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말을 못 하겠어
“다 갔네?”
이안드웨인은 학생들이 떠난 텅 빈 복도를 보며 말했다.
주모자들이 도망을 갔으니, 동조했던 구경꾼들도 눈치를 보며 하나둘 흩어졌다.
필립은 이안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게르웨르 공작 가문의 도련님이시죠?”
“맞아요. 이안드웨인 게르웨르입니다.”
“저한테 말씀 안 높이셔도 되는데요……?”
왜 공자씩이나 되는 분이 제게 말을 높이는지.
필립의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에, 이안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카데미에서는 가문이나 신분 상관없이 평등하니까요. 그리고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잖아요?”
배움 앞에서는 가문의 높고 낮음 없이 평등하다.
초대 황제가 황립 아카데미를 설립할 때 정한 규정이었다.
아카데미 안에서 학생들을 가문의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아까처럼 악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아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올해 스물이거든요. 생각하신 것보다 어릴 테니 편히 말씀해주세요.”
이안의 말에 그가 썩 마음에 든 필립은 넉살 좋게 말을 걸었다.
질문과 대답이 오가며 대화가 이어졌다. 이안이 종종 필립 뒤에 숨은 리체에게 말을 걸었으나, 대답하는 건 필립이었다.
‘우리 아가씨가 왜 이러시지?’
대답하면서도 속으로 의문을 갖기는 했지만.
필립은 리체가 이러는 이유를 추측해봤다.
설마 게르웨르 도련님이랑 말하는 걸 부끄러워하시는 건가.
하긴 우리 데온 도련님만큼이나 잘생기긴 했어. 게다가 오빠랑 또래 남자애는 느낌이 또 다르지.
‘제드 씨한테 리체 아가씨가 부끄러워하시는 모습을 봤다고 자랑해야지. 분명 배 아파할걸. 아가씨 바보니까.’
분해할 제드의 모습을 생각하니 기분이 즐거워졌다. 즐거우니 말도 술술 나온다.
필립은 이안에게 질문했다.
“게르웨르 가문의 혜안은 본질을 본다던데, 능력을 사용하시면 그런 게 다 보이시는 겁니까? 아까 그 학생분들이 무슨 짓을 한 건지도요?”
말하면서도 믿기지 않는 능력이었다.
그런 눈이 있으면 어떤 임무라도 죄다 수행할 수-.
“아, 지금은 능력을 못 써요.”
“못 쓰신다고요?”
필립이 놀라 묻자, 이안은 입고 있는 교복 셔츠 깃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찰랑. 맑은 소리를 내며 목걸이 하나가 밖으로 나왔다.
“제가 몸이 약해서, 아버지께서 능력을 봉인하는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있으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눈이 검은색이죠.”
“아……. 제가 괜한 걸 여쭤봤네요. 죄송합니다. 게르웨르 공작 가문의 능력자들은 능력을 사용할 때만 금색으로 변하는 줄 알았어요.”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이안은 덕분에 학생들이 속아 넘어줬다며 다행이라고 웃었다.
아티팩트 이야기는 비밀이라는 이안의 말에, 필립이 제 입이 방정이라며 다시 사과했다.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목걸이 얘기는요.”
‘목걸이?’
둘의 대화로 추측해보건대, 게르웨르 공작이 준 목걸이 얘기일 터였다.
거울로 전해 듣기만 했던 목걸이의 실물에 리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
이안이 손을 흔들자, 리체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평소답지 않은 리체의 인사에 필립은 리체가 부끄러워한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리체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안드웨인이 내 목소리를 아는걸.’
얼굴은 천으로 거울을 덮어 모르게 했다고는 해도, 목소리를 가릴 방법이 없었으니.
자신이 이안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처럼, 이안도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얼굴을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이네.’
리체가 거울 속 이안드웨인을 본 것은, 파이톤스가 히켄카에게 당하고 난 뒤 처음으로 거울에 말을 걸었을 때였다.
거울 너머의 아이가 파이톤스가 말한 것처럼 능력자, 그러니까 이안드웨인 게르웨르라는 걸 확인해야 했다.
그래서 자신이 거울에 비치지 않는 각도로 멀찍이 떨어져 거울 속 아이의 기운을 확인했다. 손을 대고 있어야 거울이 작동했기에, 조금 힘들긴 했지만.
이안드웨인을 본 것은 그때가 전부였다. 게르웨르 공작가에서 지내던 이전 생에서도, 아들을 견제하는 게르웨르 공작 때문에 리체는 이안드웨인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이런 얼굴이었구나.’
리체는 이안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정확히는 안색을 살핀 것이다. 밥은 잘 먹고 다녀 영양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아픈 곳은 없는지.
금색 머리카락이 퍼석하지 않고 윤이 흘렀다.
아티팩트의 영향을 받아 검은색으로 변한 눈은, 금빛 속눈썹 때문인지 별들이 반짝이는 고요한 밤하늘처럼 보였다.
눈그늘도 없고, 보기 좋은 두께의 입술도 갈라지지 않고 매끈했다.
살이 오른 볼은 홍조를 띠고 있었는데, 리체가 가장 안심한 부분이었다.
‘다행이다. 혈색이 좋아서.’
가슴 쪽에 검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지만, 저 정도면 양호했다.
히켄카의 조건과는 별개로 건강해진 이안드웨인의 모습이 뿌듯해, 리체는 후후 웃음을 지었다.
‘아, 이제 가야지.’
어쨌든. 이안과 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여기 계속 있어서 뭣하겠는가.
리체는 필립의 팔을 끌어 귀를 빌려달라는 시늉을 했다.
필립이 고개를 숙여 높이를 맞추자, 리체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귓속말했다.
‘뭐…… 하는 거지?’
이안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봤다.
사실, 조금 전 이안은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그냥 지나갈 생각이었다. 소란스러운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니.
“아, 나 누군지 알아. 저 1학년.”
“누군데?”
“트아리체 로드윅.”
“헉. 진짜?”
그런데 근처 학생들의 대화를 우연히 들었고, 신경이 쓰였다.
제가 8살이었던 해, 분노한 아버지가 통신구를 향해 소리쳤던 말의 주인공이었던 아이를.
“분명 로드윅이다. 로드윅이 내 르티옴을…….”
이안은 문틈 사이로 뜨문뜨문 흘러나왔던 게르웨르 공작의 목소리를 지금까지도 기억했다.
로드윅, 수양딸, 그리고 르티옴.
그 수양딸이 게르웨르 공작이 찾는 르티옴이 아니었다는 것까지.
‘아버지가 집착했던 아이…….’
그래서 슬쩍 학생들 속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학생들과 대립하는 기사의 뒤에서 당황한 듯 허둥거리는 아이. 그러다 갑자기 아이의 표정이 달라졌다. 마치 희생하기를 결심한 듯한.
“거짓말이에요.”
그래서 나서버렸다.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저 애가 나서 버릴까 봐.
그러다 트아리체와 그 수행원 앞에서 아티팩트 이야기까지 하게 될 줄 몰랐지만.
왜인지 모르게 편안한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해버렸다.
같은 능력자 가문이니까 이해해주겠지.
아니면 일전에 만났던 로드윅 공작이 아티팩트를 알아봤으니, 트아리체는 벌써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검은 눈이군.”
며칠 전. 자신을 만나고 싶다고 수행원을 보냈던 로드윅 공작은, 몇 마디 안부를 묻고 제 눈에 관해서도 물었다.
“능력의 발동을 막는 아티팩트?”
“네. 벗겨지지 않아요.”
로드윅 공작에게만 한 이야기였다. 자신의 아버지가 제게 준 아티팩트에 벗겨지지 않는 마법을 걸어놨다는 이야기.
그것을 들은 로드윅 공작은,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자신을 찾아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돌아갔다.
“아, 아…… 제가요?”
이안은 제 앞에서 수행원에게 귓속말하는 리체를 가만히 지켜봤다.
‘요정이 인간으로 변해서 움직이는 거 같아.’
비현실적인 외모의 아이는, 움직이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했다.
그 사이, 필립은 리체와 속닥거리더니, 알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도련님. 저희 아가씨께서 오늘 일은 무척 감사드린다고, 다음에 꼭 답례하신대요.”
“아, 신경 안 써도 괜찮은데.”
도리도리.
이안은 고개를 젓는 리체에게 살짝 아쉬움을 느꼈다. 자신과는 말하기 싫은 걸까.
필립이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은 하실 일이 있으셔서 이만 가봐야 하신대요. 다음에 만나면 인사드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리체는 이안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게 작별 인사라는 걸 알아차린 이안이 손을 흔들었다.
“안녕. 다음에 봐.”
“아가씨와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도련님도 조심히 가세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까지 인사를 끝내자, 리체는 몸을 돌려 걸음을 걸었다.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이안도,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 * *
황립 아카데미에서는 학생 한 명당 방 하나씩을 배정해줬다.
학비가 비싼 데다가 귀족들만 다니는 아카데미니, 기숙 시설도 꽤 좋은 편이었다.
아카데미 기숙사에서 배정해준 리체의 숙소.
“아-가-씨. 뭐예요? 뭐예요?”
거실 하나와 학생용 방 한 개, 수행원용 방 한 개가 있는 적당한 넓이의 숙소였다.
거실의 나무 의자에 걸터앉은 필립은, 소파에서 내일 필요한 교재를 정리하는 리체에게 물었다.
“인사는 매번 완벽하게 하시는 우리 아가씨께서 왜 게르웨르 도련님께는 인사도 못 하셨을까? 설마 그 도련님한테 반하신 거예요?”
히죽히죽.
필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로드윅 공작성에 들어왔을 때 제드에게 검술을 배웠다더니, 검술 말고도 다른 걸 배운 게 분명했다.
리체는 절 놀리는 필립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럼 왜 그러신 건데요?”
“그, ……비밀이야.”
마땅히 핑계로 삼을 거짓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안드웨인과 목소리만 아는 친구 사이였는데,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라는 말은 자신이 들어도 이상했으니까.
필립은 비밀이라는 소리에 심각한 척 손가락으로 턱을 만졌다.
“우리 아가씨께서 첫사랑이라니. 이번 주 가주님께 보고를…….”
“필립, 오늘 있었던 일 아빠한테 얘기하지 마.”
리체는 단호하게 필립의 장난을 차단했다.
필립이 손을 떼고 리체에게 물었다. 이번엔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어, 그렇지만, 말씀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 귀족들에게 로드윅을 건드린 본보기를-.”
“말하면 안나를 수행원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드릴 거야.”
“절대 안 하겠습니다. 전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는걸요.”
필립은 입에 단추를 차는 시늉을 했다.
‘명심해. 필립. 안나 씨는 하이에나다. 방심하면 안 돼.’
수행원 자리를 안나 씨에게 뺏길 수 없지.
무엇보다 자신은 리체 아가씨에게 충성 서약을 한 기사가 아닌가.
“고마워. 필립.”
“뭘요.”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필립의 모습에, 리체는 그제야 안심하고 교재의 책장을 넘겼다.
‘아빠한테 걱정거리를 주고 싶지 않아.’
블레이크에게 아카데미에서 마찰이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첫날인데. 분명 걱정할 거다.
교내에 소문이 나서 데온과 로벤하프가 알게 되면 블레이크의 귀에도 들어갈지 몰랐지만.
‘당장은 몰랐……으면…….’
하암. 리체는 밀려오는 졸음을 떨치려 고개를 흔들었다.
“아가씨, 졸리시면 들어가서 주무세요.”
필립은 책 속으로 들어갈 듯 머리를 푹 숙였다 다시 들기를 반복하는 리체를 보며 말했다.
피곤하실 만도 하지.
아침부터 저택을 떠나서 입학식에, 강의실에, 총장실에, 귀족들 시비에.
저녁에는 데온 도련님이랑 놀아주시고 숙소에 짐까지 푸셨으니.
하루가 길었다.
“응…….”
리체는 필립의 말에 순순히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에 곯아떨어졌다.
* * *
[……티옴.]
“…….”
[자?]
“…….”
[야! 계약자!]
리체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