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큰일 나
잠에서 깬 리체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파, 파이톤스?”
하지만 방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밤이 깊었는지, 어두운 창밖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분명히 파이톤스였어.’
히켄카가 온 건가?
리체는 슬리퍼를 신고 저벅저벅 걸어가 방문을 슬쩍 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필립은 검을 머리맡에 둔 채, 거실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다.
“히켄카……?”
“…….”
조심스럽게 불러봤지만 대답도 미동도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리체는 문을 닫고 침대 아래로 들어가 숨겨놓은 나무함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잠을 자는 듯 눈을 감고 있는 파이톤스의 다람쥐 몸이 있었다.
리체는 힘을 뺀 손가락으로 다람쥐를 흔들어보았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파이톤스? 파이톤스.”
그러나 이쪽도 대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 들었는데. 꿈을 꾼 건가.
“…….”
순간 들었던 기대감이 한순간에 떨어지자, 금세 코끝이 찡해졌다.
파이톤스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네가 없는 동안 혼자 열심히 노력했다고, 더 노력해서 꼭 널 꺼내주겠다고. 너에게 믿음직스러운 계약자가 되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아직도 만나지 못했다.
‘나는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거야? 히켄카가 올 때까지?’
리체는 창밖을 바라봤다.
과거, 보름달이 뜨는 날에 리체는 마물의 숲을 몇 번 찾았었다.
호숫가를 찾아, 별들에게 조언을 구할 생각이었다.
파이톤스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몰래 공작성을 나가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어찌 숲을 찾아가도, 입구를 굳게 닫은 숲은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분명 파이톤스와 함께 갔을 때는 밤이어도 입구가 열렸었는데.
석양이 지기 전에 들어가도 마찬가지였다.
숲에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마물의 숲이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을 때, 리체는 드디어 호숫가로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숲이 움직임을 멈춘 뒤. 기대에 부푼 리체의 눈앞에 보인 건 닫힌 숲의 입구였다. 마물의 숲이 리체를 쫓아냈다.
[보름달이 떴어! 오늘이야! 계약자!]
창밖의 보름달을 보니 파이톤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당장에라도 몸을 일으켜 호숫가로 가자고 말할 것만 같았다.
울적함에 리체는 다람쥐의 몸이 누워 있는 나무함을 창틀에 놓았다. 달빛이라도 쐬어주고 싶었다.
“……?”
누군가 기숙사를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리체는 창에 이마를 가까이 붙였다.
어두웠지만 반짝이는 금발이 눈에 잘 띄었다. 그리고 리체에게만 보이는 검은 기운.
“이안?”
어디를 가는 거지? 학생들의 밤 외출은 금지돼 있었다.
규칙을 위반할 성격은 아닌데.
“뭐 해?”
그러다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리체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고 문틀에 기대서 있는 필립.
아니, 오른쪽 눈이 금색이었다.
“히켄카!”
“이거, 르티옴이 이렇게 날 반겨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히켄카는 리체에게 걸어갔다.
창틀에 놓인 파이톤스의 다람쥐 몸을 보고는, 씩 웃으며 물었다.
“만났어?”
“누굴?”
“파이톤스. 잠깐 꺼내줬는데.”
리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아까 들은 건 파이톤스의 목소리였다.
“어, 어디에 있어?”
“못 본 사이에 좀 자랐네. 여전히 어리지만.”
히켄카는 대답하지 않고 리체를 이리저리 관찰하며 다른 소리를 했다.
그런 히켄카의 머리 모양은 평상시 아무렇게나 내버려두던 필립의 것과는 달랐다.
쓸어올린 앞머리 아래 훤히 드러난, 색이 다른 한 쌍의 눈이 먹잇감을 보듯 번뜩였다.
“어때, 르티옴.”
분명 겉모습은 필립인데 이상하게도 히켄카가 빙의했을 때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위험한 분위기가 풍겼다. 히켄카는 허리를 숙여 리체의 귓가에 속삭였다.
“3년 동안 고민해봤어? 그 정도면 이제 날 선택할 마음이 들었을 텐데.”
“전혀.”
리체는 단호히 대답했다.
“약속대로 파이톤스를 만나게 해줘. 네가 말한 조건대로 아카데미에 입학했잖아.”
히켄카는 그런 리체를 바라보다, 허리를 세워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끝났어. 더 못 꺼내.”
“……뭐?”
매서워진 리체의 눈초리에 히켄카는 피식 웃었다.
“성질부리는 법도 배웠네?”
“…….”
“파이톤스를 못 꺼내는 건 내 힘이 아직 충분히 돌아오지 않아서 그래. 오늘은 시험 삼아 온 거지.”
“그러면 또 기다리기만-.”
“파이톤스는 조만간 다시 꺼내줄게. 너희 시간으로, 한 달 안에?”
히켄카는 그렇게 말했다. 리체는 기간이 정해지자 겨우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르티옴.”
잠시 침묵이 찾아들자, 히켄카가 리체를 불렀다.
굳은 입매와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
“너야말로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
분노한 목소리로 히켄카가 물었다.
섬뜩한 기분이 드는 것과 별개로, 황당한 소리였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냐니.
분명 히켄카는 제게 필립을 감옥에서 꺼내 공작성에 두고, 이안드웨인을 살리라는 조건을 걸었다.
리체는 히켄카에게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필립은 공작성에 남았고, 이안드웨인은 좀 더 기다려야 해. ……내가 겪은 미래에서는 16살에 죽었으니까.”
히켄카는 리체의 양어깨를 잡았다.
아파. 리체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말한 거 잊었나? 곧 죽을 거 같은 놈이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그래서 내가 알 거라며. 내가 들은 건-.”
“네가 겪은 미래와 이번 생이 똑같이 흘러갈 거 같아? 너조차도 이렇게 바뀌었는데?”
“……무슨 소리야?”
“르티옴, 너는 내가 오늘 온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해. 아니면 파이톤스를 영영 보지 못했을 테니까.”
히켄카는 혼잣말로 짧은 욕설을 내뱉고 리체의 어깨를 붙잡은 손을 뗐다.
“따라와. 그놈, 오늘 밤에 죽으니까.”
* * *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밤에 기숙사를 나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처음 인지한 건 입학하고 한 달째 되던 날.
분명 침대에서 잠들었는데, 눈을 뜬 곳은 밖이었다.
그 뒤로 그런 일들이 달에 한두 번꼴로 일어났다.
어떤 날은 기숙사 옥상, 어떤 날은 분수대 안, 어떤 날은 내려가는 높은 계단 앞.
이안은 그때마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다.
이안의 수행원은 가문에서 형식적으로 붙여준 일개 하인이었기에, 그가 밤에 나갔다 들어왔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몸이 이상해. 죽으려고 하는 것 같아.’
능력을 사용한다면 이 끔찍한 몽유병의 원인을 알 테지만, 벗겨지지 않는 아티팩트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서서히 궁지로 몰아넣는. 마치, 제가 태어나고 자란 그 저택에서처럼.
추측이 확신으로 변하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안의 주변에서 그런 일을 꾸밀 사람은 한 사람뿐이니.
‘아버지.’
범인을 알았음에도 이안은 좌절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그런 인물임을 애초에 알았기에, 무너질 기대조차 없었다.
결국 제 아비는 저를 죽일 것이다.
다만.
거울 속 그 아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내가 살아 있어봤자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3년 전, 여덟 살의 이안은 거울 너머, 모습이 보이지 않는 아이를 향해 말했다.
그렇게 말한 것은 당시 이안의 세계는 게르웨르 공작의 저택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도둑 취급하는 아버지, 자신을 귀찮은 짐처럼 생각하는 저택의 사람들밖에 없는 세계.
[내가 있잖아.]
“너?”
[나는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넓은 세상을 보고 소중한 사람들을 만들면 좋겠어. 누군가 부탁해서 하는 말이 아니야.]
그래서 살아보려 했다.
자신이 살길 원하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아이를 위해.
아이의 조언대로 먹는 약도 줄이고 황립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게르웨르 공작이 입학을 허락하는 대신 조건으로 건 아티팩트까지 차며.
건강해지는 걸 느꼈고, 저택을 벗어나니 트이는 숨통을 느꼈다.
‘나는 살아 있어.’
빨리 그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네가 말한 것처럼, 나는 살아있다고. 조금은 넓은 세상을 본 것 같다고.
하지만 방학을 맞이해 저택으로 돌아온 이안을 맞은 건, 산산조각난 거울이었다.
“네 어미가 이상한 걸 남겼더구나. 반으로 쪼갠 마석을 심은 거울이라니. 나머지 반은 다른 물건에 심었겠지. 저택에 숨어든 첩자 놈들이 사용할까 봐 내가 깼다.”
게르웨르 공작은 거울 조각들을 황망히 주워 모으는 제 아들을 향해 그리 말했다.
이안은 깨진 거울 앞에 엎드려 절망했다.
네가 누군지도 알지 못하고 모든 게 끝나버렸어.
그 뒤, 이안은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잠시나마 생기를 느꼈던 이전과 달리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에 감흥이 없어졌다. 그랬는데.
‘오늘은 이상했지.’
이안은 오늘 만났던 아이를 떠올렸다.
트아리체 로드윅.
기사를 위해 나서려 결심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는데, 몸의 감각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다시 만나도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한 번 더 보고 싶다.’
그런데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자신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늪 속에 있는 것 같았다.
* * *
필립은 마물한테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누군가. 리체 아가씨의 유일한 기사였다. 리체 아가씨의 안전한 잠자리를 위해서 침입자 한 놈도 허락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침입자에 대비해 소파에서 잠을 청했는데, 눈을 뜨니 리체 아가씨와 바깥을 걷고 있었다.
별이 무수한 밤하늘, 커다란 보름달, 사방에서 들리는 벌레 울음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 한밤중의 교정.
“뭐지?!”
“……?”
필립은 우뚝 서서 놀란 소리를 냈다. 그 사이, 필립을 앞지른 리체가 뒤를 돌아봤다.
왜 저래. 히켄카.
……아닌가?
“필립이야?”
“필립인데요.”
그럼 제가 누구란 말인가.
필립은 눈을 끔뻑였다. 양쪽 눈이 갈색이었다.
‘빙의가 풀렸나 보네.’
리체는 필립을 향해 손짓한 뒤, 수풀 사이로 난 길을 걸었다.
“가자. 이안드웨인을 찾아야 해.”
“이안드웨인? 게르웨르 도련님이요?”
리체 아가씨께서 그 도련님을 왜……?
전후 사정을 모르는 필립으로서는 깜짝 놀랄 만한 소리였다.
한밤중에 남학생을 찾으시는 리체 아가씨.
필립의 머릿속에서 제 뒤에 숨어 부끄러워하던 리체의 모습이 확대되어 떠올랐다.
자신이 리체 아가씨를 놀리던 건 반쯤은 장난이었는데.
‘진심이셨단 말이야?!’
필립은 소름이 부르르 돋았다.
‘큰일 나.’
큰일 난다. 누가? 자신이.
필립은 로드윅 공작성에 득실대는 리체 아가씨 바보들을 떠올렸다.
그 꼭대기에 대왕처럼 자리 잡은 무척이나 높으신 분도 계시지.
블레이크의 붉은 눈이 자신을 보는 듯했다.
그뿐인가. 당장 저 기숙사에만 해도-.
“……존경합니다. 살려주세요. 데온 도련님.”
“…….”
절로 자신이 맞게 될 미래가 그려졌다.
로드윅의 붉은 눈 두 쌍은 제게 너무 가혹했다.
필립은 리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왜, 왜 그래?”
“안 됩니다.”
“어?”
“안 된다고요-! 아가씨께서는 아직 열 살이란 말입니다. 이런 짓을 하시기에는 일러요!”
“조, 조용히……!”
필립의 목소리에 놀란 리체가 두 손으로 필립의 입을 틀어막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필립?”
“읍읍(절대) 읍으읍(안 돼요).”
리체는 고개를 젓는 필립을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바라봤다.
첨벙!
그러다 심상치 않은 물소리가 들렸다.
필립과 리체가 순식간에 바뀐 눈빛을 교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