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나도 능력자인데
파이톤스와 리체는 도서관 안으로 걸어갔다.
책꽂이 몇 개를 지나자 한 평 정도 되는 빈 장소가 나타났다.
낯익은 공간은 두 달 전과 똑같았다. 바닥에 떨어진 깨진 거울마저.
“…….”
리체는 최대한 거울과 떨어져 후다닥 벽으로 뛰어갔다.
“계약자, 여기야.”
먼저 뛰어간 파이톤스가 대리석 바닥을 짚었다. 별 조각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훈련의 성과가 있었는지, 리체는 정확히 파이톤스가 말한 깊이만큼의 구멍을 뚫었다.
그 속으로 들어간 파이톤스는 비실대는 몸으로 기어코 별 조각을 찾아냈다.
새하얀 백색의 돌이었다. 파이톤스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운이 좋은데?”
“왜?”
궁금해하는 리체에게 파이톤스가 설명했다.
별 조각의 색은 특성에 따라 결정되는데, 하얀색은 보통 치유나 수복과 관련이 있는 색이었다.
“만약 이게 치유의 별이라서 회복 능력까지 갖춘다? 그러면 우리가 제일 강하다, 이 말이지.”
히켄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파이톤스는 악당처럼 웃었다. 지금만큼은 다람쥐 모습의 파이톤스가 전투의 신이라는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사용하는 거야?”
“내 힘 사용할 때랑 비슷해. 몸에 지니고 능력을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별 조각의 고유 능력이 발현되는 거지. 잘하면 능력이 한 개 이상인 것도 있고. 일단은 무슨 능력인지 알아야 하니까 한번 해 봐.”
“응.”
리체는 파이톤스에게 건네받은 별 조각을 손에 쥐었다. 뚫린 바닥을 향해 능력을 사용하려고 해봤지만.
“되는 거 맞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흠. 파이톤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별 조각을 손에 쥐었으니, 뭐라도 일어나야 했다. 터지든 폭발하든.
비틀거리며 주변을 관찰하던 파이톤스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어!”
파이톤스가 리체의 뒤쪽으로 뛰어갔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긴 리체가 움찔 몸을 굳혔다.
“이거네!”
신이 난 파이톤스가 만지고 있는 건 문제의 그 거울이었다.
바닥에 떨어트려 깨트린. 하지만 거울은 언제 그런 적이 있냐는 듯 멀쩡했다.
“그, 그거?”
“이야, 이거 봐! 복구 능력인가 봐! 치유 능력은 없나? 중간급 힘이면 특성 두 개 정도는 가지고 있는데.”
복구 능력의 별 조각. 분명 좋은 일인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거울에서 누군가 말을 할 것만 같았다.
리체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파이톤스의 기분에 맞장구쳤다.
그래도 다행인 건, 지금까지는 거울이 잠잠하다는 점이었다.
“계약자, 앞으로 명중률 높이는 훈련도 해야겠어. 목표물은 바닥이었는데 엉뚱한 거울이 복구가 돼버렸잖아?”
그때였다. 벌컥, 하고 문이 열리더니 도서관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야.”
데온이었다. 파이톤스는 재빨리 입을 다물고 리체의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오빠?”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심각한 얼굴이지.
성큼성큼 리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온 데온은 리체를 팔을 붙들고 말했다.
“피해.”
* * *
“도련님께서는 조금 늦으신다고 합니다.”
“음. 그래요?”
로드윅 공작가의 응접실.
집사인 폴이 소파에 앉은 로벤하프에게 데온의 말을 전했다.
기다린 시간이 벌써 삼십 분을 넘었지만,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데온이 바로 나타나 자신을 반겨줄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고.
‘데르케디온. 이건 예상 못 했지?’
로벤하프는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3일 전, 아버지인 히베츠만 공작이 로드윅 공작가를 방문한다기에 냉큼 따라나섰다.
그 과정이 수월하지는 않아 혹이 붙기는 했지만.
“오빠, 나 심심해.”
로벤하프의 옆에 앉아 발을 앞뒤로 흔들며 투덜거리는 여자애가 있었다.
옅은 푸른색의 눈이 새침했다. 긴 분홍색의 머리칼이 발을 따라 흔들렸다. 리본이 잔뜩 달린 드레스를 입은 이 아이는, 올해로 여섯 살인 히베츠만 공작가의 금지옥엽 막내딸. 릴리 히베츠만이었다.
그리고.
“형아! 나 강아지 키워도 돼? 어?”
릴리와 똑 닮은 얼굴을 한 남자아이가 응접실 안으로 달려오며 소란스럽게 로벤하프를 불렀다. 릴리의 쌍둥이인 로터스 히베츠만.
무서울 게 없는 공작 가문의 위세를 업고 당당하게 철부지로 자란 제 동생들은, 자신들이 못할 게 없는 줄로만 알았다.
“오빠! 듣고 있어? 나 심심하다구우!”
“형아, 어?”
지금도. 떼를 쓰면 뭐든 되는 줄 알고 자신을 닦달하고 있지 않은가.
두 동생 사이에 낀 로벤하프는 입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고막에서 피가 나는 것 같았다.
이래서 쌍둥이를 데리고 오고 싶지 않았는데.
할머니와 어머니의 작전을 눈치채지 못한 제 불찰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게 어디야. 이번에야말로 확인만 하면 돼.’
로벤하프가 끈질길 정도로 로드윅 공작성에 들어오려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단순히 그때 만난 은발의 여자아이가 눈에 밟혀서보다는,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종소리가 들리고, 볼이 화끈거리는 것이 자신이 병에 걸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그 애를-.
“형아, 들었어? 어? 나 강아지 키워도 돼?”
중요한 대목을 로터스에게 방해받았다.
로벤하프는 살짝 올라오려는 짜증을 꾹꾹 누르며 제 동생에게 물었다.
“……강아지라니. 그런 게 어딨다는 거야.”
“여기!”
그러다 로터스가 옷 아래에 숨겨 데려온 강아지의 정체에 놀라 입을 떡 벌렸다.
‘지크베르트 세르디야?! 왜 여기에 있어?’
작년 사냥제에서 만난 적이 있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뭐야? 귀여워!”
“귀엽지? 정원에서 주웠어!”
“로터스. 얘 나 줘.”
“싫어. 내 거야.”
“나 줘어!”
로벤하프는 순간 여기가 현실인지를 의심했다.
제 동생들에게 인형처럼 조몰락거림을 당하는 지크베르트라니.
다리의 붕대가 눈에 띄었다. 어디 다친 건가?
로벤하프는 유심히 지크베르트의 상태를 살피다, 그의 녹안과 눈이 마주쳤다. 이럴 때가 아니지. 일단 저 철딱서니 없는 애들한테서 쟤를 구해야 한다.
로벤하프는 쌍둥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희들, 진정하고. 걔 나한테 줘.”
“싫어.”
“우리 거야.”
이럴 때만 죽이 척척 맞지. 설득으로 지크베르트를 넘겨받으려고 했으나, 쌍둥이의 고집이 만만찮았다.
철이 일찍 들었지만 로벤하프도 아직 아홉 살이었다.
몇 번의 실랑이는 애들의 장난감 싸움처럼 번져버렸다.
“달라니까-.”
로벤하프가 쌍둥이의 품에서 지크베르트를 잡아 힘껏 당겼다. 아물고 있는 상처 부위가 눌려 지크베르트가 깽! 하고 큰 소리를 냈다.
“들개야!”
응접실로 리체가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데온이 리체의 뒤를 따라 들어오며 고갯짓으로 지크베르트를 가리켰다.
“저기에 있네. 너는 왜 저걸 찾아야 한다고 난리야. 없어지면 그냥 두면 되지.”
“다쳤잖아.”
“흥. 같은 개라고 신경 쓰이냐?”
“……오빠, 리체 그만 말하고 싶은데.”
로벤하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로드윅 남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정확히는 리체에게서였다.
“안녕하세요.”
리체는 히베츠만의 세 남매에게 마담 미셸에게 배운 인사를 했다.
반복 학습에 꽤 몸에 익은 동작은, 리체를 어엿한 어린 공작 영애처럼 보이게 했다.
“너 누구야?”
“……귀여워!”
예법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처음 보는 또래 귀족 아이.
쌍둥이의 관심이 순식간에 리체에게로 옮겨갔다.
리체는 반짝거리는 쌍둥이의 시선을 받으며 로벤하프 앞에 섰다.
“…….”
그런 뒤, 지크베르트를 안고 멍하니 서 있는 로벤하프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제 친구예요. 데리고 가도 돼요? 아파서 치료받아야 해요.”
“어? 어…….”
“오빠, 왜 그래?”
“형아, 바보 같아.”
쌍둥이가 으, 하며 뚝딱거리는 로벤하프를 바라봤다. 그 사이, 로벤하프의 손은 착실하게 리체가 달란 대로 지크베르트를 넘겨줬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러다 리체가 지크베르트의 비명 지르는 장면을 목격한 것을 떠올렸다. 오해라고 말해야 해.
“저, 저기, 있잖아!”
“네?”
“그게, 방금은……!”
그런 로벤하프를 가로막는 손이 있었다. 붉은 눈이 로벤하프를 똑바로 바라봤다.
“로벤하프. 내 동생이 입 아프단다.”
“아, 안 아파.”
리체는 데온의 손을 잡아 내렸다. 놀리는 거 같으니까 입 아프다고 한 건 줄 뻔히 알면서, 왜 히베츠만 능력자한테 시비지.
여기에 더 두면 안 되겠다. 데온의 교우관계를 걱정한 리체가 잡은 손을 끌었다.
“가자, 오빠.”
“어? 가는 거야?!”
“우리랑 놀아!”
쌍둥이가 아쉬워하며 리체를 잡았다가, 데온과 눈이 마주치곤 슬쩍 손을 놓았다. 무서울 게 없는 쌍둥이에게도 로드윅은 예외였다.
리체는 또 보자며 인사를 한 뒤, 응접실을 나섰다. 손을 붙잡힌 데온이 순순히 끌려갔다.
로벤하프는 점점 멀어져가는 리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리체의 손에 잡힌 데르케디온 로드윅. 리체의 품에 안긴 지크베르트 세르디야.
“……”
나도, 능력자인데.
왜인지 모르게 억울했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능력자, 이안드웨인 게르웨르를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을 정도로.
* * *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요.”
무엇을 들었냐는 게르웨르 공작의 물음에, 이안은 그렇게 답했다. 하지만 게르웨르 공작의 혜안 앞에서는 부질없는 것이었다.
같은 능력자인 이안이 르티옴의 정보를 엿들었다. 거기에 화가 난 공작은 이안을 가뒀다.
호화로운 방에 지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저택 내의 창고에 가두라 명했다.
죽은 게르웨르 공작부인의 유품이 있는 창고였다.
이안은 바닥에 앉아 제 앞에 있는 거울을 바라봤다. 능력을 사용하고 보아도 거울은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은 그 고요함에 위안을 얻었다.
마치 제 어머니 같았다. 안락의자에 앉아 가만히 제 말을 들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다정한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제가 싫으신가 봐요.”
이안은 말을 걸듯 거울을 향해 중얼거렸다.
게르웨르 공작부인은 이안과 같은 병을 앓았다. 죽기 전날까지 그녀는 하루에 한 번, 약을 먹었다. 지금 이안이 먹는 것과 같은.
“저도 곧 거기에 갈 수 있을까요?”
고작 여덟 살의 아이는, 삶의 의욕을 잃었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알지 못했다. 한때는 죽고 싶지 않다며 소리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벽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아무에게도 닿지 않는. 이제는 메아리로도 돌아오지 않았다.
크고 작은 좌절들이 찾아왔다. 어느 순간부터는 일어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자 모든 게 무뎌졌다.
이안은 언젠가 저도 어머니처럼 아버지의 곁을 떠나리라 생각했다.
“…….”
이안은 무릎을 세우고 올린 팔에 얼굴을 기댔다. 잔기침이 계속해서 나왔다.
게르웨르 공작의 화가 풀리려면 이틀은 더 있어야 할 터였다. 그때까지는 마실 것도, 먹을 것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이안은 몇 시간을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다.
[부족해. 부족해.]
그런 그를 깨운 건, 누군가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