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늑대처럼 생겼을 줄 알았지
‘무슨 소리지?’
이안은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창고는 인기척이 없이 조용했다.
[그래도 바닥은 복구됐잖아.]
이번엔 여자아이.
뇌리에 남은 목소리에 이안은 곧장 시선을 한 곳으로 옮겼다. 거울이다.
여전히 검어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누군가의 그림자 속에 있는 것이다. 이안은 거울의 테두리 근처에서 흔들리는 그림자의 경계를 바라봤다. 밑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구도였다.
그림자의 주인이 움직이며 살짝 보이는 얼굴이 다람쥐를 닮았다.
다람쥐가 거울과 이어진 무언가를 밟고 서 있는 듯했다.
‘그때 그 다람쥐다.’
몇 달 전, 거울에서 본 다람쥐였다. 처음에 본 뒤로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가끔 거울을 찾았었는데. 번번이 볼 수 없었다.
이번에는 보는구나.
이안은 반가운 마음이 들어 거울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다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했다.
[복구 능력만으로는 부족해. 치유 능력은 안 되나? 최면 능력도 좋은데. 그 녀석, 일주일 넘게 안 나타나는 걸 보니까 인간계 부작용으로 다시 잠든 거 같아. 사념체도 못 꺼낼 정도로. 별 조각에 최면 능력이 있으면 영원히 잠들게-.]
“다람쥐가 말하고 있어.”
앗,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거울 건너편이 조용했다.
[나, 나 갈래.]
여자아이의 떨리는 목소리와, 걸어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숙인 다람쥐가 잠시 아래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여자아이를 향해 소리쳤다.
[같이 가!]
“자, 잠시만……!”
다람쥐의 발이 거울에서 멀어진다. 이안은 다급히 말을 걸었지만, 거울은 이전처럼 돌아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안은 아쉬움에 허공에 뜬 손을 그러쥐었다. 잡히지 않는 공기만이 그의 손을 빠져나갔다.
[저기, 그쪽에 있어……?]
거울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 건,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뒤였다.
* * *
리체가 거울 속 이안에게 말을 걸기 하루 전.
리체는 블레이크와 그림책을 읽은 후, 마담 미셸의 수업에 가기 위해 서재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다리가 완전히 나은 지크베르트가 리체의 옆에서 졸졸 쫓아오고 있었다.
‘어린애?’
[그렇다니까.]
그런 지크베르트를 의식해, 리체는 머릿속으로 파이톤스와 대화했다. 주제는 오늘 오전, 바닥을 복구하러 간 도서관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거울 속에 어린애가 있었어. 그 자식을 닮은 눈을 가진 애가.]
파이톤스는 털을 부풀렸다.
금안을 가진 어린애가 거울 유령의 정체였다는데, 리체에게 말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별은 아니야?’
[아니야. 그 자식이었으면 봤을 때 바로 알았을 텐데. 아무런 느낌도 안 났거든. 그냥 금색 눈을 가진 어린애일 수도 있겠지만, 평범하진 않았단 말이지. 그러니까 다음에는 네가 봐봐. 능력자인 거 같아.]
“…….”
리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긴장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파이톤스가 어린애를 목격했다고는 해도, 거울 속의 정체 모르는 존재가 무서운 건 마찬가지였다.
파이톤스는 그런 리체의 어깨 위에 올라갔다.
어젯밤은 보름달이 뜨는 밤이었다. 호숫가를 다녀온 덕에 파이톤스는 지난번 히켄카와의 전투에서 쌓인 기운을 풀어 쌩쌩했다.
[그런데 얘는 말 못 하나? 얘가 진료실에서 그 녀석이 너한테 르티옴이라고 한 걸 들었잖아. 누구한테 말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옆에서 걷는 지크베르트를 말한 것이었다.
사실 리체도 그 부분이 걸렸다.
분명 하켄카와 자신의 대화를 들었을 텐데.
그날에 관해 돌려서 물어보면, 지크베르트는 늑대 울음소리를 몇 번 내는 것 외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려서 르티옴이란 걸 모르나?]
파이톤스의 말도 가능성이 있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수인화 상태로 지내면 다른 귀족 자제들처럼 상식 같은 것을 교육받을 수도 없었을 테니.
마담 미셸이 그러지 않았는가. 세르디야의 능력자는 아홉 살 정도부터 능력이 안정화를 찾고 사람의 모습으로 지낸다고.
그 뒤로는 그동안 보고 들은 것을 이용해 빠르게 성장한다고 했다.
“…….”
리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마물의 숲에서 만났을 때 입은 상처가 다 나았으니, 지크베르트는 곧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
‘지금처럼 셋이서 있는 일이 당연해지지 않겠지?’
진료실 사건 이후, 리체의 주변에는 호위가 한 명 이상은 숨어 있었다. 블레이크의 명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 할 대화는 아무도 들어서는 안 된다.
리체는 파이톤스의 인지 조작 능력으로 존재감을 낮춘 뒤, 지크베르트 앞에 쭈그려 앉았다.
“지크베르트.”
“……컹.”
꼬리를 흔들던 지크베르트는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녹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하듯 작게 소리를 냈다.
“나는 네 정체를 알아. 너도 내가 누군지 아니?”
[오호, 돌직구.]
파이톤스가 리체가 하려는 것을 짐작하고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직접 묻겠다 이거지?
지크베르트는 꼬리를 축 내렸다. 리체의 눈치를 보듯 양 귀도 뒤로 젖혀졌다.
“아는 거야?”
“끼잉.”
리체는 지크베르트에게 재차 물었다. 하지만 늑대의 말을 모르니 행동으로 짐작만 할 뿐이었다.
[내가 협박해서 물어봐 줄까? 그건 자신 있는데.]
파이톤스는 없는 옷소매를 걷어붙이는 시늉을 했다. 리체는 그런 파이톤스를 주머니에 넣고 지크베르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크베르트. 난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혹시 내 정체를 알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줄래?”
“컹.”
지크베르트의 내려간 꼬리가 살랑였다. 알아들은 건지. 지크베르트의 생각을 알 수 없었지만, 리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리체는 다시 걸음을 옮겨 수업을 듣는 서재로 향했다.
다리가 나은 뒤, 지크베르트는 홀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듯했다.
자신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 앞에서만 모습을 보여줬는데, 주로 리체의 앞이었다.
“수업을 시작할까요?”
오늘도 지크베르트는 마담 미셸이 서재로 들어오기 전에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수업이 끝나면 자연스레 나타날 거라 생각했지만.
“어라?”
미셸이 돌아가고, 교재를 정리한 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온 리체는 텅 빈 복도를 둘러봤다.
[얘 어디 갔대?]
파이톤스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있어야 할 지크베르트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
[아까 한 얘기 때문에 겁먹은 거 아니야? 너도 르티옴인 걸 들키기 싫어했잖아. 걔도 지크베르트란 걸 들키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협박하는 것처럼 들렸을까?’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늑대에게 제 비밀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달라 부탁하는 것은 이상했으니. 먼저 지크베르트의 정체를 안다고 고백한 건데.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리체는 복도를 걸으며 걱정에 잠겼다.
[계약자, 너무 신경 쓰지 마. 그 정도로 도망간 거면, 네 정체를 밝힐 배짱도 없을걸.]
‘그것 보다는……. 내가 지크베르트를 무섭게 한 것 같아서-.’
탁.
걸어가는 리체의 팔을 누가 잡았다.
깜짝 놀라 옆을 보니 성안 대장장이 조수들의 옷을 입은 아이였다.
옷이 큰 탓에 소매와 바짓단을 접어 올렸으나 리체보다는 키가 컸다. 데온과 비슷한 체형의 남자애였다.
“누구……?”
리체는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가, 이내 소년의 정체를 알아봤다.
가슴께에 익숙한 검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
지크베르트의 인간화. 리체는 놀랐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처음 본 소년을 지크베르트라 한눈에 알아차리는 것은 이상했으니.
아직 지크베르트에게 자신이 르티옴이라 말한 것은 아니었기에 조심하는 편이 좋았다.
대신 가만히 주변에 인지 조작을 사용했다. 존재감을 옅게 만들어 아무도 대화를 듣지 못하도록.
[누구야? 머리카락 색이 늑대랑 비슷한데?]
‘지크베르트야.’
[뭐야. 꽤 생겼잖아?]
파이톤스가 재미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늑대처럼 생겼을 줄 알았는데, 그냥 사람이네.
묵묵한 인상의 잘생긴 아이였다.
갈색 피부, 쉬이 열릴 것 같지 않은 굳게 다문 입술, 곧은 콧대, 쌍꺼풀 없는 고요한 눈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로 가득한 녹음을 닮은 눈동자가, 리체를 바라봤다.
“우리, 친구야?”
지크베르트가 물었다. 차분한 음색이었다.
단어 단위로 말을 끊는 것이, 아직 소리 내어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지크베르트야?”
리체는 일부러 확인하는 듯이 물었다. 지크베르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체는 그제야 지크베르트를 알아본 듯 놀란 척을 했다. 티가 났지만 지크베르트도, 리체도 그런 쪽에 둔한 탓에 어색한 것을 느끼지 못했다.
데온이 왜 너희들보고 동족이라 했는지 알겠다며 파이톤스가 놀려댔다.
리체는 그런 파이톤스를 무시하고 말했다.
“응. 친구지.”
리체의 말에 일자로 다문 지크베르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친구. 그 단어가 신뢰를 준 모양이었다.
지크베르트는 느리지만 또박또박한 말투로 리체에게 말했다.
“오래, 못 있어. 익숙하지, 않아서.”
“이 모습으로 오래 못 있는다는 거지? 늑대 모습이 편한 거야?”
리체가 말을 풀어서 되묻자, 지크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리체를 찾은 목적을 말했다.
“친구니까 말 안 해. 내가 본 거, 들은 거, 아는 거…….”
리체와 지크베르트의 눈이 마주쳤다. 흔들림 없는 녹안과 달리 은빛의 눈에는 긴장이 어렸다.
처음으로 능력자에게 자신이 르티옴이라는 걸 밝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에 놓였다.
불안함. 지크베르트가 알면 세르디야 공작이 알고,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게르웨르 공작마저 알지 않을까.
솔직히 제일 두려운 건 블레이크와 데온이 아는 일이었다.
“그동안 날 속였구나.”
“……이래서 인간이 싫어.”
자신이 르티옴인 걸 숨기고 있었다는 걸 알아도, 두 사람은 여전히 자신을 가족으로 생각해줄까.
세르디야의 능력자는 감각이 예민했다. 리체의 빨라진 숨소리와 조금 높아진 체온을 알아차린 지크베르트가 말했다.
“맹세, 할 수 있어.”
곧고 거짓 없는 눈동자. 지크베르트는 리체의 모습을 제 눈에 새기듯,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긴장한 걸 들켰구나.
“미안. 내가 널 못 믿은 건 아닌데……. 지크베르트, 그러면 나랑 약속할래?”
“약속. 응.”
무슨 약속인지도 모르면서 고개부터 끄덕인다.
순간 리체는 늑대 모습이었을 때의 지크베르트가 생각나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
“앗.”
“?”
그러다 제 행동을 인지하고 손을 멈췄다.
자연스레 리체의 손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던 지크베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야.”
어려도 세르디야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한 살 어린 제가 이런 식으로 머리를 쓰다듬는 건 기분 나빠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지크베르트는 도리어 왜 멈추냔 듯이 머리를 가져가 리체의 손바닥에 비볐다.
눈을 살짝 감고 그르릉거리는 모습이 늑대였을 때를 똑 닮아, 리체는 그만 웃고 말았다.
말랑해진 분위기 속에서 리체는 약속 내용을 꺼냈다.
“우리는 친구니까, 앞으로 서로의 비밀은 지켜주는 거야.”
“응. 평생?”
“평생.”
“좋아.”
지크베르트에게서 보이지 않는 꼬리가 붕붕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옷은 어디서 구한 거야?”
“빌렸어.”
“말하고?”
지크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옷을 돌려주러 가겠다며 창문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한시름 놓았네?]
‘응.’
지크베르트는 말하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굳게 들었다.
다시 복도를 걷던 리체는, 무언가를 느끼고 몸을 돌려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왜, 왜 그래? ……젠장. 달려! 계약자!]
그런 리체의 모습에 어리둥절했던 파이톤스 또한 다급히 태세를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