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학비가 얼마인데
입학식이 한창 진행 중인 강당.
‘시선이…….’
리체는 사방에서 날아드는 시선에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많은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기에, 나름의 각오는 했지만.
7, 80명 남짓한 신입생과, 입학식을 참관하는 그들의 일행들. 심지어는 강단 위의 학장과 교사들까지 절 보고 있는 게 느껴지니.
‘8년……. 길다.’
황립 아카데미의 교육 과정은 8학년까지였다.
졸업까지 걸릴 시간을 생각하니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이라 그래. 나한테 익숙해지면 신기한 게 사라지겠지.’
그때까지만 잘 버티자.
리체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되뇌었다. 그러는 사이 입학식의 마지막 순서였던 총장의 말이 끝났다.
진행자가 다음 일정을 안내했다.
“신입생 여러분들은 한 시간 뒤 학년 강의실에 모이시면 됩니다. 담당 교수님들께서 학기 과정을 설명해주실 겁니다.”
곧 헤어질 가족, 지인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학생들은 우르르 일어나 작별 인사를 나누러 주변으로 흩어졌다.
다행히 관심이 멀어졌네. 리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급히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아빠는 지금쯤 황도 저택에 도착했을까?’
강당까지 함께 온 블레이크는, 자신이 걷는 곳마다 갈라지는 인파에 일찌감치 돌아갔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도 않았을 터였지만, 리체의 입학식이니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아-! 가주님, 제가 방금 누군가 리체 아가씨께 평민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들은 모양이에요.”
“…….”
제드가 갑작스레 꺼낸 말에 블레이크는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으나. 로드윅 공작은 가만히만 있어도 존재감이 뚜렷했다.
안 듣는 척하며 수행원의 일방적인 대화에 귀를 세우는 이들이 꽤 되었다.
“그런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행이네요. 하마터면 오늘같이 경사스러운 날에 실종되는 사람이 생길 뻔했잖습니까.”
그 말에 사람들은 소곤거리던 입을 헙, 하고 다물었다.
암살자 가문의 수행원이 하는 소리였다. 로드윅 공녀의 험담을 하다 들킨 이가 맞게 될 최악의 상황이 그들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런 뒤, 블레이크는 저택으로 돌아간다며 리체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거라. 안부 인사 같은 사소한 이야기도 좋으니, 전할 말이 있으면 필립에게 맡기고.”
“네, 아빠. 매주 편지할게요.”
“그래.”
공녀의 사소한 이야기가 매주 로드윅 공작의 귀에 들어간다니.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누군가의 얼굴이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섰다.
블레이크는 없었지만, 사람들은 입학식 내내 리체에 대해 입 한 번 벙긋하지도 못했다.
“아가씨! 여기요, 여기!”
필립이 손을 흔들며 강당 한가운데에서 인파 쪽으로 오는 리체를 불렀다.
리체는 두리번거리며 필립이 있는 방향을 찾았다. 살짝 미소 지어 고개를 끄덕이다, 그 옆에 서 있는 남학생을 보고 반가운 얼굴을 했다.
“오빠!”
데온이었다.
올해 12살임에도 벌써 필립의 귀 높이까지 올 정도로 키가 컸다.
흑발 아래, 뚜렷한 이목구비와 차분한 붉은 눈, 젖살이 빠져 날렵해진 턱선이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데온은 뛰어오는 리체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뛰지 마. 넘어지잖아.”
짜증과 걱정이 섞인 말투였다.
재작년. 블레이크의 옴을 정화한 리체가 생사를 넘나든 뒤로, 데온은 딴사람이 된 것처럼 리체를 과보호하기 시작했다.
갖고 태어난 성격이 상냥함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시비와 걱정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긴 했지만.
처음에는 그런 데온을 이상하게 여기던 리체도 이제는 익숙해져 데온의 행동을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오빠, 왜 여기에 있어? 지금 수업 중 아니야?”
“어. 땡땡이.”
“어?”
땡땡이라니. 그게 막 입학한 동생 앞에서 당당하게 할 말인가.
황당함에 이유를 물어보려던 차, 근처 인파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리체에게 아는 척을 했다.
“리체!”
“로벤하프 오빠?”
시원한 바람에 하늘색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로벤하프 히베츠만이었다. 그는 생글거리며 절 놀란 눈으로 보는 리체의 앞에 섰다.
옆의 데온보다는 반 뼘 정도 작았지만, 로벤하프도 동급생 중에서는 키가 큰 편에 속했다.
어쨌든 둘 다 리체보다는 너무 커버려서, 두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목덜미가 뻐근한 게 일상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고개를 뒤로 젖힌 리체가 로벤하프에게 물었다.
“오빠도…… 땡땡이야?”
“아니. 나는 입학식 실행 위원회야. 마음대로 수업 빠지는 어디 공자님이랑은 다르지.”
“흥.”
로벤하프는 목에 찬 위원회 명찰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렇게 리체와 반말을 할 정도로 친해지게 된 것은, 그간 로벤하프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었다.
3년 전, 로드윅 공작성에서 리체와 재회한 그 날.
로벤하프는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깨닫고야 말았다.
자신은 그 아이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게 분명했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어쩌지?’
9살인 로벤하프의 순정 앞에서 리체가 평민 출신이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다. 사랑에 눈이 멀고 귀가 멀었으니.
리체를 생각하면 그 대단한 명문가인 히베츠만 공작가도 별 볼 일 없게 느껴졌다.
문제는 그거였다.
어떻게 제 첫사랑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로벤하프는 상황을 판단하는데 머리 회전이 빠른 편이었다.
7살인 리체에게 9살인 제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해도, 리체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자신들은 아직 어리니까.
결혼은커녕 연애도 무리다.
‘고백은 어른이 된 다음에.’
그러면 그때까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리체에게 자신의 호감도를 올려야 했다.
로벤하프는 데온의 절친 자리를 핑계로 리체와 가까워지는 방법을 택했다.
빌미가 생길 때마다 끈질기게 로드윅 공작성을 드나들었고, 마침내 리체가 자신을 친한 오빠쯤으로 여기는 데 성공했다.
“로벤하프, 내가 여기 얼씬도 하지 말랬지.”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경계심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것은 감당해야 할 부작용이긴 했지만.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실행위원이 입학식에 얼씬도 안 하는 건 힘들더라.”
로벤하프는 리체를 품에 가두고 날을 세우는 데온에게 뻔뻔스레 말했다.
‘왜들 저러실까.’
리체 아가씨가 안 계실 때는 무난하게 지내시는데 말이지. 가까이 온 필립이 차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생각은 못 하고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리체는 고개를 더 위로 젖혔다. 날렵한 데온의 턱이 보였다.
“오빠, 나 같이 안 있어 줘도 괜찮으니까 수업 들어가.”
“…….”
고개를 숙인 데온은 뾰로통함이 느껴지는 무표정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말 없는 시위에 리체는 데온의 품에 안긴 채 한 발자국씩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학비가 얼만데. 아빠가 내주시는 거니까 다 들어야지.”
그래. 학비가 얼마인데.
로드윅 가의 집사, 폴이 말해준 액수를 들었을 때, 리체는 너무 놀라서 말을 잃었다.
한 학기에 만 오천 데르겔. 외삼촌인 탬버가 노예상에 자신을 팔려던 가격의 150배였다.
히켄카의 조건만 아니었어도 로드윅 가문의 재정에서 제 아카데미 비용이 나갈 일은 없었을 텐데.
파이톤스의 안부를 확인해야겠다는 자신의 욕심에 벌어진 일이었다.
리체는 히켄카의 조건과는 별개로 다짐했다.
결코 블레이크가 헛돈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게 8년 동안 성실히 아카데미를 다녀보겠다고.
“야, 우리 집 돈 많아.”
그 정도는 푼돈이라고.
데온은 투덜거리면서도 리체의 걸음에 맞춰 앞으로 걸어갔다. 필립이 그 뒤를 슬금슬금 따라갔고, 로벤하프도 따라가려던 차. 리체가 고개를 돌렸다.
“로벤하프 오빠는 위원회라 강당에 남아야 하지?”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던 로벤하프가 애매하게 미소 지으며 머릿속으로 변명을 떠올렸다.
“그렇긴 한데-.”
“그렇구나.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다음에 보자.”
역시 만만치 않다. 제 짝사랑 상대는.
해맑은 얼굴로 건네는 칼 같은 작별 인사에 로벤하프는 강의실까지 배웅해주겠다는 소리도 못 하고 손을 흔들었다.
“응. 다음에 보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그런 로벤하프를 향해 데온이 얄밉게 코웃음 쳤다.
* * *
“수업 잘 듣고.”
“어.”
“졸지 말고.”
“어.”
“내 말 귓등으로 듣지 말고.”
어떻게 알았지. 데온은 리체의 잔소리에 대충 대답하며 복도 모퉁이에 멈춰 섰다.
“저기 안쪽에 보이는 문이 1학년 강의실.”
리체는 데온이 가리키는 모퉁이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긴 복도에는 굳게 닫힌 커다란 양문형 문 하나가 있었다. 복도 전체를 다 사용할 정도로 큰 강의실인 모양이었다.
“응. 데려다줘서 고마워.”
데온은 씩씩하게 말하는 리체를 말없이 내려다보다, 리체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무, 무슨 짓이야아.”
결 좋은 단발은 엉키지 않고 금세 제자리를 찾았지만.
데온은 리체의 이마를 툭 치며 말했다.
“괴롭히는 놈 있으면 바로 말하고. 나 간다.”
그러고는 학생들이 몰리기 전에 간다며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리체는 황당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데온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필립이 말을 걸었다.
“아가씨를 괴롭히시는 건 도련님 같은데요?”
“그러니까…….”
필립이 가까이 오자, 리체의 눈높이 시야에 그의 명치가 들어왔다.
리체는 필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영문을 모르는 갈색 눈동자 한 쌍이 리체가 할 말을 기다렸다.
“필립, 뭐 달라진 거 없어?”
“헉. 벌써 이날이 와버렸다니. 자, 잠시 제게 시간을 주세요. 아가씨. 제가 제드 씨에게 이런 상황에 대비해 교육받기는 했는데요. 그러니까, 아가씨께서 달라진 거, 달라지신 게-.”
“아니. 필립이 달라진 거.”
“없는데요?”
“그렇구나.”
아직인 모양이었다. 히켄카가 언제 올지 모르니 기다리기가 더 힘든 느낌이다.
빨리 파이톤스를 만나고 싶은데.
“수행원은 강의실 안까지는 못 들어간대요. 근처에 있다가 끝나실 때쯤 올게요.”
리체는 필립이 열어준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강의실은 넓은 단들이 내려가는 계단처럼 시공돼 있었다. 단마다 윤이 나는 긴 나무 책상과 의자들이 있었고, 마지막 단 아래 바닥에는 또 다른 넓은 단이 있었다.
나란히 설치된 세 개의 칠판과 교탁이 있는 걸 보아하니, 교수가 강의하는 교단인 듯했다.
‘이쯤이 좋겠다.’
리체는 눈에 잘 띄지 않을 듯한 중간 단 책상의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았다. 바로 옆에 폭이 좁은 계단이 있는 자리였다.
‘일찍 오니까 좋네. 마음대로 앉을 수도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입생들로 강의실 자리가 차기 시작했다. 리체의 주변 자리에도 슬쩍 리체의 눈치를 보며 앉는 신입생들이 있었다.
입학식에서 본 로드윅 공작의 영향 때문인지, 리체에 대해 수군거리는 아이들은 없었다.
그러다 교단 옆의 문이 열리며 교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헉.”
“럼블라 교수님이다.”
“입학시험 때 봤어.”
“1학년 담당이신가? 큰일 났다. 엄청 엄격하시다던데.”
그중 꼿꼿한 자세로 걸어들어오는 교수를 보고, 학생들은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재학생들 사이에서 ‘보라색 눈의 마녀’라 불리는 럼블라 이즈미틱.
그녀를 수식하는 말들은 많지만, 가장 공감대를 형성하는 건 ‘칼 같은 럼블라’였다. 수업 중 한 번이라도 그녀의 경고를 무시하면 아웃.
그 명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오늘 입학한 신입생들도 그녀의 수업방식을 다 알 정도였다.
“반갑습니다. 럼블라 이즈미틱 입니다.”
앞선 교수들의 소개가 끝나고, 마지막인 럼블라 교수의 차례가 되었다.
딱딱한 말투로 자기소개를 끝낸 럼블라 교수는, 가장 맨 윗단을 깐깐한 보라색 눈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지크베르트 세르디야.”
지크베르트 세르디야?
공작 가문의 능력자 이름에 신입생들이 술렁였다.
“앞으로 나오세요.”
럼블라 교수가 말을 이은 그때였다.
강의실의 뒤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