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20)화 (20/89)

20화 들개군

“…….”

블레이크는 리체를 안은 채 침대 앞에 서서 바구니를 내려다보았다.

잠에서 완전히 깬 지크베르트는 털을 바짝 세워 블레이크를 경계하고 있었다.

‘짐승 냄새.’

데온은 블레이크의 옆에 서서 숨을 참았다.

이렇게 짐승 냄새가 강한 건 딱 하나지. 

‘세르디야 쪽 능력자잖아.’

그건 제 아버지도 알 터였다. 세르디야의 특징은 냄새뿐만이 아니었으니.

하지만 블레이크는 잠자코 늑대를 바라보다,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리체가 데려왔다고?”

“아, 가주님. 그게 말이죠.”

제드가 입을 열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리체와 눈을 마주치더니,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한쪽 눈을 깜빡였다.

“리체 아가씨께서는 그냥 다람쥐를 따라가셨고, 데려온 건 제가-.”

“제, 제가 데려왔어요! 죄송해요…….”

범인을 자처하는 제드의 말에 리체가 황급히 제가 범인임을 밝혔다.

마물의 숲에서 돌아온 날.

성문 근처에 지크베르트를 두고, 방으로 돌아와 파이톤스와 일을 꾸민 건 본인이었으니.

‘아빠가 세르디야의 능력자란 걸 알아봤을까?’

리체는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블레이크를 바라봤다.

알아보지 않았으면 했다.

마물의 숲에서 지크베르트를 구한 제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으나, 블레이크나 다른 이들을 곤란하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새끼 들개군.”

블레이크의 중얼거림을 들은 제드가 오, 하며 맞장구를 쳤다. 

붉은 털의 들개는 흔한 편이었다. 생김새도 비슷했고.

“맞아요. 새끼 들개죠. 의원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공작님 말씀이 맞는 것 같네. 이것 참. 내가 사람만 볼 줄 알지, 동물은 몰라서 실수했구먼.”

클랑도 맞장구에 동참했다.

다분히 리체를 의식하며 들개라 말하는 모습들에, 데온이 콧방귀를 뀌었다.

블레이크는 리체를 향해 물었다.

“리체, 네가 데려왔으니 처우도 결정해 보거라. 키우고 싶으냐.”

“저걸 키운다고요?”

데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끼어들었고, 리체는 깜짝 놀라 블레이크를 올려다봤다.

예상치 못한 물음에 당황했지만, 그것도 잠시. 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러면?”

“다 나을 때까지만 돌보고 싶어요.”

리체의 말을 들은 지크베르트가 끄응……. 하고 가엾은 소리를 내며 꼬리를 축 내렸다.

그렇다고 해서 리체의 생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크베르트를 로드윅 공작가에서 키울 수는 없으니까.

‘세르디야 가문의 능력자야. 계속 두면 아빠가 곤란해져.’

아픈 지크베르트를 두고 올 수 없어서 데려오긴 했으나, 쭉 로드윅 가에서 지내게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능력자인 그가 사라졌으니 세르디야 공작 가문은 난리가 났을 터였다.

“다 나으면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낼래요. 얘한테도 가족이 있을 테니깐요.”

그 말에 블레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싶으면 그러거라. 이 짐승은 다 나을 때까지만 데리고 있는 걸로 하지.”

“고맙습니다!”

리체가 활짝 웃자, 블레이크는 아이의 머리를 토닥였다.

리체는 그런 블레이크를 빤히 바라보다,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빠…….”

“말해 보거라.”

“아니에요.”

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냐, 라고 물어보고 싶은데 너무 뜬금없는 질문일 것 같았다.

리체의 은빛 눈동자가 블레이크의 상체로 향했다.

몇 번 정화를 맛본 기운은, 이전처럼 리체를 향해 달려들지 않고 잠잠했다.

블레이크가 떠나기 전날. 2주 넘게 못 볼 것을 고려해 며칠 분의 옴을 정화했다.

더 많은 양을 정화했다가는 블레이크가 이상을 느끼고 자신을 의심할지도 모르니, 그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옴이 짙어졌어.’

지금 블레이크의 옴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쌓여 있었다. 마치 능력을 사용하고 온 사람처럼.

‘제드가 사냥제에선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황가와 비전투 능력을 가진 게르웨르 가문을 위한 규칙이라고 했다.

능력을 사용할 만큼 위험한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아는 척을 할 수 없으니 문제였다.

“리체.”

블레이크가 고민이 가득한 작은 머리통을 향해 말을 걸었다.

리체가 눈을 맞추자, 그는 묘한 기대감이 깃든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선물 사 왔다.”

황도에서 선물을 살 때부터 이 말을 하고 싶어 어찌나 입이 근질근질했던지. 물론 블레이크 특유의 무표정 덕에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블레이크의 주도하에 리체 일행은 거실로 자리를 옮겨 선물을 함께 구경했다.

얼마나 많이 사 왔는지, 상자 하나를 풀고 나면 마차에서 도착한 다른 상자들이 거실 바닥을 채우고 있었다.

감당하기 힘든 선물 공세에 리체는 눈앞이 팽팽 돌 지경이었다.

그러다 데온이 둔해 보이는 게 닮아서 샀다며 강아지 인형을 리체에게 던져줬다.

“…….”

“닮았지?”

놀리는 의도가 다분해 보이는 저 올라간 입꼬리.

해보자는 건가. 리체의 눈에 전의가 깃들려던 순간이었다. 

때마침 근처 포장지 속에서 부스럭거리던 파이톤스가 그런 데온을 보고 머릿속으로 말했다.

[조그만 녀석이 시건방진 게 귀엽네.]

누가 누구보고 조그맣고 귀엽다고 하는 건지.

리체는 어이가 없어져 그만 맥이 풀려버렸다. 그래, 데온하고 싸워서 뭣하겠는가.

‘데온은 9살이니까.’

[너는 7살이고.]

9살하고 진심으로 싸우는 건 어른스럽지 못하다.

리체는 인형을 안아들고 방긋 웃었다.

“내 생각해서 사준 거야? 고마워, 오빠. 마음에 들어!”

“……어.”

자신이 예상과 다른 반응에, 데온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데온의 뒷덜미가 살짝 붉어졌다.

* * *

“늑대 말이에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제드가 책상에 앉은 블레이크에게 물었다.

사냥제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으니 따라오라는 명령을 받고 블레이크의 서재로 들어온 후였다.

“늑대?”

“……들개요. 자애로운 리체 아가씨께서 데려온.”

제드의 대답에 블레이크는 짧게 웃었다.

그는 자리를 비운 사이에 쌓인 서류들을 훑으며 말했다.

“돌려보내야지. 트라펫은 멀쩡한가?”

“다음 시즌 신상 준비한다고 정신없다네요. 늑대 모피는 마음을 접은 거 같아요. 다른 곳에서 영감을 얻었으니 모피 따위는 이제 됐다던데요.”

“다른 곳?”

“우리 아가씨요.”

제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트라펫이 늑대 모피를 포기했다. 세르디야 공작은 더는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이쪽으로 공작의 사람이 넘어올 일은 없겠군.”

블레이크는 잠시 생각하다, 제드에게 물었다.

“세르디야 공작가에 심은 우리 쪽 첩자가 있지?”

“있죠.”

“세르디야 공작에게 우리가 붉은 늑대 한 마리를 데리고 있다 전해. 장남 쪽 세력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은밀히.”

“넵. 그런데 가주님.”

제드는 자신이 걱정하는 것을 털어놓았다.

“세르디야 공작이 알면 자기 아들을 인질로 잡고 있다고 길길이 날뛰지 않을까요. 그 성격에 와서 얌전히 아들만 데리고 갈 것 같진 않던데.”

“지금은 괜찮아.”

블레이크는 건국제에서 우승관을 머리에 쓴 바보 같은 얼굴을 떠올렸다.

십 년 만에 되찾은 영광이니, 당분간은 원수의 부탁도 흔쾌히 들어줄 만큼 기분이 좋을 터였다.

단순한 작자다. 후계 문제도 단순하게 생각해서 문제지만.

“세르디야의 차남, 성문 앞에서 발견했을 때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고 했나?”

“네.”

“거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의문이긴 하군.”

블레이크는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어린 늑대가, 그것도 심하게 다친 몸으로 로드윅 공작령까지 온 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굳이 로드윅 공작성 앞에 쓰러져 있던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꾸민 일 같지 않은가.

“세르디야 장남 세력의 함정일 수도 있겠네요. 후계 문제에 세르디야와 사이가 좋지 않은 로드윅을 끌어들일 계략인지도요.”

제드가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도 성문 앞에 지크베르트를 발견했을 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제드, 얘 이대로 두면 죽어요……?”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을 차마 저버릴 수가 있어야지.

‘설마 나도 아가씨 바보가 된 거 아니야? ……아니지, 아니지. 나는 아가씨한테 넘어가지 않았다고.’

블레이크는 이미 딸바보의 강을 건넜다. 그가 리체를 위한다며 능력을 남발하는 순간이 온다면 제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은 정신을 차려야 했다.

제드가 진지하게 마음을 다잡는 사이, 블레이크가 입을 열었다.

“어찌 됐든, 능력자인 녀석이 저렇게 다친 건 장남 세력의 짓일 테지. 세르디야 공작이 사냥제에 간 때를 노려서 일을 벌였을 테고.”

“엮이면 골치 아파지겠는데요. 차라리 차남을 몰래 세르디야 공작성에 데려다 놓고 저희는 모르는 척하는 편이…….”

“아니.”

블레이크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드의 말대로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으나, 그건 다시 장남 세력의 손에 지크베르트를 쥐여 주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세르디야 공작은 아이들에 관한 일을 첫째 부인에게 모조리 맡기고 있었으니.

“그자도 아들이 누구에게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알아야지. 자기 후계 문제인데 언제까지 방관만 할 셈인지. 아, 그 말도 전하라 해. 로드윅은 이 문제에서 늑대의 치료 외에는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겠다고.”

“네.”

“그보다는 게르웨르 공작 쪽이 문제야.”

“게르웨르 공작요?”

블레이크는 데온에게 볼일이 있다던 게르웨르 공작의 말을 떠올렸다.

사냥제의 일 때문에 접근하지는 못했지만, 건국제에서 그의 눈은 데온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데온에게 다시 관심을 두더군.”

“또요?” 

제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3년 전, 6살인 데온을 게르웨르 공작이 납치하려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온이 가진 힘의 근원을 알아야겠다는 게 이유였다.

미수로 그쳤지만, 당시의 일 때문에 현 로드윅 가는 게르웨르 공작을 혐오했다.

“정신 나갔어요. 그자는. 게르웨르가 현자들의 가문이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라니까요.”

혜안을 가진 미치광이. 

현 게르웨르 공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려는 짓을 예측할 수 없기에 더욱더 골치였다.

여차하면 제 생이 끝날 때 길동무로 삼을 생각까지 하고 있지만.

그때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블레이크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게르웨르 쪽에 감시 인원을 더 투입해.”

“네.”

* * *

선선한 바람이 부는 오후였다. 

리체는 지크베르트의 상태를 보기 위해 클랑의 진료실을 방문했다.

“안녕.”

[오, 멀쩡하네?]

리체가 침대 위에 올라가자 지크베르트가 꼬리를 흔들며 반겼다.

들개가 된 지크베르트였지만, 노출되는 건 자제해야 했기에 침대 주위는 여전히 커튼이 쳐져 있었다.

“……?”

한참을 셋이 놀던 중, 커튼 너머가 소란스러워졌다.

진료실을 찾은 기사들의 목소리와 그들을 맞이하는 클랑의 목소리.

리체는 커튼을 살짝 걷어 바깥 상황을 살폈다.

두 명의 기사가 다친 듯 신음을 흘리는 기사 한 명을 부축했다.

다친 기사의 반쯤 숙인 상체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바닥을 물들였다.

“의, 의원님! 죄송합니다! 훈련 중에 상처를 입었는데, 마을 의원을 부를 때까지 버티지 못할 것 같아……!”

“보이네. 심각하군. 저기, 빈 병상에 누이게.”

“감사합니다! 이봐, 필립. 조금만 참아!”

클랑은 블레이크와 그 가족의 주치의였으나, 이따금 생사가 위급한 환자가 있을 때는 진료를 봐주기도 했다.

다친 기사는 진료실의 병상 하나를 차지했다. 리체가 있는 침대와 멀찍이 떨어진 곳이었다.

긴박했던 치료가 끝나자, 환자를 제외한 두 기사는 진료실을 나갔다.

“젠장. 저 녀석 살아야 할 텐데…….”

훌쩍이는 소리를 듣자 하니, 다친 기사와 꽤 사이가 좋은 모양이었다.

진료실이 조용해졌다.

클랑은 리체가 있는 침대의 커튼을 살짝 걷고 리체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가씨, 잠시 약초를 가지러 다녀오겠습니다. 아니면 지금 저와 나가시겠습니까? 방까지 모셔다드리지요.”

“여기 있을게요. 돌아오실 때까지만요.”

낯선 기사가 있는 진료실에 혼자 남겨질 지크베르트가 걱정됐다.

클랑은 리체의 말에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봤다.

침대 위, 정신을 잃은 기사는 부상이 심각해 하룻밤은 지나야 깨어날 터였다.

“그러면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십 분 정도면 되겠군요.”

클랑은 커튼을 치고 걸음을 옮겼다.

잠시 뒤,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해야 할 진료실. 하지만 발소리는 끊기지 않았다.

저벅. 저벅.

커튼 너머로 보이는 누군가의 우뚝 선 실루엣.

‘누구지?’

리체는 숨죽인 채 실루엣을 바라봤다.

“크르릉-.”

지크베르트가 털을 부풀리며 사납게 위협했다.

누군가의 손이 커튼을 걷었다. 붕대가 감긴 상체와 어두운 녹색의 머리칼을 보아하니 아까 커튼 너머로 확인한 다친 기사였다.

그런데 양쪽 눈 색이 달랐다. 갈색인 왼쪽 눈과 금빛을 띤 오른쪽 눈.

[계약자!]

파이톤스가 비명을 지르듯 머릿속에 외쳤다.

리체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기사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르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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