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우리 복덩이가 여기에 있었네
맨 뒷자리의 여학생이 지른 비명이었다.
장식품인 줄 알았던 거북이가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등껍질이 붉은 육지 거북이.
느릿하던 움직임은 점점 빨라지더니, 한 소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헉.”
“사, 사람으로 변했어.”
생전 처음 보는 놀라운 광경에 학생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교복 옷깃에 파란색의 2학년 배지를 단 남학생.
멀리서도 보이는 주황색의 붉은 머리와 갈색 피부.
그가 누군지를 알아차린 교단 위 몇몇 교사들이 한숨을 쉬거나 고개를 저었다.
지크베르트 세르디야.
2학년에 재학 중인 세르디야 공작 가문의 수인화 능력자였다.
“…….”
럼블라 교수만이 지금 상황을 예측했다는 듯,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지크베르트를 응시했다.
교단을 향해 뚜벅뚜벅 잘 내려가는 듯하던 지크베르트는, 돌연 걸음을 멈췄다.
그 바로 옆에 책상에 앉은 리체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녕, 리체.”
무뚝뚝하던 녹안에 생기가 돌고 눈매가 사르르 접혔다.
순식간에 변한 그의 표정에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넋을 놓았다.
“지크베르트.”
럼블라 교수가 이름을 부르며 재촉했다. 지크베르트는 그 소리에도 꿈쩍 않고 있다가, 얼른 가보라는 리체의 손짓에 그제야 교단으로 내려갔다.
‘깜짝이야.’
지크베르트와 리체가 무슨 사이인지 궁금했는지, 주변 아이들이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게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무척이나 놀랐다.
‘쭉 저기에 있었던 건가? 아까 혼자 있을 때 말 좀 해주지.’
3년 전. 지크베르트의 상처가 완전히 나았을 때쯤, 세르디야 공작은 직접 로드윅 공작성을 방문해 지크베르트를 데려갔다.
그 뒤 세르디야 공작가는 한동안 후계 문제로 시끄러웠다.
세르디야 공작이 몸소 해결해본다고 나섰음에도 장남 세력의 반대가 극심했다. 지크베르트를 후계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결국, 그 문제에 시달리느라 머리가 아파질 대로 아파진 세르디야 공작은 황당한 명령을 내렸다.
“둘이 싸우거라. 이기는 놈이 후계자다.”
당시 장남은 14살, 지크베르트는 8살이었다. 그것도 수인화 능력이 온전치 못한 새끼 늑대.
세르디야 공작이 미친 건가?
소식을 전해 들은 다른 세 공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능력자가 아닌 장남에게 공작의 자리를 내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고, 네 공작 가문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니.
명령을 재고해 보라 설득했지만 세르디야 공작은 이미 귀를 닫은 뒤였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린 지크베르트에게 싸워 이기라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 세대부터 세르디야는 쇠퇴하겠네요.”
제드가 농담처럼 말했다.
진심이었지만.
그만큼 모두가 장남의 승리를 예견했다. 하지만, 후계자 자리를 쟁취한 것은 어린 지크베르트였다.
새끼 늑대는 제 것인지, 상대의 것인지 모를 붉은 피를 뒤집어쓰고 결투장에 홀로 섰다.
세르디야 공작은 지크베르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들 똑똑히 보았겠지. 이제부터 내 후계자는 저놈이다. 앞으로 내 집에서 후계자 문제를 또다시 거론하는 자는.”
세르디야 공작이 엄지를 세워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죽어.”
야만적인 표현이었지만, 확실한 경고가 되었다.
그 이후로 지크베르트가 후계자가 된 것에 반발하는 이는 나오지 않았다.
이듬해 9살이 되자 능력이 안정됐다. 지크베르트는 빠르게 강해졌다.
그렇게 몇 달이 흘러, 그해 겨울.
정화의 힘을 사용한 리체의 생사가 위험했던 때였다.
로드윅 공작성에서 의원을 불러 모은다는 이야기와 함께, 아픈 이가 공녀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소문은 조용하고 빠르게 흘러 세르디야 공작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지크베르트도 그것을 알게 되었다.
“공작님, 성문 앞에 붉은 늑대가 있습니다.”
리체의 방을 떠나지 않는 블레이크에게 보고가 들어왔다.
성문 앞에 자리 잡은 붉은 늑대가 이틀을 꼼짝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고.
“……혼자 왔나?”
“네. 온몸에 상처가 가득합니다. 숲 경계를 순찰 중이던 기사들이 마물의 숲에서 나오는 붉은 늑대를 보았다고는 하는데……”
며칠 동안 마물의 숲을 달려 로드윅 영지로 왔나.
세르디야 공작도 혼자서 넘지 못하는 숲을, 고작 9살이.
‘목숨을 걸었겠군.’
침대 위 리체가 쌕쌕 가쁜 숨을 내쉬었다.
블레이크는 리체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며 말했다.
“들여보내.”
“네.”
그렇게 블레이크의 허락을 얻은 지크베르트는 리체가 깨어날 때까지 성에 머물렀다.
리체가 괜찮아진 뒤에도 두세 달에 한 번씩 마물의 숲을 넘어 로드윅 공작성을 찾았다.
블레이크는 리체의 앞에서 인간화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지크베르트의 출입을 허락했다.
올 때마다 생기는 상처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게, 마물의 숲을 넘는 요령이라도 생기는 모양이었다. 올 때마다 달라지는 건 또 있었다.
“지크, 점점 커지는 거 같아.”
“컹.”
조랑말처럼 커다래진 지크베르트는, 이따금 리체를 태우고 공작성을 돌아다녔다.
데온은 무척 싫어했지만.
그래도 리체가 승마를 배우는 것보다는 능력자인 지크베르트를 타는 게 덜 위험하다는 생각에 크게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지난번에 한 얘기가 이거였나?’
리체는 다시 지크베르트가 강의실에 있던 이유를 추측했다.
짚이는 건, 몇 주 전.
공작성을 찾은 지크베르트에게 황립 아카데미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고 이야기했을 때였다.
늑대 모습의 지크베르트는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땅에 글자를 적었다.
인사하러 갈게
역시 그거 때문인 모양이었다.
지크베르트는 리체에게 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으니.
‘쭉 아카데미에 있을 테니까 나중에 찾아와도 괜찮……?’
그러다 제게 쏠린 시선이 이상해 슬쩍 고개를 들었다.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리체 쪽을 향하고 있었다.
‘뭐, 뭐지.’
시선을 따라가던 리체는, 교탁 앞에 선 럼블라 교수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발견했다.
동그래진 아이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럼블라 교수가 입을 열었다.
“방금 제가 한 말 못 들었나요?”
“네……?”
“제가 학생에게 뭐라 했는지, 들으셨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못 들었어요.”
그래서 다들 자신을 주목했던 모양이었다. 교수가 말을 걸었는데 대답도 안 하고 있어서.
창피함에 열이 올라 볼이 붉어졌다.
“괜찮습니다.”
럼블라 교수는 들고 온 종이들을 교탁에 쳐서 정리한 뒤, 교단 끝에 지크베르트가 서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트아리체 로드윅 학생.”
그러고는 걸어가기 전, 리체에게 다시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당신도 따라오세요.”
* * *
“말도 안 됩니다!”
“마력 친화도가 이렇다니요?”
“이게, 이게 나올 수 있는 수치입니까?”
총장실에 모인 네 명의 교수는 목소리를 높여 대화하고 있었다.
싸우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이 본 것이 믿기지 않을 뿐.
마석이 마력의 공급원이라면, 인간이 가진 마력 친화도는 증폭기였다.
친화도가 높을수록 같은 마법을 펼쳐도 그 효과가 많게는 몇십 배까지 강했고,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폭이 넓었다. 최상위의 마력 친화도를 가진 이들은 고위 마법까지도 무리 없이 습득했다.
일반인은 5 미만.
평범한 마법사가 될 자질을 보이는 이들이 10~30 정도.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길만한 천재라고 불리는 이들이 50~60 정도.
능력자들은 50 언저리였다.
하지만 오전에 도착한 검사지는…….
교수들은 책상 위의 종이 한 장을 보며 침을 삼켰다.
성명 : 트아리체 로드윅
……
마력 친화도 : 98
“검사기관에서 실수한 걸 수도 있잖습니까.”
“자네 황립 마력 연구소를 무시하나? 여기서 나온 결과가 틀린 적이 있나!”
“그건, 그렇지만…… 아니, 그런데 뭘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엑셀트 교수께서는 마력 연구소장 출신이신 걸 이렇게 티 내시는 겁니까?”
“처, 천재야.”
“둥크 교수님?”
“천재가 나온 거라고!”
“교수님, 진정 좀…….”
떠들썩한 교수들을 두고, 자신의 자리에 앉은 총장은 심각한 척 이마를 짚으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드디어, 드디어 우리 황립 아카데미에-!’
그간 얼마나 설움을 당했던가.
명문인 저희를 만년 2등 아카데미 취급하던, 판 대륙의 우딕 아카데미.
콧대를 눌러줄 때가 온 것이다.
‘마력 친화도 98? 그 기계밖에 모르는 놈들에게 가능한 수치기나 하냔 말이야.’
절대 불가능하지.
“후, 후…….”
체통 때문에 감추려고 해도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로드윅 공작. 무섭기만 한 줄 알았더니, 이런 복덩이를 저희에게 맡겨주었나.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올 지경이었다. 지금만큼은 공작이 자신에게 능력을 사용하겠다 해도 영광이라며 넙죽 엎드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똑똑.
형식적인 노크 소리가 들리고, 벌컥 문이 열렸다.
딱딱한 표정의 럼블라 교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조용히들 하세요.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 교수를 뒤따라 들어오는 복덩이, 아니, 황립 아카데미의 자랑.
삽시간에 대화를 멈춘 교수들이 리체를 바라봤다.
지크베르트는 수업을 듣기 위해 본인의 교실로 갔기 때문에, 교수들의 시선을 받는 건 오롯이 리체 혼자였다.
부담스러웠지만, 리체는 교수들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리체의 완벽한 예법 인사에 교수들은 절로 흐뭇함이 돌았다.
몇몇 교수는 실패한 첫사랑을 떠올리며 자신들에게 저런 손녀가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바로 앞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군요.
총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리체에게로 다가갔다.
콧김을 내뱉는 교수들에게 흥분을 가라앉히라는 의미로 손을 까딱거리며 눈치를 준 뒤, 리체에게 말했다.
“오늘 이렇게 트아리체 학생을 오라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마력 친화도가 너무 높게 나와서예요.”
리체는 총장이 내미는 검사지를 받아들었다.
마력 친화도 측정. 입학시험 때 필기시험을 통과한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검사였다.
면접 순서를 기다리는 10분 동안, 작은 돌을 쥐고 있다가 제출하는 것이 끝이었다.
별것 아닌 검사였기에,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리체는 검사 전에 들었던 내용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마법학 수업에서 검사 결과를 알려준다고 그러지 않았나?’
그걸 왜 자신만 따로 불러서 확인시켜주는 걸까.
리체는 의아함을 품고 검사지에서 자신의 이름과 수치를 확인했다.
하지만 비교 대상이 없으니 이게 어느 정도의 수치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98……이 좋은 거예요?”
얘 좀 봐라.
마탑에서 침을 질질 흘릴 만한 수치를 받아놓고 그게 좋은 거냐고 묻는다니.
하지만 천재는 그럴 수 있지. 우리 아카데미의 천재는 범인 따위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리체가 검사지를 확인하자, 교수들은 더는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했다.
아이를 소파에 앉히고,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그게 좋은 거냐니. 돈을 주고도 못 살 천부적인 재능이다!”
“출생, 출생을 알아보면 좋은데.”
“애한테 무슨 소리세요? 트아리체 양, 마법을 배운 적이 있나요?”
“로드윅 공작 각하께서는 어디서 이런 보물 같은 아이를 데려오셨을꼬.”
리체가 대답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 쏟아져 나왔다. 듣자 하니 제 마력 친화도가 좋은 편인 듯했다.
흥분한 총장과 교수들과는 달리, 리체는 의외로 덤덤했다. 짐작 가는 이유가 있었다.
[인간계에서 별이 가진 힘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마물의 숲을 주제로 수다를 떨던 어느 날, 파이톤스는 재밌는 걸 알려준다며 발을 까딱였다.
‘뭔데?’
[마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