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거절할 수 있어요?
블레이크의 주치의, 클랑은 출근 중 복도에 쭈그리고 앉은 리체를 발견했다.
‘리체 아가씨?’
자신의 진료실 문 옆이었다.
언제부터 이러고 계셨던 건지.
클랑은 곤히 잠든 은발의 동그란 뒤통수를 보며 고민했다. 깨워도 되나.
“끼잉…….”
그러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 고개를 슬쩍 옆으로 뺐다.
리체의 옆에 뚜껑이 달린 피크닉 바구니가 있었는데, 그 속에서 난 듯했다.
‘항상 붙어 있는 다람쥐 소리는 아니고. 뭘 가져오신 거지?’
클랑은 리체가 깰까 조심하며 바구니의 한쪽 뚜껑을 열었다.
천을 넣어 푹신하게 만든 바구니 안에, 상처를 입은 작은 늑대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허…….”
당황한 클랑이 침음했다.
어린 맹수란 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털 색이 주황색에 가까운 붉은색이라는 게 문제가 되었다.
세르디야 공작 가문의 능력자잖아.
‘소문의 차남이군.’
장남의 어머니인 첫째 부인에게 위협받고 다닌다는.
‘그런데 어떻게 리체 아가씨가?’
클랑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밤새 본인 방에서 자고 있었을 아가씨가, 갑자기 세르디야의 차남을 데려오다니.
움찔.
그 사이, 클랑의 인기척에 반응한 리체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속에서 자던 파이톤스가 하품했다.
은빛의 눈이 졸음을 마저 떨치지 못하고 끔뻑거렸다.
리체는 좌우로 고개를 돌렸다가, 제 옆에 쪼그려 앉아 바구니의 뚜껑을 붙잡고 있는 클랑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클랑.”
“리체 아가씨, 왜 여기서……. 아니, 그보다 이 동물은 어디서 데려오신 겁니까? 혹여 방에 침입자가-.”
리체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설명했다.
“피칸이 새벽에 창문을 계속 긁어서요.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창문을 열어줬더니 1층으로 내려가서 자꾸 절 불렀어요. 그래서 따라가니까 성문 근처에 얘가 있었어요.”
라는 건, 리체가 오늘 새벽에 꾸민 일이었다. 일부러 늑대를 성문 주변 풀숲에 숨겨 놓고, 공작성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우연히 발견한 척 데려왔다. 그저 몰래 데리고 들어오면 공작성에서 치료받기 어려우니. 남들에게도 이야기할 수 있을 만한 그럴듯한 사정이 필요했다.
사건의 내막을 알 리 없는 클랑이 놀라 질문했다.
“성문이요? 그 먼 곳까지 혼자 나가셨습니까?”
“아니요. 제드가 같이 가 줬어요.”
“제드?”
그런데 왜 여기에는 리체 아가씨 혼자인가.
리체는 의문을 품은 클랑의 뒤쪽을 가리켰다.
담요를 갖고 복도를 걸어오는 젊은 갈색 머리의 남자, 제드가 있었다.
“어? 아가씨 일어났어요? 의원님 오셨네?”
“제드. 잠시 나 좀 보세.”
클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드를 끌고 복도 모퉁이로 걸어갔다.
아이에게 들리지 않을 소리로 제드에게 속삭였다.
“자네, 어쩌자고 세르디야의 차남을 데려왔어?”
블레이크의 수족 같은 자였다. 그런 제드 트레앙이 저 늑대의 정체를 몰라보지는 않았을 터.
타박하는 클랑에게 제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죽어가게 생겼는데 어쩌겠습니까? 저 늑대, 8살밖에 안 된 어린애라고요.”
“자네가 애들한테 약한 건 알아. 그래도 성에 들이진 말았어야지. 저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세르디야 쪽에서 능력자를 죽였다고 군대를 끌고 들어와도 할 말이 없어.”
“아직 안 죽었잖아요.”
제드의 말에 클랑이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제 상황이었으면 의원님도 어쩔 수 없었을걸요? 리체 아가씨가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절 보는데…….”
“자네, 그걸 이유라고…….”
아가씨의 표정 때문에 분쟁의 씨앗을 성에 들였다니. 그것도 가주님도 안 계신 지금 이 시점에.
“그런 쓸데없는 이유를 댈 거면, 차라리-.”
클랑은 속삭이던 말을 다급히 멈췄다.
자신의 상의 자락을 잡은 작은 손 때문이었다.
“클랑.”
어느새 바구니를 들고 두 사람의 옆으로 다가온 리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얘, 많이 아픈데……. 치료해주시면 안 돼요?”
“아, 그게…….”
클랑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리체의 눈망울을 마주하고, 바짝 마르는 입술을 적셨다.
늑대의 치료는 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데, 왜 입에서 그 소리가 나오지 않는단 말인가.
“이대로 두면 안 된대요.”
“그.”
말을.
“클랑이 낫게 해주실 수 있다고 제드가 그랬는데…….”
“그게.”
해야 하는데.
“사람 말고 동물은 안 되는 거예요?”
“……아닙니다. 제가 봐보겠습니다.”
차마 저 순수한 은빛의 눈에 실망을 안겨줄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결국 클랑이 백기를 들었다.
그는 리체에게 미소를 지으며 늑대가 있는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그런 클랑 옆에서 제드가 놀림거리를 잡은 듯 히죽였다.
* * *
“세르디야 공작님, 너무 웃으시는 거 아니야? 저러다 입꼬리 찢어지겠다.”
로크샤 제국의 황궁, 로얄 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황좌의 단 아래, 세르디야 공작은 사냥제의 우승자가 되어 황제에게 포상을 하사받고 있었다.
“올해 건국제의 영광은, 세르디야의 머리 위에서 빛나게 되었소.”
황제의 말에 사방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로벤하프도 사람들 틈에서 열심히 박수했다. 바쁜 손만큼이나 입도 바빴다. 그는 옆에 시큰둥하게 선 데온에게 속삭였다.
“아쉽네. 어제 사건만 아니었어도 우승은 언제나처럼 로드윅 공작님이셨을 텐데.”
사냥제에서 일어난 블레이크와 게르웨르 공작의 마찰.
거기에 노한 황제는 두 가문의 올해 사냥제 출전권을 박탈했고, 황가와 히벤하츠, 세르디야가 참석한 사냥제에서 세르디야가 우승했다.
“저딴 게 뭐가 좋아서.”
데온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다른 곳에 자리를 잡은 블레이크도 비슷한 생각인지, 무표정한 얼굴로 형식적인 박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년 가져갔던 포상이 이번에는 없잖아?”
“무슨 포상.”
블레이크가 매년 성으로 가져오는 포상은 화려하긴 했으나, 딱히 받지 못해 아쉬워할 만한 것은 없었다.
모두 로드윅 가의 자금과 유통망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으니.
“황제 폐하 전속 요리사가 만드는 우승 축하 쿠키 말이야. 네 여동생이 좋아했을 텐데.”
데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로벤하프가 포상 얘기를 꺼낸 이유를 알았다.
그냥 리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잖아. 이 자식.
“있잖아. 데르케디온. 그거 내가 구해갈 테니까, 나 너희 집 가도 돼?”
로벤하프는 시선을 머리에 우승관을 쓰는 세르디야 공작에게 두며, 옆에 있을 데온에게 천연덕스럽게 질문했다.
“응? 내 말 들었어?”
돌아오는 데온의 답은 없었다.
여기에서 무너질 로벤하프 히베츠만이 아니지.
로벤하프는 세르디야 공작을 축하하는 웃는 낯을 유지하며 생각했다.
‘이 정도는 예상했어.’
지난 두 달간 데온과 대면하는 날만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른다.
고심해서 보낸 편지에는 답장이 없기 일쑤고.
어제 시기를 봐서 접근하려고 했는데, 로드윅 공작과 게르웨르 공작의 마찰로 분위기가 영 글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오늘은 반드시 로드윅 공작성에 방문해도 된다는 말을 들어야지.’
공작성으로 가면 이 종소리의 원인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로드윅 공작이 데려간 은발 여자애의 행방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로벤하프는 또다시 붉어지려는 얼굴을 냉기로 식히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 진짜 폐 안 끼치고…… 어, 데르케디온? 어디 갔어?”
하지만 옆에 있어야 할 데온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당황한 로벤하프의 푸른 눈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근처에 있던 귀족 하나가 자신이 본 것을 일러주었다.
“로드윅 공자는 조금 전 자리를 뜨셨답니다. 세르디야 공작님께서 우승관을 쓰실 때요.”
거의 처음부터였잖아.
이번에도 글렀다.
로벤하프는 속으로 울상지으며 건국제를 참관했다.
* * *
리체가 클랑의 진료실을 제 방처럼 들락거린지도 일주일이 넘었다.
“안녕하세요, 클랑. 들어가도 돼요?”
“물론이죠.”
열려 있는 문을 굳이 노크까지 하고 허락을 구한다.
클랑은 그런 리체의 모습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체는 구석에 있는 침대를 가린 커튼을 걷었다.
침대에 둔 바구니 속에 붕대를 감은 작은 늑대가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있었다.
‘자고 있네.’
이제는 파이톤스가 말해주지 않아도 늑대의 상태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늑대가 자고 있을 때마다 조금씩 정화한 기운이 지금은 상체의 반만을 가릴 정도로 줄었다.
하지만 몸에 난 상처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리체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클랑에게 늑대의 안부를 물었다.
“오늘은 많이 나아졌어요?”
“네. 어려서 그런지 회복 속도가 빠르네요. 상처는 이제 거의 아물었고 부러진 다리뼈도 금세 붙을 겁니다.”
살랑.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늑대 꼬리가 살랑였다. 감은 눈을 뜨자, 숲을 닮은 녹안이 나타났다.
“끼잉.”
“괜찮아?”
리체는 손을 내밀었다. 순순히 머리를 내준 늑대는 리체의 손바닥을 핥았다.
“간지러워.”
리체가 웃었다. 어린 늑대는 그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리체의 손바닥을 몇 번 더 핥았다.
“오, 얘 오늘은 기운이 넘치네요?”
어느새 진료실로 들어온 제드가 말을 걸었다.
로드윅 공작성에서 진료실에 머무는 늑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리체와 클랑과 트레앙 남매뿐이었다.
클랑과 트레앙 남매는 늑대가 능력자인 걸 알아봤음에도 리체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러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리체도 마찬가지였지만.
리체는 세 사람이 늑대가 능력자임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인화 능력자……. 지금의 나보다 한 살 더 많지?’
르티옴인 걸 능력자들에게 숨기려면 그들의 기본적인 정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했다.
리체는 예절교육을 맡은 마담 미셸에게 물어 능력자들에 관한 정보를 들었다.
눈앞의 늑대는 올해로 여덟 살인 세르디야 공작 가문의 차남, 지크베르트 세르디야였다.
문제는 로드윅 공작가와 세르디야 공작가가 대대로 물과 기름 같은 앙숙이라는 거였다.
늑대가 세르디야의 차남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지크베르트는 그날로 공작성에서 쫓겨날지도 몰랐다.
‘그래도 세르디야 가문의 능력자는 어렸을 때 능력 사용이 미숙해 주로 동물 형태로 지낸다고 했지. 다행이야.’
그러니 로드윅 공작가 내에서 수인화가 풀릴 걱정을 조금 덜 수 있었다.
늑대 상태면 능력자인 걸 모를 테니.
리체가 세르디야 가문의 능력자들이 가진 털 색의 특징을 모르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가주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는 사이, 본성 입구에서 이어진 사용인들의 외침이 저택 곳곳에 닿았다.
리체가 반가움에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돌렸다.
진료실의 열린 문 너머로 돌아온 가주 일행을 맞이하는 이들의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보지 못한 지 2주가 넘었으니, 꽤 그리움이 쌓였다.
“우리 가주님 빨리 오셨네.”
오늘 밤이나 내일 아침쯤 도착한다고 연락받았는데.
아직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왜 그럴까~ 능글맞게 걸음을 옮기는 제드의 시야로 호다닥 뛰어가는 리체가 들어왔다.
설레 보이는 뒷모습에 제드는 감격한 듯 입을 가렸다. 가주님의 일방적인 가족애가 아니었나.
한편, 진료실을 나온 리체는 누군가의 다리와 부딪혔다. 이어 자연스럽게 허공에 들린 몸은, 익숙한 품에 안겼다.
“리체.”
“아, 아빠!”
자신을 발견하고 금세 밝아진 얼굴을 하는 리체의 모습에, 블레이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는 리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랜만에 보는 딸에게 안부를 물었다.
“잘 지냈나.”
“야, 꾀병은 다 나았냐?”
같이 온 데온이 리체에게 인사 대신 물었다.
꾀병이라니. 사냥제에 가기 싫어 연기한 걸 들킨 모양이었다.
“어, 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컹컹.
그때, 아직은 썩 들키고 싶지 않았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뭐야?”
두 쌍의 붉은 눈이 열린 문 너머 진료실의 내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