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아파하잖아
“……노예 시장?”
블레이크는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라면 게르웨르 공작이 무엇을 하든 얽히려 하지 않았겠지만, 노예 시장이라는 말이 신경이 쓰이게 했다.
리체와의 첫 만남 때문이었다.
“거기는 왜.”
“저 인간의 머릿속을 내가 어찌 알겠어. 노예를 사는 것도 아니고 안을 둘러보기만 한다는군.”
사지 않고 시장을 둘러보기만 한다면, 이유가 있을 터였다.
가령, 찾는 물건이 없다거나.
……노예 시장이라.
“누군가를 찾는 건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블레이크.”
히베츠만 공작은 팔짱 낀 팔 하나를 세웠다. 자연스럽게 손으로 입을 가린 뒤, 게르웨르 공작이 노예 시장을 간다고 말했을 때보다 은밀하게 말했다.
“게르웨르 공작이 르티옴이라 중얼거리는 걸 누군가 들었다더군.”
그 말에 블레이크가 힐끗 히베츠만 공작을 바라봤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정도로 놀랐으나, 그 정도 반응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로드윅의 천막을 주시하는 눈이 더 늘었다. 공작 두 명이 함께 있으니 당연했다.
블레이크와 히베츠만 공작은 정면을 응시하며 태연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물론, 서로에게만 들릴 정도로 내뱉는 목소리는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단서라도 찾은 건가? 아무런 대책 없이 시장 바닥을 뒤지고 다닐 리가 없을 텐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르티옴을 찾으려면 능력을 사용해야 하는데, 제 수명 갉아먹는 짓을 저자가 그저 할 리가 있나.”
게르웨르 공작 가문의 능력은 눈에 있었다.
찬란한 황금빛의 혜안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모두가 속는 진실 같은 거짓마저 밝혀내곤 했다.
역사 속에서 르티옴을 가장 많이 차지한 공작 가문이 게르웨르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르티옴을 찾는 데에는 최적의 능력이지. 눈으로 보기만 하면 알아볼 수 있다니.”
하지만 그것도 옛말. 이제 와 르티옴을 찾는다는 건, 뜬구름 잡는 소리와도 같았다.
마지막 르티옴의 기록은 107년 전. 지나간 세월 동안 수많은 이들이 르티옴을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헛된 기대지. 멸종했어. 그들은.”
블레이크는 단언했다. 체념처럼 들리기도 했다.
히베츠만 공작이 짧게 위로를 건네려던 그때였다.
정면을 응시하던 블레이크가 눈에 불을 켜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떻게 한 게냐!”
분노와 여러 감정이 뒤섞인 날카로운 목소리가 사냥터를 울렸다.
게르웨르 가문의 천막 근처, 게르웨르 공작이 누군가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 봐. 블레이크. 자네 아들이잖아!”
상대를 확인한 히베츠만 공작도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게르웨르 공작이 무서운 기세로 데온의 어깨를 낚아챘다.
그의 타오르는 태양 같은 금빛의 눈이 데온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데온의 가슴께였다.
“어떻게 했기에! 그 빌어먹을 기운이!”
아까 전까지 귀족들과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던 게르웨르 공작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무언가에 미친 사람처럼 데온을 향해 울부짖듯이 물었다.
“찾은 게냐? 네가 찾은 게냐? 대답해 봐라. 어디서 찾았느냐? 가장 더러운 곳이 거기 말고 또 있던 게냐!”
그런 게르웨르 공작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그와 멀어졌다.
‘뭐야.’
데온은 짜증이 난 눈으로 게르웨르 공작을 바라봤다.
바로 앞에서 맡는 숨 냄새가 지독했다.
“말해 봐!”
‘시끄러워.’
입을 다물게 해버릴까.
데온이 손가락을 까딱하려던 때였다.
“……컥.”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별안간 게르웨르 공작이 목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금세 얼굴이 새빨개지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숨을 들이마시려 벌린 입을 연신 뻐끔거렸으나, 숨이 들어가고 나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로드……윅…….”
게르웨르 공작의 입에서 컥컥거리는 괴로운 신음과 함께 한 가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군데로 쏠렸다.
그곳에는 데온에게로 걸어오는 블레이크가 있었다.
블레이크는 제 아들을 히베츠만 공작에게 보낸 뒤, 바닥에 쓰러진 게르웨르 공작에게 차갑게 물었다.
“무슨 짓이지. 게르웨르 공작.”
“허억, 허억.”
게르웨르 공작의 호흡이 돌아왔다. 몸을 일으켜 급히 숨을 들이마시던 그는, 다시 가슴을 잡고 상체를 숙였다.
“크윽.”
이번에는 숨을 쉴 수 있었으나, 그 양이 무척이나 미약했다. 쌕쌕거리는 호흡으로 게르웨르는 고개를 쳐들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붉은 눈에 분노가 깃들었다. 블레이크가 낮은 어조로 말했다.
“3년 전에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내 아들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실핏줄이 터진 금안으로 블레이크를 바라보던 게르웨르 공작이 입매를 비틀었다.
“자네는 아니군……? 그래, 로드윅이 차지한 건 아니란 말이지.”
‘로드윅이 차지해?’
블레이크는 게르웨르 공작이 언급한 제 가문의 이름에 미간을 좁혔다.
게르웨르 공작은 쌕쌕거리는 호흡에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크큭……. 미안하지만, 로드윅 공작. 자네 아들에게 내가 볼일이 생긴 것 같네.”
“볼일? 그건 살아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닌가.”
이러다 게르웨르 공작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 광경을 지켜보는 모두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누가 능력자인 로드윅 공작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또 다른 공작인 세르디야는 재밌다는 듯 킬킬거리며 상황을 방관하는 중이었다.
결국 자신밖에 없나.
히베츠만 공작이 나서 블레이크를 말리려던 때였다.
“그만-.”
“도대체 무슨 소란인가!”
황제의 노기 어린 음성이 사냥터를 울렸다.
* * *
로드윅 가.
깊은 밤, 안나는 리체의 방문을 슬쩍 열었다.
안쪽의 넓은 침대에 볼록 튀어나온 이불과 베개를 벤 은발의 머리가 보였다.
‘잘 주무시고 계시네.’
졸린다며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잠든 리체는, 쥐 죽은 듯이 곯아떨어졌다.
다람쥐 걱정에 체력 소모를 꽤 한 모양이었다.
‘새벽에 깨실 것 같지는 않지? 나도 자러 가야겠다.’
안나는 마음을 놓으며 문을 닫았다. 그런 안나가 선 복도의 창에는 둥근 보름달이 떠 있었다.
* * *
[르티옴이다!]
[왜 왔어? 가장 큰 별이랑은 계약 파기야?]
[나랑 계약하자!]
[아니야, 나랑 계약해!]
마물의 숲, 호숫가.
파이톤스의 안내로 호숫가까지 온 리체는 별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중이었다.
“아니야. 계약은 파기 안 할 거야. 그러니까 새로운 계약은 안 해.”
리체의 단호한 대답에도 별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약하자며 끈질기게 물었다.
거절이 통하지 않아 곤란하던 차, 리체의 귓가에 첨벙 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안 한다잖아. 어디서 남의 계약자를 넘봐?]
[꺅!]
[나왔다!]
[도망쳐!]
호수 밖으로 나온 파이톤스였다. 리체 주변으로 몰려온 별들이 빠르게 도망쳤다.
처음 만났던 날처럼 찬란한 빛으로 돌아온 그는, 리체의 앞에 멈춰 섰다.
“이제 괜찮아?”
리체는 눈 위로 손 그늘을 만들며 파이톤스에게 물었다.
빛이 쌩쌩해진 걸 보아하니 호수에서 인간계의 독기를 다 뺀 모양이었다.
[완전.]
파이톤스의 성스러운 목소리에 만족스러움이 묻어나왔다.
그러고는 눈부셔하는 리체를 위해 다람쥐로 변한 뒤, 리체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성을 빠져나온 건 사람들한테 안 들켰겠지?”
리체의 말에 파이톤스는 코웃음을 쳤다.
“들켰을 리가. 내 인지 조작 능력을 무시하지 말라고.”
일종의 환각과도 같은 능력이었다. 가령, 침대에 올려놓은 옷가지를 리체로 보이게 한다거나. 리체의 존재감을 길가의 돌멩이보다도 못하게 해 밖으로 나가는 걸 보초병에게 들키지 않게 한다거나.
지난번 리체가 트레앙 남매 몰래 트라펫의 의상실을 빠져나온 것도 파이톤스가 이 능력을 사용한 덕분이었다.
“여기 올 때 마물들이 널 거들떠보지도 않던 거 잊었어? 그게 옷 뭉치라는 건 아침이 될 때까지 모를걸.”
하긴.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톤스가 마물의 숲으로 가자고 했을 때, 리체의 가장 큰 걱정은 마물이었다.
그 데온마저 애를 먹었던 마물인데. 파이톤스와 자신이 어떻게 상대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걱정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크르릉…….”
마물은 코앞에 와서도 리체와 파이톤스를 알아채지 못하고 제 갈 길을 갔으니.
“이제 돌아가?”
“응. 이제 남은 볼일은 없으니까. 이 정도면 됐어.”
돌아간다는 말에 주위에 숨은 별들이 리체에게 가지 말라며 아우성을 쳤다.
파이톤스가 위협하는 소리를 내자 비명을 지르며 호수 속으로 도망갔다.
리체와 파이톤스가 호숫가를 벗어나자, 숲은 기다렸다는 듯이 모습을 바꿨다.
“이쪽이야.”
파이톤스의 안내를 받아 걸어가던 리체는 달빛이 내려앉은 나무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늑대네?”
“늑대?”
리체는 파이톤스의 말을 따라 물었다.
그 사이, 리체의 어깨에서 내려간 파이톤스는 킁킁거리며 늑대를 옆에서 관찰했다.
“아직 어린 개체네. 다친 거 같은데?”
작은 늑대였다.
털에는 피가 엉겨 붙어 있었고, 똬리를 튼 몸의 상체는 크고 가쁘게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했다.
“왜 그러고 서 있어?”
파이톤스는 늑대의 상태를 살피던 중, 리체가 멀뚱히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평소의 계약자라면 자신보다 먼저 달려왔을 텐데. 저 참견쟁이가 웬일이람.
리체는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걔, 능력자야.”
“뭐어?”
파이톤스가 놀라 팔짝 뛰었다.
처음, 리체가 파이톤스의 말에 바로 공감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지금 그녀가 보는 것은 늑대가 아닌, 검은색의 기운 덩어리였으니.
파이톤스는 도끼눈을 했다가, 눈에 힘을 풀었다.
“녀석들의 잔재라니 맘에 안 들지만, 상태가 심각해서 뭐라 할 수가 없네.”
“그렇게 상태가 안 좋아?”
늑대가 웅크려 있는 탓에 상체의 기운이 몸 전체를 덮었다.
리체의 눈에는 제대로 된 상태가 보이질 않으니 파이톤스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파이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에 베인 것 같은 상처도 있고. 뼈도 부러졌어. 그냥 두면 며칠 안에 죽겠는데.”
쯧쯧. 능력자가 어쩌다 이렇게 됐대?
파이톤스는 혀를 찼다. 일렁이는 검은 기운을 바라보던 리체가 말했다.
“도와줘야 해.”
“왜?”
“아파하잖아.”
“네 오빠한테 한 것처럼 정화라도 하게? 그래도 얘는 죽어. 능력의 부작용 때문에 아픈 게 아니니까.”
“별의 능력으로는 못 고쳐?”
“말했잖아. 치유는 내 전문이 아니야. 더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부탁은 들어줄 수 있지만.”
“어떻게…….”
“말해줘?”
양쪽 입꼬리가 올라간 파이톤스의 미소가 그렇게 사악해 보일 수가 없었다.
리체는 고개를 빠르게 젓고는, 늑대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아 들었다.
낑 하고 어린 늑대가 울었다.
피부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따뜻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불쌍하고 평범한 늑대처럼 보였을 것이다. 리체가 르티옴이 아니었다면.
검은 기운들은 마치 자성을 띤 것처럼 리체에게 달라붙었다.
“어떻게 하려고?”
파이톤스가 물었다.
“그냥 두면 며칠 안에 죽는다며.”
리체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늑대를 쓰다듬었다. 피가 굳기 시작해 털이 뻣뻣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촉감으로 알 수 있었다.
제 품에 있는 늑대가 몹시 아프단 걸.
“……아파하는 걸 보고만 있기는 싫어.”
마물의 숲에서 이 늑대를 도와줄 이가 나타날 거란 가정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면, 늑대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리체는 품을 파고드는 늑대를 품에 안은 채, 앞으로 걸어갔다.
“어휴, 마음대로 해라.”
파이톤스는 리체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