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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25)화 (25/89)

25화 이제 어떻게 할래?

“헉. 헉.”

인지 조작 능력으로 존재감을 낮춘 리체가 도착한 곳은, 로드윅 공작성의 탑 앞이었다.

강도가 높은 광물로 쌓아 올린 외벽, 창문이라고는 어린아이 주먹만 한 구멍이 전부인 탑. 탈출하기 어렵기로 소문난 로드윅 가의 감옥이었다.

‘필립한테 또 들어간 거야.’

리체는 숨을 몰아쉬며 탑을 올려다보았다. 

히켄카의 기운이 이곳에서 감지됐다. 감옥에 갇힌 필립에게 빙의한 게 분명했다.

[너 이래도 돼?]

파이톤스가 황당한 목소리로 리체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 괴물 같은 계약자가 또 괴물 같은 짓을 저질렀다. 

[나보다 더 빨리 별의 기운을 탐지하다니. 너 정말 이래도 되냐고.]

별의 탐지는 파이톤스가 가진 특성 중에서도 가장 고유성이 강했다.

그 능력만큼은 자신보다 뛰어난 별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아무리 자신과 계약을 맺었다지만, 인간이 그 능력을 몸에 두른 것처럼 상시 사용하고 자신보다 빨리 별의 존재를 느낀다고?

[너 진짜 수상해. 인간 맞아? 별 아니야? 호구가 몰래 자식을 낳았나? 그게 너야?]

파이톤스는 리체의 머리 위에 찰싹 붙어 정체를 밝히라며 채근했다.

그런 헛소리를 무시한 리체는 탑의 자물쇠를 파이톤스의 능력으로 부수고 문을 열었다.

[허, 이제 그냥 막 사용하네? 그래, 다 갖다 써라. 갖다 써. 내 능력이 네 능력이고 네 능력이 내 능력이지 뭐.]

바로 옆에 선 경비병 때문에 심장이 콩닥거렸지만, 그는 리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쩍 입을 벌리며 하품했다.

자물쇠는 나올 때 복구하면 될 터였다. 리체는 부서진 자물쇠에 인지 조작을 걸고 안으로 들어갔다.

리체와 파이톤스는 느껴지는 기운을 따라 시선을 위쪽으로 향했다.

‘파이톤스.’

[응. 저쯤이네.]

가운데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뻥 뚫린 탑은, 일정 간격의 높이를 두고 층이 나 있었다. 

리체는 탑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갔다.

탑의 안쪽 둘레를 따라 설치된 창살이 달린 감옥들이 보였다.

모두 비어 있는 감옥이었다. 한 곳을 제외하고는.

“큭, 큭.”

3층의 계단과 가까운 감옥. 리체가 그 앞으로 걸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물쇠가 걸린 창살 너머의 감옥 속 침대. 거기에 필립이 앉아 있었다.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저렇게 있는 것을 보아하니.

“히켄카죠?”

필립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금빛의 오른쪽 눈이 리체를 응시했다. 그는 눈가를 접으며 환한 미소로 리체를 맞이했다.

“왔구나. 르티옴.”

“…….”

리체는 말없이 그를 노려봤다.

피식 웃은 하켄카가 몸을 일으켰다. 파이톤스는 리체의 머리 위에 앉아 히켄카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왜 또 왔어? 얘 임자 있다고 했지? 괜히 힘 빼지 말고 무덤에 돌아가서 잠이나 자버려. 나랑 한 계약은 절대 해지 못 하니까.”

“그깟 계약. 널 잠들게 해버리면 끝나는 거 아닌가?”

“허, 네가 잠들게 해? 누굴? 날?”

파이톤스는 기가 차 콧방귀를 뀌었다.

저 애송이가. 한창 현역인 저한테 뭘 해?

파이톤스는 창살 바깥에서 주먹을 휙휙 날렸다. 허공을 가르기만 하고 전혀 히켄카에게 닿지 않는 주먹이었다.

“아니면.”

히켄카는 창살 바로 앞에서 우뚝 섰다. 그는 쪼그려 앉아 리체에게 얼굴을 가까이하며 속삭였다.

“르티옴을 꼬셔서 널 버리고 나와 계약하게 만들어도 되고.”

“안 할 거예요.”

리체는 날이 선 말투로 말했다. 명백히 적을 대하는 모습에 파이톤스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금 더 생각해봐. 넌 아직 어리고 남은 인생은 많으니까. 나는 참을성이 강하니 기다려줄 수 있어. 나와 계약하면 세상을 네게 쥐여주지. 명예, 재물. 또 뭘 원하지? 복수? 정복?”

“계약자. 저 말 믿지 마. 혓바닥이 긴 놈이야. 아주 교활한 뱀 같다니까.”

파이톤스는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히켄카를 경계했다.

리체 또한 히켄카의 말을 믿지 않았기에,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원하는 것도 없고 당신이랑 계약할 일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세요. 다시는 오지도 말고요.”

히켄카는 자신을 똑바로 보며 말하는 리체를 바라봤다.

이번 대의 르티옴은 아주 깜찍하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삼켜버리고 싶게.

히켄카는 창살 밖으로 손을 뻗었다. 빠른 속도로 리체에게 향하는 손을 파이톤스가 걷어찼다.

“어딜……!”

“파이톤스!”

하지만 히켄카가 노리는 것은 리체가 아니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의 궤도를 바꿔 파이톤스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다시 창살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젠장!”

“그 파이톤스가 다람쥐가 되어 내 손에 잡힌 꼴이라니. 몇백 년 전이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인데. 그렇지?”

파이톤스는 히켄카의 손아귀에서 버둥거렸다. 히켄카는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이톤스의 몸이 축 늘어졌다.

미동 없는 파이톤스의 머리 위로 반딧불 같은 둥근 빛 하나가 떠올랐다.

리체가 창살을 붙잡고 소리쳤다.

“파이톤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별 건 아니야. 파이톤스의 정신을 뽑아 사념체로 만들었지. 예쁘지 않아? 내 고유특성이지.”

히켄카는 품속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 둥근 빛을 가뒀다. 

파이톤스의 사념체는 성질을 부리듯 날뛰었지만, 유리병에 아무런 충격도 가하지 못했다.

“돌려줘!”

파이톤스를 구해야 했다. 리체는 감옥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물쇠를 부수려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파이톤스의 힘을 사용할 수 없었다. 

“왜…….”

히켄카는 당황한 리체에게 유리병을 흔들었다.

“힘이 안 써지지? 이게 그냥 유리병처럼 보여도 네 세계와의 간섭을 차단해주는 물질이거든. 네가 파이톤스와 한 계약이 유효한 것과 별개로, 너는 파이톤스의 능력을 사용하지 못해.”

“……원하는 게 뭐야.”

리체는 히켄카를 노려봤다. 그 눈빛이 마음에 드는지, 히켄카는 웃으며 리체에게 말했다.

“르티옴. 나랑 거래하자.”

“……거래?”

“유리병 속에 오래 있으면 파이톤스는 별 조각은 안 돼도 힘을 잃고 잠들어버려. 강제로 무덤으로 돌아가서 몇백 년 동안. 구하고 싶지? 네 소중한 별이잖아.”

그 말에 파이톤스의 사념체가 담긴 유리병을 보는 리체의 눈이 흔들렸다.

“내 부탁을 두 개 들어주면 파이톤스를 원래대로 돌려주지. 그리고 나는 네가 성장할 동안 로드윅 가에 다시는 오지 않을게. 어때?”

“……네 말을 어떻게 믿어?”

리체는 히켄카를 경계하며 질문했다. 머릿속이 파이톤스를 구할 방법을 찾느라 복잡했다.

파이톤스가 히켄카의 몸은 아직 잠들어 있다고 했으니, 지난번처럼 필립의 몸에 오래 빙의해있지는 못할 것이다.

‘빙의가 풀렸을 때를 노리면 돼.’

블레이크나 다른 이들에게 감옥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면 된다. 그런 뒤, 파이톤스의 사념체가 담긴 유리병과 다람쥐의 몸을 가져오면.

‘그러면 파이톤스를 구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어진 히켄카의 행동에 리체는 숨도 못 쉴 만큼 놀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유리병은, 히켄카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정확히는 필립의 입 속으로.

꿀꺽.

파이톤스의 사념체를 삼킨 히켄카가 절망에 잠긴 리체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래? 르티옴.”

* * *

“하암-.”

로드윅 감옥 앞을 지키는 보초병은 슬금슬금 찾아오는 졸음을 쫓으려 하품했다.

그냥 가둬만 둬도 나오지 못하는 감옥이다. 하나밖에 없는 수감자를 위해 이렇게까지 보초를 서며 감시해야 싶었지만.

그 수감자가 리체 아가씨를 공격한 괴한으로 지목된 범인이니.

“진짜 필립 녀석이 한 짓이긴 하나……?”

그래도 이상하긴 했다. 공작님께 이름을 받은 녀석이다.

12살에 들어와 견습 기사로 5년을 구르다, 드디어 기사 서임을 받게 되었다고 좋아하던 녀석인데.

평소의 필립을 생각하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주변에서도 믿기 힘들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당사자는 아직 깨어나질 못하고 있는 데다가 목격자까지 있으니 어떻게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보초병은 딱한 눈으로 필립이 갇힌 탑을 바라봤다.

“어……?”

그러다 제 옆의 탑 입구를 보고 심장이 철렁했다. 

쇠 빗장에 걸려 굳게 잠겨 있어야 할 자물쇠가 두 동강 나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이, 이게 왜.”

식은땀이 흘렀다. 누군가 자물쇠를 부수고 침입했나. 

하지만 자신은 아무도 보지 못했는데. 한 번도 자리를 뜬 적이 없었다. 몇 번 하품하긴 했지만 존 적도 없었고.

“피, 필립!”

보초병은 허겁지겁 문을 열고 탑의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3층, 필립의 감옥까지 단숨에 달려간 그는, 감옥 안을 확인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필립은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목 날아갈 뻔했네.”

기사는 십 년은 늙은 심정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한편, 그 틈을 타 작은 인영이 탑을 빠져나왔다.

리체였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자물쇠를 별 조각으로 복구시키고, 축 늘어진 파이톤스의 몸을 안은 채 훌쩍이며 길을 걸었다.

“리체?”

그러다 놀란 목소리가 리체를 불러세웠다.

블레이크였다.

“아빠.”

“왜 혼자 걷고 있지? 왜 울고 있어.”

블레이크는 리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딸의 눈물진 뺨을 닦아줬다.

“…….”

그 손길에 리체의 훌쩍임이 커졌다. 눈물이 차오른 그녀의 눈에 블레이크의 옴이 보였다.

그동안 블레이크에게 들키지 않게 조금씩 정화하는 양을 늘려왔다. 얼마 전부터는 이틀 정도의 옴을 정화할 수 있게 되어, 쌓인 옴의 양이 점점 줄기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 블레이크의 안색은 점점 건강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파이톤스가 없어진 지금.

블레이크의 정화를 혼자서 할 수 있을까. 

“죽고 말았겠지. 르티옴의 힘은 심장에서 뻗어 나오는 것이니까. 네 몸속으로 들어간 내 저주의 기운이 네 심장을 터트렸을 거다.” 

지난 생에서 게르웨르 공작은 자신이 9살이 되기까지 기다렸다.

이번 생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혼자서 블레이크를 정화하려면 적어도 2년이 있어야 했다. 그래야 심장이 터지지 않을 테니. 하지만 블레이크의 삶은…….

[이대로 놔둔다면 2년이다.]

히켄카의 부탁은 3년 뒤에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2년 뒤에는 블레이크나, 자신.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럴 줄 알았으면 자유를 꿈꾸지 말 걸 그랬다.

그냥 자신이 르티옴인 걸 밝히고 모조리 정화해 버릴걸. 

그러면 게르웨르 공작에게 잡혀갈지언정 아빠만큼은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아니면 처음 시장에서 만났을 때 블레이크의 옴을 정화해 버릴 걸 그랬다. 자신이 블레이크에게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을 때.

그랬더라면 제 죽음에 아빠가 슬퍼할 일도 없었을 텐데.

“아빠, 죄송, 끅, 죄송해여…….”

가슴이 미어질 듯했다. 리체는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어버렸다.

블레이크는 처음 보는 딸의 눈물에 당황해 리체를 품에 안고 울음이 잦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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