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27)화 (27/89)

27화 곧 만날 수 있어

“너무 안타까워요!”

황도에 마련된 로드윅 가문 소유의 저택. 

내일이면 입학하는 리체를 따라 그곳으로 온 안나는, 안타까움에 몸서리쳤다.

올해로 10살이 된 리체가 무슨 옷이든 제 것처럼 소화했기 때문이었다.

“트라펫 씨가 보내준 옷이 옷장에 한가득한데, 그걸 다 처박아둬야 한다니-. 왜 황립 아카데미는 교복을 입을까요?”

“그러게. 트라펫 씨가 열심히 준비해줬는데.”

리체는 자신도 아쉽다는 듯 눈가를 찡그리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마담 미셸과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리체는 아랫사람에게 말을 놓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반말하는 게 껄끄러워 존댓말을 쭉 사용하고 싶었지만.

“아랫사람을 생각하시는 아가씨의 마음은 갸륵하지만, 그것도 귀족 예법이랍니다. 로드윅 공작님의 얼굴에 잉크칠을 하고 싶으신 게 아니시라면 하대하는 것에도 익숙해지세요.”

자신의 행동이 블레이크에게 흠이 될지도 모른다는 미셸의 말에 생각을 바꿨다.

“내일이면 들어가신다니-.”

안나는 그런 리체를 보다 손에 든 옷감을 꽈악 쥐었다.

콧잔등이 시큰거리는 것을 보고 옆에 있던 제드가 실실거리며 한마디 거들었다.

“아가씨랑 같이 아카데미에 못 들어가서 분하지? 안나?”

“조용히 해. 제드 트레앙.”

안나는 제드를 흘겨봤다.

황립 아카데미의 학생은 모두 귀족이기에, 시중을 들어줄 수행원을 한 사람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 허락됐다.

로드윅 가의 사람들은 내심 리체와 친한 트레앙 남매 중 한 사람이 같이 들어가리라 여기고 있었으나.

정작 리체가 택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아, 아가씨! 늦어서 죄송합니다! 중간에 마차 바퀴가 빠지는 바람에……!”

때마침 허겁지겁 방문을 여는 젊은 기사의 등장에, 리체와 트레앙 남매가 시선을 돌렸다.

제드가 그런 기사를 향해 쯧쯧거리며 다가가 어깨에 팔을 올렸다.

“필립, 일찍 일찍 좀 다니자? 아카데미에서도 이렇게 할 거야?”

“윽. 제드 씨. 당연히 아니죠……!”

“걱정이다. 너 같이 어리바리한 애가 어떻게 아가씨 수행원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잘할 수 있습니다! 아가씨, 믿어주세요!”

리체는 억울함과 의지가 담긴 한 쌍의 갈색 눈을 보며 살포시 웃었다. 

“믿어. 필립.”

아카데미에 함께 들어가는 리체의 수행원.

진료실 습격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됐던 필립이었다.

* * *

그러니까 3년 전.

히켄카는 파이톤스의 사념체를 삼킨 뒤, 파이톤스를 돌려주는 대신 리체에게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이 기사? 곧 깨어날 거야. 그런데, 르티옴. 나는 이 몸이 꽤 잘 맞아서 아직 버리고 싶지 않거든.”

그중 하나가 필립을 감옥에서 꺼내 로드윅 공작성에 두는 것이었다.

리체는 블레이크에게 가서 감옥에 갇힌 기사에 관해 증언할 게 있다고 말했다.

복도에서 필립이 리체를 쫓아온 것은, 괴한이 도망친 후 리체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라고.

당연히 블레이크는 그 말을 바로 믿지 않았다.

“필립이 깨어난 다음에 이야기하자꾸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립이 정신을 차렸다. 히켄카는 두어 번 더 필립의 몸에 빙의했다. 리체와 말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히켄카가 빙의한 필립의 증언과 리체의 증언이 맞아떨어지면서, 필립은 혐의를 벗고 풀려났다.

그 과정에서 히켄카의 빙의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필립은, 리체가 자신을 구해줬노라 여기며 기사 서임을 받았을 때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어? 아가씨의 기사 자격으로 들어가는 거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으악. 제드 씨, 살려주세요!”

“어휴, 둘 다 그만해.”

제드는 팔 사이에 필립의 목을 끼며 으름장을 놓았다. 꼿꼿이 세운 팔은 필립의 목을 조르지 않아 장난임이 분명했다.

필립도 연기를 하며 장난에 맞장구를 쳤고, 안나가 두 사람을 말렸다. 리체는 그 상황에 웃음을 터트렸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드디어, 입학이야.’ 

3년 전, 히켄카가 요구한 또 다른 조건.

리체는 로드윅 공작성의 감옥에서 히켄카와 나눴던 대화를 다시 회상했다.

“죽을 거 같은 놈이 있는데, 걔를 살려내.”

“그게 누군데?” 

“이안드웨인 게르웨르.”

“……어떻게?”

게르웨르. 생각지도 못한 성에 리체의 심장이 요동쳤다.

“글쎄.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알지 않을까? 넌 미래를 알잖아.”

그의 오른쪽 금안에 리체가 비쳤다.

모든 것을 안다는 저 눈. 리체는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생각할 시간을 줘.”

그러지. 히켄카는 흔쾌히 리체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빙의한 필립의 복근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유리병이 세계를 단절시킨다고 한 거 기억해? 인간계와 유리병 안쪽의 세계는 또 다르거든. 내가 창조한, 나만이 간섭할 수 있는 세계지. 내가 꺼내지 않는 이상 파이톤스의 사념체는 절대 꺼낼 수 없어.”

필립의 배를 갈라도 파이톤스를 구할 수 없다는 협박.

어차피 그런 끔찍한 짓은 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 외에도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리체는 히켄카의 조건을 수락했다.

하지만 이안드웨인을 살린다니. 게르웨르 공작이 자신이 아들을 죽였노라 고백한 건 리체가 15살 때의 일이었다. 

앞으로 8년 동안 파이톤스를 못 보는 것은 너무 길었다.

“중간에 파이톤스가 잘 있는지 확인시켜줘. 납치범도 인질의 생사 확인은 시켜주잖아.”

“……그건 또 다른 조건이 붙는데?”

“할게.” 

“좋아. 르티옴. 그러면 황립 아카데미에 입학해. 파이톤스는 그때 만나게 해주지. 더 타협은 없어.”

히켄카는 그렇게 말하고 그날은 사라졌다.

나중에 그가 다시 필립에게 빙의했을 때, 블레이크의 정화를 위해 좀 더 빨리 파이톤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히켄카는 매번 거절하더니, 필립이 풀려나고 나서부터는 아예 모습을 감췄다.

별의 탐지 또한 사용할 수 없었으니, 히켄카가 누군가에게 빙의했다고 해도 찾을 방도가 없었다.

파이톤스를 잃은 리체가 궁지에 몰린 건 재작년의 일이었다.

“리체, 어깨를 펴고 다니거라. 너는 로드윅이야. 그게 네 방패가 되어줄 거다.”

그때쯤 블레이크는 부쩍 리체에게 훗날에 관한 조언을 해주고는 했다.

리체도 이유를 알았다. 블레이크에게 쌓인 옴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파이톤스가 말한 2년보다도 조금 더 빨랐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리체는 목숨을 걸고 블레이크를 정화했다.

살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

그게 성공한 것은, 파이톤스가 도서관에서 꺼낸 별 조각 때문이었다.

“이거 봐! 복구 능력인가 봐! 치유 능력은 없나? 중간급 힘이면 특성 두 개 정도는 가지고 있는데.”

별 조각에 복구 능력 외에 다른 능력도 있을 거란 파이톤스의 말.

리체는 그 말을 믿고 별 조각으로 이런저런 실험을 하다, 별 조각에 다른 능력이 있음을 발견했다.

치유 능력. 능력이 미약했던 탓에 초반에 찾지 못한 것이었다.

리체는 오로지 그 능력에 의지해 블레이크의 정화란 도박에 뛰어들었다. 

죽을 위기가 찾아왔지만,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리체 아가씨, 제드 씨 좀 말려주세요오-.”

“필립, 힘내.”

“우리 아가씨 말 들었지? 힘내. 필립.”

“안나 씨……?”

“힘내요.”

“진짜 다들 너무하세요. 여기서 제 편은 아무도 없어…….”

필립을 아카데미의 수행원으로 삼을 것은, 곧 약속했던 날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언제 히켄카가 필립의 몸에 빙의할지 모르니.

‘내일이면 아카데미 입학이야.’

재회할 날이 머지않았다.

꼭 구해줄게. 파이톤스.

리체는 결연한 마음으로 짐가방을 챙겼다.

* * *

로크샤 황립 아카데미.

2학년 강의실.

“와. 그거 들었어?”

통합 수업을 위해 모인 80명 남짓한 학생들로 커다란 강의실이 가득 찼다.

평소에도 조용한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달리 강의실이 시끌벅적했다.

지금쯤 강당에서 시작했을, 신입생 입학식 때문이었다.

“신입생 중에 데르케디온 선배 동생이 있대.”

“그 평민?”

“평민이라고 말해도 돼? 그래도 공녀인데. 로드윅 가문은 무섭잖아.”

“걱정하지 마. 데르케디온 선배는 신경도 안 쓸걸. 오히려 싫어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들어 봐봐. 며칠 전에 복도에서 다른 선배가 데르케디온 선배한테 동생 얘기 물어보는 걸 우연히 봤거든?”

학생 하나가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으며 데온 흉내를 내었다.

“바로 인상 쓰면서 그걸 왜 묻냐고 하더라.”

“하긴, 나라도 그러겠다. 피도 안 섞인 평민이 내 동생이라고 갑자기 집에 들어오는 걸 어떻게 봐.”

맞은편에 앉은 남학생이 소름이 끼친다며 팔을 쓸었다. 그러고는 생각난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는데, 그 평민은 완전히 인생 폈대. 능력자들은 수명도 짧으니까 언젠가는 그 평민이 로드윅 가의 웃어른이-.”

“야, 야.”

그러다 옆에 앉은 여학생이 남학생의 팔을 툭툭 쳤다.

여학생은 곁눈질로 눈치를 줬다. 창가 쪽에 혼자 말없이 앉아 있는 소년이 있었다.

창으로 넘어온 햇빛에 금발이 반짝였다. 가만히 창밖을 응시하는 수려한 옆얼굴이 보였다.

“이안드웨인 들어.”

“아.”

맞다. 하도 조용해서 종종 같이 있다는 걸 잊어버린다.

저 존재감 뚜렷한 외모가 무색할 정도로. 

학생들은 그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그런데, 이안드웨인도 능력자 맞아? 한 번도 능력 사용하는 걸 못 봤어.”

“능력자 맞아. 나랑 동갑인 애가 게르웨르의 능력자로 발현했다고 했거든. 얼마 전에 아버지 따라간 사냥제에서도 봤고. 그거 알아? 게르웨르 앞에서는 거짓말도 안 통한대.”

“진짜? 지난번에 시험 범위 다르게 알려준 걸 그대로 믿던데? ……혹시 이안드웨인한테 쌍둥이 형제가 있는 건 아닐까? 능력자인 애는 집에 있다든지-.”

“조용히 하세요. 수업 시작합니다.”

학생들의 대화는 앞문으로 들어온 교수의 등장으로 금세 멎었다.

조용해진 강의실에서 교수는 학생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며 출석을 확인했다. 

“지크베르트 세르디야.”

“…….”

“지크베르트?”

그러다 대답 없는 학생의 이름이 나왔다. 

교수는 안경 속 깐깐해 보이는 보랏빛 눈으로 넓은 강의실을 훑었다.

늘 뒷자리에 앉아 책상에 엎드려 있던 지크베르트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죠?”

교수의 물음에 학생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학년장?”

교수에게 지목당한 2학년 학년장이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친구 만나러……. 간다고 나갔어요.”

“그래서 수업을 빼먹었다고요?”

수업을 빠진 건 지크베르트인데, 왜 자신이 혼나는 느낌을 받아야 하는 건가.

학년장은 항상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지크베르트의 얼굴을 떠올리며 울상을 지었다.

“제 수업은 한 번이라도 빠지면 안 된다고 경고했을 텐데요.”

“그게……”

“지크베르트에게 전하세요.”

교수는 붉은색 펜으로 출석부의 지크베르트 이름 옆에 글자를 끄적였다.

“B등급 이상은 생각도 하지 말라고.”

과연. 저 보라색 눈의 마녀는 공작가의 능력자라도 봐주는 게 없었다. 

지크베르트.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학생들은 싸해진 공기에 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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