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26)화 (26/89)

26화 가족이라서, 미안해

로크샤 제국에는 황립 아카데미가 있었다.

초대 황제가 직접 설립해, 귀족들만 입학할 수 있는 명문 아카데미.

그곳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총장은, 지금 진땀을 뺐다.

“각하.”

총장의 맞은편에 앉은 현 로드윅의 가주, 블레이크 로드윅 공작.

차를 마시는 것을 보는 것뿐인데도 왠지 모를 긴장감이 감돌았다.

“여기까지 친히 방문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총장은 허허 웃으며 말을 걸었다. 재킷과 셔츠 아래 등줄기에는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가업 특성상, 로드윅의 가주들은 공식적인 자리 외에는 공작성 밖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블레이크 로드윅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드물면 2년 전, 아들인 데르케디온 로드윅의 입학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을까.

무려 수석 입학으로 전교생 앞에서 연설까지 하는 자리였는데.

‘히베츠만 공작과 세르디야 공작께서는 아들들의 입학식에 참석했지.’

그렇다고 블레이크 로드윅이 아들에게 매정하다, 라는 건 아니었다.

그 시기에 맞춰 데르케디온을 잘 부탁한다며 서신과 기부금을 보내왔으니.

자식에 대해 매정한 건 오히려 게르웨르 공작 쪽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안드웨인 게르웨르가 작년에 입학했음에도 방문은커녕, 형식적인 서신 한 통 하나 없었다. 

어찌 됐든. 

그건 게르웨르 공작의 경우고.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건 로드윅 공작이었다.

“작년 학년말 평가도 데르케디온 학생이 일등을 차지했지요.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이었지만, 명색이 총장인 제가 하는 학부모 면담이었다.

총장은 노련하게 대화 주제를 꺼냈다.

데르케디온이 똑똑한 학생이어서 다행이었다. 적어도 자식 성적으로 로드윅 공작과 껄끄러워질 일은 없을 터였다.

블레이크는 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들의 능력이 좋은 덕분이지.”

올해로 35세. 

총장보다 어린 나이지만, 공작의 하대는 스스럼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 로드윅 공작이 존대할 사람은 로크샤 제국 내에 황족들뿐이니.

“공녀께서도 다음 주에 입학하시지요? 입학시험 때 보았는데, 참으로 귀여운 분이더군요. 성적도 훌륭하시고요.”

총장은 한 달 전, 면접실에서 봤던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외모가 상당히 출중한 아이였다. 

어깨까지 오는 은색 단발에 초롱초롱한 은빛 눈망울을 가진.

저보다 훨씬 나이 많은 면접관들 앞에서 기 하나 죽지 않은 채, 야무지게 대답하던 모습이란.

‘로드윅이 명문가이긴 하다니까. 평민을 입양해서 그렇게 훌륭한 귀족 영애로 키워내다니. 3년 정도 되었나?’

더군다나 사람의 마음을 끄는 재주가 있어, 그 짧은 사이에 자신을 비롯한 면접관들의 호감을 얻었다.

면접이 끝난 뒤에도 아이는 종종 그들의 대화에 등장하곤 했다.

“배움이 빠른 아이지. 가진 자질도 훌륭하고.”

찻잔을 내려놓은 블레이크는 꼰 다리 위에 깍지 낀 양손을 올렸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 말을 멈춘 것이었으나,

‘갑자기 왜 대화를……?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주, 죽는 것은 아니겠지.’

로드윅의 능력을 두려워하는 총장의 머릿속은 오로지 자신의 생사여 부로만 채워졌다.

심장이 떨려 제대로 제대로 마주 볼 수 없었다. 총장은 슬쩍 눈길을 아래로 내렸다.

“총장.”

“네, 네!”

그러다 블레이크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허리를 세웠다. 공작의 뒤쪽에 선 갈색 머리 수행원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내가 오늘 이렇게 찾아온 것은.”

하려는 말을 알 수가 없어 입술이 바짝 말랐다.

총장은 블레이크의 눈치를 보며 그를 관찰했다.

‘안색이…….’

원체 미남인지라,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는 얼굴이지만.

오랜만에 본 로드윅 공작은 유난히 안색이 좋다 못해 윤이 흘렀다.

이상한 일이었다. 능력자들은 그들의 저주 탓에 40세가 가까워질수록 죽음의 빛이 얼굴에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총장이 젊을 때 봤던 전대 로드윅 가주 또한 그러지 않았는가.

하지만 현 로드윅 가주인 블레이크는 몹시도 건강해 보였다.

“……아프네.”

“네?”

블레이크의 말에 총장이 목소리를 크게 했다.

순간 그의 건강이 걱정된 것도 있었지만, 생각하던 것을 들킨 것 같아 뜨끔한 탓이었다.

“어, 어디가 편찮으신 겁니까? 각하?”

“내가 아니고. 딸이.”

“공녀께서 말입니까?”

데르케디온과 달리, 트아리체 로드윅은 아직 입학 전이었다.

황립 아카데미의 학생이 아니니 함부로 말을 낮출 수는 없었다.

‘그 아이가 아프다고?’

면접 때는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하지만 블레이크의 어두워진 얼굴을 보아하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재작년에 크게 앓았네. 딸아이의 몸이 걱정되는데, 아카데미는 기숙제지. 전교생에게, 예외 없이.”

“그러면, 찾아오신 이유가-.”

“맞네.”

설마. 총장의 심장이 덜컹거렸다.

황립 아카데미에서 학생의 대우는 가문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평등했다.

통학이라니. 유례없는 일이다. 

로드윅 공작이 무서워 특혜를 주었다며 학부모들의 항의가 상대적으로 만만한 자신에게 들어올 것이다. 그들도 공작에게 항의할 수는 없을 테니. 

제 총장 자리가 위험해진다. 하지만 어떻게 로드윅 공작의 명령과도 같은 부탁을-.

“딸에게 붙은 수행원이 일주일에 한 번 외출했으면 하는데, 가능하겠나?”

들어드려야지.

그 정도는 편의를 충분히 봐줄 만했다.

실제로 몸이 좋지 않은 학생이 진료받기 위해 외출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니.

가뭄에 내려온 단비 같은 말에 총장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각하.

* * *

블레이크는 교정에 정차된 마차 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재작년 겨울의 일이었다. 

‘…….’

아침, 눈을 뜬 블레이크는 한동안 침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처음 느껴보는 몸 상태가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그의 붉은 눈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때면 깨질듯한 두통이 느껴지곤 했는데, 오늘은 머릿속이 깨끗이 씻겨 내려간 것처럼 맑았다.

그뿐인가. 늘 심장을 짓누르던 통증도, 강한 힘이 온몸을 땅으로 무겁게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도 없었다.

절 옥죄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살아온 날 중 이토록 자유로운 기분이었던 날이 있었는가.

세상이 바뀐 듯했다.

‘지금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군.’ 

몸이 좋아진 걸 느끼니,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딸의 얼굴이었다.

최근 눈에 띄게 나빠진 제 몸 상태를 걱정하고 있지 않았는가.

그럴 만도 했다. 주치의인 클랑이 블레이크에게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하는 편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말할 정도였으니.

빨리 보여줘야겠어. 

옷을 갈아입은 블레이크가 리체의 방으로 가던 중이었다.

안나가 혼비백산하여 제가 내려가는 계단으로 뛰어 올라와 외쳤다.

“가, 가주님! 리체 아가씨가!”

피투성이의 리체가 방 안 침대에서 발견됐다.

온몸이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했다.

고작 8살. 그 작은 몸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피가 나오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피를 토했다.

사경을 헤매는 리체를 클랑을 비롯해 공작성으로 불러들인 의사들이 진찰했다.

하나같이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 정도로 위중한 상태였다.

아카데미 방학을 맞아 공작성으로 돌아오던 데온도, 소식을 듣고 밤낮을 쉬지도 자지도 않고 곧장 달려왔다.

“야! 괜찮아?!”

“…….” 

하지만 의식불명 상태인 리체가 대답할 리 없었다.

로드윅 공작성 전체가 악몽 속에 잠긴 듯했다.

리체가 깨어난 건, 그로부터 일주일이 더 지난 뒤였다. 

눈꺼풀이 올라가고, 나타난 은빛 눈동자에 가장 먼저 블레이크가 담겼다.

리체는 유심히 그를 살피다, 눈가를 살포시 접어 웃었다.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란 말인가.

그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인데.

블레이크는 그날 처음으로 다른 이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 장소에 있던 사람들 중 울지 않은 이들이 없었으니, 부끄러울 일은 아니었다.

“…….”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일이다.

회상하던 붉은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로드윅 공작.

그저 블레이크가 능력자이기에 얻은 자리가 아니었다. 

로드윅의 능력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가주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는 데 필요한 모든 걸 훈련한다.

말인즉슨, 블레이크는 보고 들은 것을 판단할 줄 모르는 이가 아니란 소리였다.

처음 만난 날, 노예상에 팔릴 뻔한 아이.

“게르웨르 공작이 요즘 이상한 행동을……. 노예 시장을 돌아다닌다더군.”

같은 날에 사라진 자신의 옴, 생사를 넘나들 정도로 크게 다친 리체.

“게르웨르 공작이 르티옴이라 중얼거리는 걸…….” 

리체를 입양한 해, 사냥제에서 히베츠만 공작이 한 말을 떠올린 블레이크는 확신했다.

리체다. 그 아이가 자신을 살린 것이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올 줄 뻔히 알면서.

그것도,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사냥제에서 게르웨르 공작이 한 말을 되짚어 보면, 리체는 데온의 옴도 정화한 게 분명했다.

‘면목이 없어.’

그 작은 아이에게 벌써 두 명의 목숨 빚을 졌다.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블레이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장이라도 리체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왜 그랬냐며, 피도 섞이지 않는 자신들에게, 왜.

고마움보다 미안함이 컸다. 그리고 미안함보다 슬픔이 컸다.

아이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제가 그 아이를 입양한 탓인 것 같아서. 

사랑스러운 딸아이를 다치게 만드는 능력자가 가족인 자신들이라는 것이 슬퍼서.

그게 너무나 괴로워 아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싶었다. 그리고 부탁하고 싶었다. 다시는 정화의 힘을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그러나 생각뿐이었다. 리체는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거기에는 그 아이만의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러니 모른 척하는 수밖에.

대신, 딸을 보호해야 할 의무는 아빠인 제게 있었다.

‘게르웨르…….’

재작년까지 꾸준히 로드윅 영지를 몰래 방문하던 게르웨르 공작은, 어느 순간부터 발길을 끊었다.

블레이크가 리체의 대역으로 준비한 아이와 마주한 뒤부터였다.

음침한 꿍꿍이를 숨긴 채, 아이를 본 금안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을 테니.

크게 상심한 게르웨르 공작은 그날로 모습을 감췄다. 주변에 심은 첩자에게 게르웨르 공작이 모든 대외활동을 끊고 고대 유물을 찾아다닌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사실인 듯했다. 작년과 올해 열린 사냥제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니.

“아빠, 저 황립 아카데미 입학시험 보고 싶어요.”

몸이 회복된 리체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블레이크는 허락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게르웨르 공작이 발길을 하지 않는다고는 해도, 이 아카데미에는.

“가주님, 왔어요.”

제드가 마차 문을 두드렸다. 블레이크는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 앞에 반짝이는 금발의 소년이 서 있었다.

교복 옷깃에 단 배지의 색이 파란색이었다. 2학년이라는 의미였다.

마차에서 그를 내려다보던 블레이크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사냥제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군.”

이어, 낮은 목소리가 소년의 이름을 또렷하게 내뱉었다.

“이안드웨인 게르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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