한 거라니까. 로드윅도 평판이 좋지는 않잖아. 평민들한테 환심 좀 사보려는 거지. 쓸데없이.”

“암살자 가문의 평판은 늘 안 좋죠. 현 로드윅 공작께서 가업은 본인 대에서 끝이라 했지만, 대대로 쌓아온 업보가 어디 가겠어요?”

그런데도 북적거리는 천막들의 화제가 모두 로드윅인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긴 했다.

“…….”

화제의 중심 속에 선 블레이크는 그늘막 아래 마련된 자리에 앉아, 따분하게 사냥제의 시작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혼자 계실 때 가서 말이라도 붙여볼까요?”

“관둬. 괜히 눈이라도 잘못 마주쳤다가 죽기 싫으면.”

“그나저나 여전히 수려하시군. 저 인물에 단명이라니. 아깝긴 해.”

“오죽하면 그런 말도 돌겠는가. 능력자들이 수명으로 외모를 샀다는.”

블레이크는 무표정했지만, 주변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가주 호위대의 대장인 쇼가 천막 안쪽, 어둠 속에서 속삭였다.

“경고라도 줄까요.”

블레이크는 신경 쓰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알겠습니다.”

그쯤, 로드윅의 천막으로 하늘색 머리카락의 단정한 미남이 찾아왔다.

30대 초반인 그는, 가진 능력만큼이나 냉랭한 얼굴의, 귀족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히베츠만 공작이었다.

“여기는 한적하니 좋군.”

서늘한 공기가 살짝 돌았다.

블레이크는 고개를 살짝 까딱했다. 히베츠만 공작이 천막을 한 번 훑으며 물었다.

“자네 아들은?”

“산책. 사람이 많아서 여기 있기 싫다던데.”

“여전하군.”

히베츠만 공작은 대꾸하며 블레이크 옆 빈자리에 앉았다.

“봤나? 황족들이 마법사들도 데려왔네. 올해는 이를 간 모양이야.”

그 말에 블레이크의 붉은 눈동자가 황족들의 천막 바깥에 서 있는 세 명의 마법사에게 닿았다.

마법사들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하며 시선을 돌렸다.

대수롭지도 않다.

가볍게 코웃음 친 블레이크의 눈에 다른 천막이 들어왔다.

천막 앞에는 커다란 늑대와 14살 정도 된 소년이 서 있었다.

“세르디야 쪽은 장남만 왔나?”

“아, 세르디야. 차남이 아프다더군.”

“그래?”

능력자인 차남이 참석하지 못했다.

아픈 것보다는 장남 세력의 견제로 못 왔을 확률이 높아 보였지만.

블레이크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만 끄덕이고는 더 묻지 않았다.

“저쪽도 능력자는 혼자야.”

히베츠만 공작이 다른 귀족과 대화하는 한 사람을 가리켰다.

내리쬐는 햇살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금발의 남자.

게르웨르 공작이었다.

썩 대화 주제로 내키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블레이크는 예의상 대화를 이어 나갔다.

“올해도 아들을 안 데려왔나? 능력자로 발현됐다는 소식을 들은 지 몇 년이 된 것 같은데, 한 번도 본 적이 없군. 몇 살이랬지.”

“여덟 살. ……그런데 블레이크. 게르웨르 공작이 요즘 이상한 행동을 해.”

“저자가 하는 짓이야, 항상 그렇지.”

“아니. 평소보다 더 이상하네.”

히베츠만 공작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예 시장을 돌아다닌다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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