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30)화 (30/89)

30화 무릎 꿇어

“마력?”

[그래, 너희 인간들이 우리 능력을 흉내 낼 때 사용하는 힘 말이야.] 

르티옴을 만든 위대한 별이 자신의 힘을 담은 운석을 인간계에 떨어트렸다. 힘은 땅에 스며들어 마물의 숲을 만들었다.

인간들은 그 힘을 마력이라 불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별의 힘은 이 세계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별들의 간섭과 함께 인간계 이곳저곳에 스며들었다. 

자연에 스며든 마력은 오랜 시간이 지나 마석이라 불리는 광물이 되었고, 인간들이 사용하는 마력의 원천이 되었다.

[르티옴은 위대한 별이 창조한 존재니까, 너 마법사 해도 잘할걸?]

파이톤스는 히죽였다.

별의 힘을 막 갖다 쓰는 그 괴물 같은 능력이면 불덩어리를 유성우처럼 쏟아낼 수 있을 거라고 킬킬거렸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기에 더 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때의 말이 지금 이렇게 생각이 날 줄이야.

“로드윅 공작가에서 마력을 높이는 훈련이라도 한 건가요?”

“천재네, 자네는 천재야!”

“정밀 검사를 받아볼 생각은 없나? 내가 잘 아는 실력 좋은 연구원이 있는데…….”

리체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교수들의 얼굴이 부담스러워 소파 쿠션을 집었다.

쿠션을 머리 위로 올리자, 교수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뒤로 물러나 헛기침했다.

이러다가는 오늘 안에 총장실을 벗어날 수 없을 듯했다. 

“저, 마력 친화도 수치가 높은 건 알겠는데……. 절 부르신 용건에 다른 뜻이 있으신 거예요?”

아. 리체의 질문에 교수들이 슬쩍슬쩍 눈치를 살폈다.

“크흠, 그게…….”

원래라면 로드윅 공작과 상의 후에 이런 걸 물어봤을 테지만.

희대의 천재 등장에 마음이 급해 버려 일을 벌이고야 말았다.

총장은 교수들을 대표해, 리체에게 사탕 하나를 손에 쥐여주며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법, 관심 없니?”

* * *

“8년 내내 전액 장학금!” 

“마법사는 말일세, 정년 걱정도 없는 직업이지!”

“그뿐인가. 돈을 갈퀴로 쓸어 담는다니까!”

“……돈을 갈퀴……는 애 앞에서 하기에는 조금. 큼큼.”

“트아리체 양, 자네는 미래의 희망이야! 등불이고!” 

리체는 총장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일반과인 리체에게 마법과로 편입할 생각이 없냐며 교수들이 꼬드기던 말들이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했다.

8년 전액 장학금이라니. 꽤 구미가 당기는 소리였지만, 리체를 고민하게 만든 건 다른 이유였다.

‘마법을 배우면 르티옴의 힘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나?’

블레이크와 데온의 옴은 한 번씩 깨끗이 정화했지만.

능력자의 기운은 시간이 지나면, 혹은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다시금 쌓였다.

파이톤스가 없는 동안, 혼자서 무리 없이 정화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지크베르트도, 가능하다면 히베츠만 공작과 로벤하프도 정화하고 싶었으니.

그리고.

‘걔도.’

이안드웨인을 살리라는 히켄카의 조건에, 리체는 도서관의 거울 속에 말을 걸었다.

다행히 거울 너머에는 아이가 있었다. 리체는 제 모습을 보이지 않고 거울 속 아이의 모습을 확인했다. 일렁이는 기운과 금안. 능력자인 이안드웨인이 확실했다.

아이는 리체가 누군지 몰랐지만, 리체와 종종 대화할 수 있다면 정체를 알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다.

그 뒤로 시간을 정해 둘은 거울을 통해 대화했다.

마지막 대화는 작년 봄이었다.

이안드웨인이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후 방학에 다시 연락하자고 했지만, 약속된 날짜에 거울은 잠잠하기만 했다.

거울을 사용하지 못하는 환경인가 추측하기만 할 뿐이었다.

‘잘 지내고 있나?’

사실 이안드웨인이 황립 아카데미에 들어간 것은 리체의 조언 때문이었다.

점점 약해지는 몸이 아이가 맞게 될 죽음의 원인인 것 같았다.

약을 먹는 횟수를 티가 나지 않게 천천히 줄이면서 황립 아카데미에 입학하라고 했다.

기숙제인 아카데미에서는 가족과 함께 있지 않아도 되니.

‘작년에 수업 듣고 있는 걸 봤다고 했지.’

그것도 로벤하프에게 들은 내용이었다.

데온은 물어도 알아봐 주질 않았다. 

“내가 얼굴도 모르는 놈 근황을 왜.” 

데온이 그렇게 나올 줄은 예상했지만-.

“음, 리체. 나도 더 안 알아봐 줄래.” 

“……?” 

“잘생겼더라. 걔.” 

로벤하프까지 그렇게 나오다니.

둘 다 치사하다니까.

‘오빠는 수업 잘 들어갔나?’

문득 교실로 돌아가던 데온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래도 입학식이라고 일부러 와준 것 같은데.

오늘 일정은 모두 끝났으니, 쉬는 시간에 맞춰 강의실에 찾아가 볼까.

우선은 1학년 강의실로 올 필립을 만나러 가야 했다.

“……훌쩍.”

“저, 괜찮으십니까?” 

그러다 복도에서 필립을 발견했다.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 여학생에게 건네는 중이었다.

“필립, 무슨 일이야? 왜 여기에 있어?”

“아, 리체 아가씨! 볼일은 다 끝나셨어요? 세르디야 쪽 도련님을 우연히 만났는데, 총장실에 가셨단 얘기를 들어서 그쪽으로 가던 중이었어요. 그런데 이분께서 갑자기 넘어지셔서-.”

“기, 기사님. 사과 안 하셔도 돼요. 저는 괜찮답니다.”

“……네?”

필립은 황당한 목소리로 물었고, 리체는 둘의 대화에서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넘어졌다는 여학생은 우아한 느낌이 드는 귀족 영애였다.

붉은색 배지를 보아하니 데온과 같은 3학년.

괜찮다고 한 말과는 달리,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셀린느, 왜 울고 있어?”

때마침, 붉은색 배지를 단 학생 무리가 여학생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여학생에게 걱정된다는 말투로 물었다.

“울어?”

“무슨 일인데?”

“괘, 괜찮아. 저 기사분한테 놀라서…… 내 탓이야.”

“기사? 기사 때문에 그랬다고?”

나 때문에?

필립은 황당해 눈을 끔뻑였다.

“필립, 부딪혔어?”

“아뇨……?”

리체의 속삭임에 필립은 고개를 저었다.

스치기라도 했으면 덜 억울할 텐데. 여학생이 넘어졌을 때, 자신과 여학생은 족히 10m는 떨어져 있었다.

제 발치까지 책이 날라왔기에, 주워서 건네준 것뿐이고.

기사도도 발휘해 괜찮냐고까지 물어봐 줬는데.

“기사 주제에 무슨 짓이야?”

“귀족한테 잘못을 돌려?”

“제대로 사과해.”

우는 셀린느를 제외하고, 여섯 쌍의 눈이 일제히 필립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사람 수가 늘고 소란이 일어나니, 자연스레 구경꾼들이 생겼다.

필립을 가해자로 모는 학생들의 목소리에, 주변에 모인 학생들마저 그에 동조했다.

“무슨 일이야?”

“저 기사가 셀린느를 밀쳤나 봐.”

“뭐? 제정신이야? 누구 수행원인데?”

“몰라. 1학년 같은데.”

“어려서 저렇게 수준 떨어지는 기사를 데리고 왔나?”

수군거리는 소리가 리체와 필립의 귀에도 들어왔다.

너무해.

“제 기사가 한 일이-.”

리체가 앞으로 나가 필립을 변호하려던 순간이었다.

필립이 뒤로 손을 뻗어 그런 리체를 저지했다.

“저,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뭐든 죄송합니다.”

필립은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은 듯한 얼굴로, 셀린느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거기에 반응한 건 여전히 울고 있는 셀린느가 아닌, 그 옆의 학생들이었다.

“귀족을 밀치고 그게 다야?”

“제가 어떻게 하면 마음이 풀리시겠습니까?”

“무릎 꿇어.”

“……네?”

“무릎 꿇고 셀린느에게 사과해.”

마치, 본인들이 원하던 때가 왔다는 듯 기세등등한 태도였다.

그제야 필립은 저들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깨달았다.

트아리체 로드윅. 그녀의 기사가 자신들 앞에 무릎 꿇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생각이었다. 

‘리체 아가씨께서 평민 출신인 게 마음에 안 들어서.’

필립은 속으로 조소했다. 빌어먹을 귀족 나으리들.

가난한 평민의 아들이었던 필립은, 역병으로 부모님은 잃은 뒤 길거리로 내쫓겼다. 처절한 삶이었다.

12살이 되었을 때. 버린 농작물을 뒤지던 그에게 귀족의 사냥개들이 달려들었다.

귀족들은 한가로이 나무 그늘에 앉아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자신을 구경했다.

그래도 그들을 벌할 사람은 없었다. 자신은 평민이고 그들은 귀족이니까.

“죽었나.”

도망쳤지만 사냥개에 물린 상처로 바닥에 누워 헐떡이던 자신을 한 남자가 내려다보며 물었다.

귀족. 진절머리가 났다. 잘생기고 멀끔한 저 모습을 보니 더더욱.

흑발의 젊은 남자는 무감정한 붉은 눈으로 제게 말했다.

“안 죽었으면 따라와. 따뜻한 밥을 주지.” 

따뜻한 밥. 생을 뜨기 전 한 번이라도 배불리 먹고 싶어 필립은 블레이크를 따라갔다. 

최후의 만찬이라 생각하자. 운이 좋아 살아남으면 돈이나 훔쳐 달아나 주마. 

하지만 밥이 너무 맛있었다. 로드윅 가문을 떠날 수가 없었다. 필립은 그렇게 로드윅 가에 자리를 잡았다.

후에, 필립은 제드에게 왜 블레이크가 자신을 주웠는지 물었다가 황당한 답변을 받았다.

“그거? 우리 공작님 취미.” 

괴상한 취미도 다 있지. 

그렇게 로드윅 공작님께 목숨 빚을 졌다. 몇 년 뒤에는 리체 아가씨께도. 

감옥에서 깨어난 뒤,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 속에 리체를 공격하는 제가 있었다. 분명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음에도 그리 행동했다.

공작님께 받은 은혜를 원수로 갚을 뻔한 것을 리체 아가씨가 나서서 저를 살렸다.

그러니 아까울 목숨도, 자존심도 없지.

‘이대로 무릎 꿇지 않으면 불경죄인가?’

귀족 불경죄는 사형이었지? 필립은 볼을 긁적였다.

여기서 자신이 무릎을 꿇으면 리체 아가씨 꼴이 우습게 된다.

“그건 곤란한데요. 제가 한 일이 아니라서요. 저쪽 아가씨께서 혼자 넘어지신 겁니다.”

“뭐?”

“셀린느랑 우리가 너한테 누명을 씌웠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렇게까지 말씀드리진 않았는데요. 혹시, 아니시겠지만, 짚이시는 일이라도……?”

필립의 말에 주변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평소 모범생에 백작의 딸인 셀린느가 그런 짓을 했겠느냐는 말이 우세했고.

여론은 다시 필립을 범인으로 몰고 가는 듯했다. 

“거짓말이네요.”

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 * *

리체는 학생들 사이로 나오는 남학생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필립의 옆으로 몸을 숨겼다.

“……?”

“쉬잇.”

그러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절 보는 필립에게 검지를 입술 앞에 세우고 숨을 죽였다.

“너, 너는…….”

맨 처음 필립에게 무릎 꿇으라 말한 남학생이 당황해 소년을 바라봤다.

이안드웨인 게르웨르.

이미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한 얼굴이기에, 그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다.

‘이안드웨인이 왜 여기서 나와?’

낭패였다.

게르웨르 공작 가문 능력자의 혜안.

하지만 자신들이 꾸민 짓을 순순히 밝히기에는 보는 눈이 많았다.

이대로 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옆의 학생이 이안드웨인을 향해 말했다.

“무, 무슨 근거로? 네가 봤어?”

시치미를 떼면 이안드웨인이 상황을 눈치채고 편을 들어줄지도 모른다. 질문에는 그런 희망이 옅게 깔려 있었다.

같은 귀족인 데다가, 자신들은 이안드웨인의 1년 선배이니.

“아니요. 근거도 없고 보지도 못했어요.”

“그, 그래?”

“다만, 확인해드릴 수는 있죠.”

하지만 희망일 뿐이었다.

이안드웨인은 그들을 빤히 응시하며, 앞으로 한 발짝 움직였다.

그 기백에 일을 꾸민 학생들이 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가장 안쪽에 있던 셀린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만 가요.”

“하지만, 셀린느. 저 기사가 너를…….”

“이만 가자고요.”

언제 울었냐는 듯, 눈물은 그친지 오래였다.

학생들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쳇. 이게 무슨 창피야.”

“거기서 게르웨르가 나올 줄 알았나. 그 평민 코 좀 납작하게 해주려고 했더니.”

“아, 재수 없어. 어떻게 복수하지? 졸업하면 높으신 공녀님이 돼버리니 아카데미에 있을 때가 기회인데.”

“그러니까. 가문 떼고 붙을 수 있는 곳은 아카데미밖에 없잖아.”

세수하러 기숙사로 간다던 셀린느를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이 계단을 내려가던 그때였다.

“야.”

무시할 수 없는 위협적인 목소리에, 학생들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위로 올렸다.

그리고, 위층 계단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누군가.

“너희들 내 동생한테 무슨 짓 했냐?”

신경질적인 말투. 잔뜩 찌푸린 미간. 화난 붉은 눈.

아니, 다 필요 없고.

‘……데르케디온 로드윅.’

존재 자체가 공포였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얼굴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사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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