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강해져야지
게르웨르 공작의 물음에도 문 너머는 조용했다.
그는 잠시 능력을 사용해 정체를 확인할까 고민하다가 책상에 기댔던 상체를 일으켰다.
반년 동안 노예 시장을 뒤집고 다니면서 기운이 많이 쌓였다.
같은 대의 능력자 중 곧 죽어버릴 블레이크만큼은 아니지만, 제게 남은 시간도 그리 많지는 않았으니. 르티옴을 찾을 때까지 남용은 금물이었다.
게르웨르 공작은 휘적거리며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와 꼭 닮은 금발과 금안을 가진 여덟 살의 소년이 그곳에 서 있었다.
잘 뻗은 콧날 아래, 오랜 병으로 퍼석한 입술이 당황한 음성을 흘렸다.
“아, 아버지.”
“이안드웨인 게르웨르.”
아들을 부르는 것임에도 타인을 부르는 듯했다.
그가 자식에 대한 정이 메말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인드웨인을 질투하는 못난 아비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아이. 게르웨르의 능력과 가문을 손에 쥐고, 모든 것이 보장된 삶을 살 아이.
자신이 말라갈수록 제 아들의 인생은 찬란해질 터였다. 마치 절 양분 삼아 크는 나무처럼. 제 모든 것을 빼앗는 도적처럼.
하지만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은 이 아이에게 무엇하나 뺏기지 않을 터니.
그것은, 미래에 쥐게 될 르티옴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들었느냐?”
이안을 보는 게르웨르 공작의 눈이 서늘했다.
* * *
늦은 밤. 리체의 침실.
드디어 혼자 남은 리체는 오늘 있었던 일에 관해 파이톤스와 대화 중이었다.
난장판이 된 진료실의 범인으로는 다친 기사가 지목됐다.
이름은 필립. 17살인 젊은 기사는, 12살에 로드윅 공작가에 들어와 견습 기사 기간을 마치고 다음 달에 기사서임을 받을 예정이었다.
주변 기사들이 필립은 그럴 이가 아니라 입을 모아 말했고, 리체도 다른 괴한이 들어왔다고 둘러댔으나.
복도에서 리체를 쫓아온 모습을 제드와 클랑이 목격한 것은, 어떻게 변명할 방도가 없었다.
결국 필립은 정신을 잃은 채 공작성 감옥에 구금됐다.
문제는 그가 정말 범인이 아니라는 거였다.
“다친 기사의 몸에 빙의한 거라고?”
리체의 되물음에 쿠션에 몸을 기대고 있던 파이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보름달이 뜨지 않아 호숫가에 다녀오지를 못했다. 그래도 지난번처럼 곧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는지, 몸을 움직일 수는 있었다.
“놈의 주특기야. 거기에 있었으면 너한테 빙의하려고 했을지도 몰라.”
히켄카에게 빙의를 당했을지도 몰랐다니. 리체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건……. 싫어.”
파이톤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히켄카는 게르웨르 공작 가문에게 능력을 준 별이라고.
오늘 히켄카의 금안을 마주했을 때 들었던 섬찟한 느낌은, 그저 기분 탓이 아니었다.
아그네스로 살던 기억에 새겨진 경고였다.
게르웨르의 금안. 다시는 게르웨르 공작성에 갇혀 살던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도망칠래?”
파이톤스가 그런 리체의 생각을 꿰뚫어 보듯 물었다.
늘 하는 농담인가 싶었지만,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오늘 일로 확신했어. 놈이 노리는 건 너야.”
“나?”
“너와 계약하려는 거지.”
“나랑? 왜?”
“별들의 유희.”
별들의 유희.
르티옴과 계약한 별이 인간계에 머물 수 있는 현상을 말하는 거였다.
파이톤스는 수염을 바르르 떨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걸 노리는 거야. 인간계에 나오려고. 그 녀석이 시간이 다 됐다고 했지? 너는 그 전에 진료실로 돌아오는 의원을 만났다고 했고.”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10분. 클랑이 약초를 가지러 다녀온다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도 빙의하지 못한다면, 놈의 몸은 아직 무덤에 잠들어 있을 거야. 사념체로 인간계에 잠시 머무는 거지.”
별의 유희를 통해 인간계로 나올 생각인 게 분명했다. 그대로 나오면 몇백 년 전처럼 인간계에서 힘을 잃고 무덤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
“쳇. 그놈들은 그때 별 조각이나 돼야 했는데.”
“그런데, 파이톤스. 그 별은 왜 인간계에 나오려는 거야?”
파이톤스는 리체를 힐끔 봤다가 마주친 눈을 피했다.
“인간계를 지배하려고.”
“뭐?”
리체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파이톤스는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앞발톱을 튕기며 설명을 이었다.
“우리 세계를 왜 무덤이라고 부르는지 알아? 아무것도 없는 그 속에서 별들은 죽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저 인간계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지. 부럽다는 눈으로. 우리 무덤 관리자, 그러니까 위대한 별 중 넷은 그 무덤을 탈출하기를 원했어. 인간계와 무덤의 경계를 무너트리고 별들이 인간계를 지배하기를 바랐지. 나와 호구는 그 반대의 입장이었고. 그러다 싸움이 일어났어. 결국 타협점을 찾지 못했지만. 그게 몇백 년 전에 놈들이 인간계로 간 계기야.”
싸움이라고 말했지만, 무덤 전체가 며칠을 흔들릴 만큼 거대한 격투였다.
“나눠진 두 세계의 경계를 무너트린다니. 잘못하다가는 세계 전체가 붕괴해버린다고.”
멍청이들. 파이톤스는 투덜거렸다. 그러고는 가만히 듣고 있는 리체를 향해 말했다.
“잠든 놈들이 여전히 그럴 생각이라면, 그 녀석은 다시 찾아와서 널 넘볼 거야. 문제는 내가 놈들이 잠든 장소를 모른다는 거지. 내 탐지 능력으로도 안 잡히니, 내가 무덤으로 넘어가서 녀석들을 막을 방도가 없어. 그리고 그 녀석은 사념체로 인간계에 나오니까 어디서 누구로 빙의해서 널 덮칠지 몰라.”
“응. 이해했어. 그러니까 도망가자는 거지?”
“그래.”
파이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계약자는 어리지만,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었다.
생각하는 것이 어리지 않고 곁에는 제가 있으니. 고생은 좀 하겠지만 밖에서 사는 데에는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리체의 능력은 위대한 별인 자신이 아직 파악하지 못할 정도였다.
몇 년 동안 잘 훈련 시키면 히켄카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지도.
“감옥에 갇힌 기사도 일회용인지, 계속 사용하는 몸인지도 모르니까. 빨리 도망치자. 기왕이면 오늘 갈까? 로드윅은 부자니까 돈 좀 왕창 챙겨가도 괜찮겠지?”
파이톤스는 끙차, 몸을 일으켰다. 쿠션을 푹푹 밟으며 뭘 가져갈지 방 안을 둘러봤다. 리체가 그런 파이톤스의 뒤통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도망 안 쳐.”
“안 친다고? 왜? 여기가 너무 안락해서 그래? 하긴, 나가면 고생길이 열리긴 하지. 하지만 계약자, 내 생각에는-.”
“그게 아니야.”
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분명 파이톤스가 그렇게 말했다. 히켄카가 어디서 누구로 빙의할지 모른다고.
“그 별이 로드윅에 있는 사람 중 누군가로 빙의하면 어떻게 해? 필립이라는 그 기사처럼.”
그러면 히켄카가 로드윅 공작성을 배회하고 다녀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로드윅에게 능력을 준 별도 인간계를 노리는 넷 중 하나였다고는 하지만, 그게 히켄카가 로드윅에게 호의적일 거란 근거는 되지 못했다.
오히려 로드윅을 미끼로 자신을 잡으려 할지도 모른다.
게르웨르 공작처럼.
“아그네스. 결국 너 때문에 이 하녀는 눈과 귀를 잃었구나. 다음에 또 도망간다면, 그때는 하녀의 혀가 사라질 거다.”
히켄카가 무슨 일을 벌일지는 모르지만, 파이톤스에게는 별을 탐지하는 능력이 있었다. 로드윅 공작성에 나타나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러니까 도망치지 않을래. 오늘도 갑자기 나타났잖아. 로드윅 가에는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할 거야.”
“뭐.”
파이톤스는 굳게 다짐하는 리체를 바라봤다.
지난번에는 르티옴인 걸 밝히고 싶지 않다길래, 언제든 능력자들을 내치고 갈 줄 알았더니.
“나는 기본적으로 계약자의 뜻을 존중해주자는 주의여서.”
파이톤스는 머릿속을 채웠던 로드윅의 금화를 떨치며 쿠션에 벌러덩 누웠다.
“그러면 여기 계속 있든가.”
“응.”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결의에 찬 눈빛 좀 봐라. 이제는 완전 이 집 딸이네.
“파이톤스, 내가 열심히 할게.”
“열심히? 뭘 열심히 해?”
“그 별한테 지지 않게. 계약도 절대 안 할 거고. 도망치는 것도 열심히 할게.”
그렇게까지 열심히는 안 해도 되는데.
파이톤스는 의욕 가득한 리체를 바라봤다. 지금이라면 뭘 시켜도 한다고 할 것 같았다.
“좋아. 계약자.”
파이톤스는 꿍꿍이가 있는 얼굴로 씩 웃었다.
“지지 않으려면 강해져야지.”
* * *
“개인 도서관을 고르실 수 있냐고요?”
얀은 도서관 로비 책상 위로 얼굴을 빼꼼 내민 리체를 향해 물었다.
씩씩하게 얀을 찾아온 건 좋았지만, 책상이 생각보다 높았다.
키가 모자라 리체는 까치발을 하고 두 손으로 책상을 붙들어야 얀과 얼굴을 보며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네. 지난번에 갔던 세 번째 도서관이요!”
“도서관은 얼마든지 선택하실 수 있으시지만, 거기는…….”
얀은 걱정하며 말끝을 흐렸다.
지난번 리체가 기겁하면서 뛰쳐나온 곳이 아닌가.
“귀신이 좋은가 봐.”
옆에서 뚱하게 서 있던 데온이 말했다.
진료실이 난장판이 된 게 불과 어제이니, 블레이크는 데온에게 리체와 다니며 돌봐주라고 말했다.
덕분에 아침부터 오후가 된 지금까지 리체와 붙어 다닌 데온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리체와 있는 건 나름대로 지낼 만했으나.
‘얘는 왜 이렇게 말을 거는 사람이 많아?’
주변에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더욱이 망가진 진료실 대신 다른 빈방을 사용하게 된 세르디야의 능력자.
리체가 병문안을 가는 바람에 한 시간은 족히 그 짐승 냄새를 맡았으니, 데온에게는 오늘 반나절이 꽤 고역이었다.
“그냥 거기 가지라고 해. 아버지는 허락하셨으니까.”
“아, 네. 공작님께서 허락하셨으면 문제없죠.”
그러니 데온은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로드윅의 도서관은 황궁 금고보다 튼튼한 방범 장치가 돼 있었다. 바깥과 다른 세상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침입자에 안전한.
“야, 멍멍이. 갈 때 나 불러라.”
“응.”
데온은 도망치듯 자신의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얀은 혼자 남은 리체를 향해 물었다.
“아가씨께서도 도서관을 이용하실 건가요?”
“네. 세 번째 도서관요.”
“벌써요? 후후, 정말 그 도서관이 갖고 싶으셨나 봐요.”
의외로 전전대 가주의 고풍스러운 취미가 리체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얀은 아이의 특이한 취향을 귀여워하며, 세 번째 도서관의 문을 열었다.
“지금부터 아가씨만의 도서관이랍니다. 바꾸고 싶으신 게 있다면 뭐든 제게 말씀해주세요. 다만, 지난번에 말씀드렸다시피 도서관을 정리하려면 일 년 정도는 걸릴 거예요. 그때까지는 어수선해도 이해해주세요.”
“저, 저는 다 마음에 드는데요.”
얀은 긴장한 기색이 묻어나오는 리체의 경직된 얼굴을 보며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마음에 드는 걸까. 무서워하시는 거 같은데.
“같이 있어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리체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얀은 전등을 환히 켜주며 말했다.
“무서우시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크게 부르시면 바로 달려올게요.”
“네. 고마워요. 얀.”
“그리고.”
도서관을 나간 얀은 문을 닫기 직전, 리체에게 생긋 웃었다.
“이제 이 안의 물건들은 아가씨 것이니 마음대로 하셔도 좋답니다.”
달깍. 하고 손잡이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리체는 완전히 닫힌 문을 바라봤다. 커다란 도서관이 괜히 음산하게 느껴졌다.
[들었지?]
리체의 주머니 속에서 밖으로 나온 파이톤스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하지만 리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뭐든 열심히 한다던 계약자, 정신 차려봐.]
파이톤스는 겁을 먹고 뻣뻣하게 굳은 리체의 어깨를 팡팡 쳤다.
[바닥 부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