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이 난장판은 뭐야?
‘뭐?’
놀란 리체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방금 저 기사가 뭐라고 말했던가. 분명 제게 르티옴이라고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놈이야!]
어느새 침대의 커튼봉으로 올라간 파이톤스가 리체의 머릿속에 외쳤다.
‘놈이 누군데?’
[지난번 의상실에서 기운을 느꼈던 여섯 개의 위대한 별 중 하나. 젠장! 왜 기운이 끊겼던 건지 이제야 알겠네.]
파이톤스와 같은 위대한 별.
리체는 지난번 파이톤스가 위대한 별을 찾아서 물어볼 게 있다는 걸 떠올리고 질문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 잡아서 별들의 영면을 깨우는 방법을 물어볼 거야?’
[아니. 부딪히지는 말자. 내가 저놈이랑은 전투 상성이 안 좋아. 어떻게 된 일인지도 대강 예상이 가고.]
파이톤스가 상대하기 벅찬 별이란 소리였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자. 파이톤스가 속삭였다.
하지만 리체는 다친 지크베르트와 함께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유일한 탈출로는 저 기사가 막고 있었고.
리체는 틈을 봐 도망칠 요량으로 기사에게 시치미를 뗐다.
“……그게 뭔데요?”
의외로 썩 괜찮은 연기였으나, 통하지 않은 듯했다.
“왜 아들만 정화했지?”
이미 리체가 르티옴이라고 확신하는 말투였다.
위대한 별이라는 낯선 기사의 모습 속에서, 리체는 익숙한 것을 발견했다.
제 속을 낱낱이 꿰뚫어 보는 듯한 금색의 눈.
설마, 하는 불안감이 리체를 덮쳐왔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리체의 몸을 옭아맸다.
[계약자! 정신 차려! 저놈은-.]
머릿속에 울리는 파이톤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사가 리체의 팔을 낚아챘다.
“계약한 별이 없는 건가? 힘을 사용하는 데 무리가 가서 아직 공작을 정화하지 못한 거야?”
하나뿐인 금안에 광기가 어렸다. 위험하다. 본능이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컹!”
지크베르트가 그런 기사의 팔을 물었다.
어린 늑대의 날카로운 이빨이 살을 파고들었으나, 기사는 태연했다. 마치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 듯이.
기사가 팔을 세게 털자, 지크베르트는 내동댕이쳐져 벽에 부딪히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끼잉…….”
“지, 들개야!”
부딪힌 충격이 컸다. 지크베르트가 비틀거리며 일어났지만 한 걸음 채 걷지도 못하고 다시 쓰러졌다.
리체는 도끼눈을 뜨고 기사를 노려봤다.
“로드윅 공작은 네 이름은 공표하지 않았지. 말해봐. 이름이 뭐지?”
리체의 팔을 잡은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아파. 뿌리치려고 했으나 뿌리칠 수 없었다. 파이톤스의 힘을 사용할까. 하지만 그건 리체가 르티옴이라는 기사의 말을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리체는 안간힘을 쓰며 기사의 손에서 제 팔을 빼려고 했다.
“저리……!”
퍽.
위쪽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기사의 머리를 내리쳤다. 파이톤스였다.
머리뼈가 흔들릴 만큼 강한 타격이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기사는 리체의 팔을 놓고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꺼져라. 히켄카.]
파이톤스가 입 밖으로 낸 별의 목소리는 성난 천둥과도 같았다.
고막을 날카롭게 찌르는 소리. 리체는 몸을 움찔 떨었다.
히켄카는 리체의 앞에 당당히 선 다람쥐를 보고는 입가를 비틀었다.
“……오호, 네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파이톤스.”
“몰랐겠지. 멍청아. 얘는 내가 계약했으니 눈독 들이지 말고 꺼져.”
“그 한심한 탈은 뭐지? 전투의 신이란 이름이 무색하군. 그때 입은 내상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나?”
“흥. 철 좀 들었네. 내 안부도 물어봐 주고.”
파이톤스가 주먹을 쥐었다.
……전투의 신? 궁금해하는 리체의 머릿속에 파이톤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약자, 늑대 데리고 도망쳐.]
‘도망치라고? 어떻게 하게?’
[주의를 끌어야지.]
설명을 들을 새도 없었다.
“그런데 여전히 남의 말은 안 듣나 봐? 내가 꺼지라고 했는데 아직 있는 걸 보아하니-!”
파이톤스는 히켄카를 향해 달려들었다. 작은 주먹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히켄카가 팔을 들어 방어했다. 곧바로 둘의 공방이 펼쳐졌다.
리체가 다급히 외쳤다.
‘파이톤스! 능력을 직접 사용하면 몸에 무리가 간다며!’
르티옴이 별과 맺은 계약으로 정화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처럼, 별 또한 인간계에서 제 능력을 혼자서 사용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다람쥐의 몸으로는 더더욱.
히켄카의 공격에 파이톤스가 밀리기 시작했다. 공격은커녕 방어하기도 급급했다. 이거 위험한데, 싶을 때쯤 별안간 폭발음이 들리더니 히켄카의 다리가 꺾였다.
“너……!”
파이톤스는 고개를 돌렸다. 리체였다. 그녀가 자신의 힘을 제멋대로 가져다 쓴 것이었다. 저 괴물 같은 녀석.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다.
파이톤스는 리체가 만들어준 틈을 놓치지 않고 히켄카에게 반격했다.
[이 계약자가! 도망가라고 했지?]
어느새 침대에서 내려온 리체는 정신을 잃은 지크베르트를 안고 있었다.
‘너 두고 못 가. 혼자서 싸우다가 당하면 어떻게 해?’
[허, 내가 그렇게 약할 거 같아? 걱정되면 빨리 가기나 해! 네가 가면 나도 뒤쫓아 갈 테니까!]
리체는 잠시 망설이다 지크베르트를 안은 채 진료실 문을 향해 달렸다. 뒤쫓아 온다는 파이톤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히켄카가 그런 리체를 뒤쫓으려고 했으나, 파이톤스에게 저지당했다.
“어딜!”
“큭.”
히켄카의 금안이 찌푸려졌다. 파이톤스는 씩 웃으며 손을 까딱했다.
“하던 건 계속해야지.”
그의 도발에 히켄카는 성가시다는 얼굴을 했다.
“곧 끝내주지.”
그 사이, 리체는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저 멀리 복도에서 클랑이 보였다.
약초를 가져오던 그가 폭발음을 듣고 달려오는 중이었다.
“클랑!”
“아가씨!”
클랑은 리체에게서 지크베르트를 넘겨받으며 물었다.
“리체 아가씨,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게, 그게……!”
우선 진료실과 최대한 멀어져야 한다. 저 싸움에 클랑까지 말려들게 할 수는 없으니. 리체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을 설명하는 대신, 클랑의 손을 잡고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어디가?”
뒤쫓아온 히켄카만 아니었으면.
“나랑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잖아.”
섬뜩한 목소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손을 잡고 있던 클랑이 줄이 끊긴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히켄카의 능력이었다.
“그렇지? 리체.”
그 금안을 하고 제 이름을 부른다.
“나의 아그네스.”
리체는 마치 뱀 앞의 쥐처럼 얼어붙어 제게 다가오는 서늘한 손끝을 바라봤다.
그 손이 리체의 볼에 닿기 직전, 누군가 그의 뒤를 덮쳐 제압했다.
“이야, 이게 무슨 일일까? 우리 필립이 왜 아가씨를 괴롭히지? 응?”
제드가 넘어진 히켄카를 깔고 앉았다. 장난스럽게 들리는 말투와는 달리, 얼굴은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리체를 찾아 진료실 방향으로 오는 게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큰일이 날 뻔했다.
바닥에 이마를 박은 히켄카는 큭큭 웃더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직도 얼어붙은 리체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시간이 다 됐군.”
리체의 은안에 비친 히켄카의 오른쪽 눈에서 금빛이 서서히 사라지더니, 왼쪽과 같은 갈색으로 물들어갔다.
미소를 머금은 히켄카의 입에서 마지막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음에 또 보자고. 어린…….”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축 늘어진 그 모습에, 리체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가씨, 괜찮아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요?”
‘파이톤스!’
저를 따라온 게 파이톤스가 아닌 히켄카라면, 파이톤스는 어떻게 된 것인가.
“자, 잠시만요!”
리체는 상황을 묻는 제드를 뒤로 하고 진료실로 달려갔다.
문이 활짝 열린 진료실 안은 난장판이었다.
깨진 창문, 부서지고 넘어진 가구들, 성한 것 하나 없는 집기들…….
마치 철거 현장 같은 그곳에서, 파이톤스는 쿠션이 터진 소파 위에 뻗어 있었다.
“피칸!”
제드를 의식한 리체가, 다른 이름으로 파이톤스를 부르며 그에게 다가갔다. 반쯤 감긴 작은 눈이 리체를 바라봤다.
[계약자.]
‘괜찮아?!’
[미안한데 호숫가 한 번 더 다녀와야겠다…….]
그 말을 끝으로 파이톤스는 정신을 잃고 고개를 떨궜다.
파이톤스의 숨이 붙어 있음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려던 찰나.
“리체.”
리체의 등 뒤에서, 기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클랑과 제드와 마찬가지로, 저택 안에서 일어난 소란을 듣고 달려온 참이었다.
“아, 아빠.”
같이 온 데온이 진료실 안을 둘러보며 인상을 썼다.
“이 난장판은 뭐야?”
덜컹.
리체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 * *
“말도 안 됩니다!”
성난 사내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제 아버지에게 할 말이 있어 방을 찾아간 소년은, 방문 틈 사이로 들리는 소리에 노크하려던 손을 멈췄다.
20대 후반의 금발의 미남. 게르웨르 공작은 자신의 앞에 있는 통신구를 향해 중얼거렸다.
“분명 로드윅이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집에, 르티옴이……. 그 수양딸이 르티옴일 겁니다.”
사냥제에서 데르케디온 로드윅의 부작용이 정화된 것을 본 이후로, 게르웨르 공작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가정했다.
그러던 중 가능성이 큰 가설을 하나 떠올렸다.
블레이크의 기운이 그대로였음에 로드윅이 르티옴을 차지한 것이 아닐 거라 생각했으나.
“평민을 수양딸로 들인 게 수상합니다. 고작 일곱 살이라 했으니, 정화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길 기다리는 겁니다……!”
[아니라고 했잖나. 그 수양딸은 르티옴이 아니라고.]
통신구에서 노파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네가 그렇게 성질을 내지 않아도 이쪽도 일이 틀어졌어. 생각지도 못한 놈이 등장했거든.]
쯧, 하고 노파는 혀를 찼다. 그러고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통신을 종료하려 했다.
[아무튼. 나중에 또 연락하지.]
“그, 그것만!”
게르웨르 공작은 다급히 통신구를 붙들었다. 아직 끊기지 않은 통신구에 대고 소리쳤다.
“그것만 알려주십시오! 제가 본 미래가 맞습니까?”
[미래? 맞을 뻔했지.]
“그게 무슨 말씀……!”
하지만 통신은 매정하게 끊겼다. 게르웨르 공작은 잠잠해진 통신구를 바라보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악을 질렀다.
‘…….’
소년은 처음 보는 제 아버지의 모습에 놀라 숨을 삼켰다.
게르웨르 공작은 책상 위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씩씩거리는 그의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왜……. 왜 없는 게냐. 그렇게 찾아다녔는데-!”
게르웨르의 혜안은 아주 드물게 미래를 보여줬다.
게르웨르 공작이 꿈속에서 그 미래를 본 것은 반년 전이었다.
노예들을 파는 시장 바닥.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곳인 것 같은 그 장소에, 게르웨르 공작은 환영으로 서 있었다.
우리 속에 한 아이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지저분함이 말로 할 수도 없어, 같은 공간에 두기에도 불결했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 깃든 빛의 존재를 제 눈으로 본 순간, 게르웨르 공작의 몸에 소름이 끼쳤다.
르티옴이다. 제 세대에 르티옴이 태어난 것이다.
‘내 것이다.’
잠에서 깬 그의 머릿속을 그 아이가 지배했다.
예지였다. 게르웨르의 능력이 르티옴을 제게 주려고 그 미래를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제국의 노예 시장을 아무리 뒤지고 다녀도 르티옴은 찾을 수 없었다.
“분명 로드윅이다. 로드윅이 내 르티옴을…….”
꽉 쥔 주먹이 부들거렸다.
정화된 로드윅 공자. 그리고 로드윅 공작이 입양했다는 평민 출신의 아이.
정황상 그 수양딸이 르티옴이라는 확신이 들었으나.
[로드윅 공작가에 르티옴은 없어.]
그자는 아니라 말했다.
자신의 확신이 틀렸단 말인가.
한 달 전, 노예 시장을 뒤지고 다니던 제게 접근한 노파. 그자가 제 선조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자신의 혜안에 그렇게 비치고 있었으니까. 노파 안에 있는 건 게르웨르의 능력을 가진 영혼이라고.
“…….”
게르웨르 공작은 고개를 돌렸다.
닫힌 줄 알았던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