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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33)화 (33/89)

33화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물소리가 들린 방향은 아카데미 내에 작은 인공호수가 있는 곳이었다.

“가보자.”

“네.”

필립은 리체를 안은 채 달렸다. 순식간에 인공호수 앞에 도착했다.

잠잠한 수면, 밤바람에 조용하게 흘러가는 물결.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한 풍경이었다.

“물고기 소리였을까요?”

어린아이만 한 커다란 물고기가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면 비슷한 소리가 났을 수도 있었다.

리체는 필립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집중하며 호수를 살폈다.

그러다 발견했다.

작은 아치형 다리 밑. 그 수면 아래에서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검은색의 기운.

“필립, 저기! 저기에 사람이 빠졌어!”

“네?!”

리체의 다급한 목소리에 필립은 상의를 벗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람이라니. 이 밤중에?

‘정말 있잖아.’

다리까지 헤엄쳐 간 필립은 물속에 가라앉는 소년을 붙잡았다.

잠든 듯 눈을 감은 얼굴은, 제가 아는 이의 것이었다.

‘게르웨르 도련님?!’

왜 이안이 여기에 있는지, 왜 리체는 이안을 찾아야 한다고 했던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필립은 정신을 잃은 이안의 팔을 제 어깨에 둘러메고 수면 위로 올라갔다. 헤엄쳐서 물 밖으로 걸어 나오니, 그 사이 리체가 근처 평평한 바닥을 찾아 손을 흔들었다.

“여기! 이안드웨인은 어때?

“심장이 안 뛰어요.”

“뭐?”

필립은 급히 바닥에 이안을 눕히곤, 양손으로 가슴팍을 짧게 눌렀다 떼기를 반복했다.

“게르웨르 도련님! 정신 좀 차려보세요!

하지만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안의 숨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리체는 이안을 향해 소리쳤다.

“이안드웨인!”

“…….”

“죽으면 안 돼!”

이대로 죽으면 안 돼.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거울을 향해 한 말은 진심이었다. 히켄카의 내건 조건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목소리가 닿았으면 했다.

이안은 외로운 아이였다.

아무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 저택이란 이름의 감옥 같은 곳에서, 이안드웨인은 희망을 잃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지난날, 게르웨르 저택 지하실 속 우리에 갇혀 쓰러져 있던 자신처럼.

‘아직 아무것도 해본 게 없잖아. 넓은 세상을 보고 소중한 사람들을 만들겠다고 그랬잖아. 죽지 마, 이안……!’

리체는 이안의 손을 잡았다.

“제길! 게르웨르 도련님!”

필립은 이안의 가슴팍을 계속해 눌렀다 떼며 분통을 토했다.

이 방법이 아니다.

물에 빠져 호흡이 멎었을 때는 분명,

‘입으로……!’

숨을 밀어 넣어야 한다.

필립이 이안의 얼굴 위로 자신의 얼굴을 가져간 순간이었다.

“콜록.”

“도, 도련님!”

이안이 물을 토해내자, 리체가 급히 이안의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다시금 숨을 쉬는 그를 보며, 리체는 안도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리체의 손가락은 살갗이 찢겨 붉은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다행이야.’

정화의 힘을 잠깐 사용했다.

능력자들의 기운은 심장에서부터 쌓이니, 자신의 정화가 심장까지 닿으면 뛸지도 모른다는 찰나의 생각에서였다.

도박 같은 일이었지만, 다행히 성공한 모양이었다. 정화 후 찾아오는 통증이 처음으로 뿌듯했다.

이안은 잠시 눈을 뜨는가 싶더니, 다시 정신을 잃었다.

“이제 괜찮은 거야?”

“네. 숨이 돌아오셨으니까 시간이 흐르면 깨어나실 거예요.”

“고생했어, 필립. 덕분에 이안드웨인이 살았네.”

리체는 해맑게 웃었다. 필립도 바닥에 주저앉으며 시원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뭘요. 아가씨께서 도련님을 발견하신 덕분이죠.”

그제야 한숨 내려놓은 필립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손으로 마구 털고는, 벗어놓았던 상의에 머리를 꿰며 리체에게 물었다.

“아가씨, 게르웨르 도련님이 사고를 당할 줄 예상하셨어요?”

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지난 세월 동안 말투에서 자신의 연기가 티 난다는 걸 깨달은 리체는, 거짓말을 할 때는 종종 행동으로 말을 대신하곤 했다.

필립은 그걸 몰랐기에,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 수면이 잠잠했던 걸로 봐서는 잠든 도련님을 누가 물에 빠트린 것 같아요.”

스스로 뛰어들었다 할지라도, 수면이 그렇게 잠잠했을 리 없었다. 

인간에게는 생존본능이라는 게 있기에 적어도 몇 번은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허우적거렸을 테니. 

하지만 잔물결도 없던 데다가, 처음 들렸던 물소리 외에 다른 소리가 들린 것도 아니었다.

“범인이 누굴까요? 아가씨도 모르시죠?”

끄덕.

“하긴, 저희 여기 온 지 하루밖에 안 됐으니깐요. 와, 하루가 참 기네요.”

모른다고 했으나, 짐작은 갔다. 아마 게르웨르 공작이 무슨 짓을 꾸민 거겠지.

히켄카가 의미심장한 소리를 하기도 했고.

“있잖아, 르티옴. 인간들은 결국 마지막이 똑같더라. 아무리 운명을 비틀어도 능력자들은 우리 힘의 부작용 때문에 죽고, 이안드웨인은……. 아, 넌 어떨 거 같아?”

“나?”

“네 마지막도 똑같을 거 같아?”

리체는 머리를 흔들었다. 히켄카가 한 이상한 소리는 지금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이번 일은 가주님께 보고드리는 편이 좋겠어요. 아가씨께서 휘말려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깐요.”

“……응. 그게 좋을 거 같아.”

블레이크라면 이안을 도와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지금 이안에게는 편이 필요했다.

리체는 몸을 일으켜 옷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일단은 돌아가자. 젖어서 감기 걸리겠어. 필립도, 이안드웨인도.”

“네.”

필립이 이안을 업고, 세 사람은 리체의 속소에 도착했다.

필립은 수건으로 이안과 자신의 물기를 닦고는 리체에게 말했다. 

“아가씨, 먼저 들어가서 주무세요. 저는 게르웨르 도련님 방에 데려다 드리고 올게요.” 

“응. 필립. 조심해.” 

“네. 걱정하지 마시고 주무세요.”

그러고 호기롭게 등에 업은 이안을 방에 데려다주러 남자 기숙사 건물까지 걸어온 것까지는 좋았으나-.

“……나 이 도련님 방 모르지?”

필립은 볼을 긁적였다.

그래서 차선책을 택했다.

* * *

“……이 컴컴한 밤에 왜 남의 방 창문을 멋대로 따고 들어왔을까?”

한밤중.

거실의 소란에 잠에서 깬 로벤하프는 제 수행원이 검으로 목을 겨누고 있는 침입자를 바라봤다.

“응? 필립?”

“하하, 로벤하프 도련님. 안녕하세요?”

로벤하프의 웃는 얼굴 속에 짜증 난 기색이 역력했다. 

필립은 이안드웨인의 방을 몰라서 로벤하프를 찾아오게 됐다는 연유를 짧고 굵게 설명했다.

“그래서? 그런 일이면 너희 도련님인 데르케디온한테 가면 되잖아.”

“로벤하프 도련님도, 참. 저도 제 목숨은 아까운 줄 알거든요.”

“무슨 소리야?”

“우리 데온 도련님 잠을 깨웠다가 무슨 변을 당하려고요.”

“나는 만만하다는 거야?”

로벤하프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아, 맞다. 저 도련님, 히베츠만이었지. 귀족 자존심이 대단한.

“아뇨, 아뇨. 솔직히 데온 도련님이 이쪽 도련님 방을 아실 리도 없고요. 로벤하프 도련님이시면 아실 것 같아서 찾아왔죠.”

필립의 말이 그럴듯했다. 데온에게 가봤자 모른다고 꺼지라 했겠지.

‘음, 이안드웨인 게르웨르…….’

리체가 관심 있어 하는 것 같아서 별로 도와주고 싶지는 않은데.

하지만 저 푹 젖은 옷이 마음에 걸렸다.

‘어쩔까.’

로벤하프는 결정을 내렸다. 

마음에 걸리지만 제 수면 시간을 내어 이안드웨인을 도울 만큼 희생적인 사람이 아니다. 자신은.

“난 몰라. 걔 데리고 돌아가. 필립.”

로벤하프는 하품하며 거실과 이어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어진 필립의 말이 그의 발을 잡았지만.

“……제가 리체 아가씨의 하나뿐인 수행원인 거 아시죠?”

우뚝.

“수행원은 아가씨 일정도 다 아는 데다가, 옆에서 모시는 시간도 많고…….”

“…….”

파닥파닥.

대어가 눈앞에 드리워진 낚싯바늘의 미끼에 흥미를 보였다.

필립은 아닌척하며 제 쪽을 슬그머니 보는 로벤하프에게 말을 흘렸다.

“제가 가주님께 일주일에 한 번씩 보고도 나가는데…….”

“이안드웨인 두고 가. 필립.”

“그렇지만, 오밤중에 도련님께 실례가 아닌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방에만 데려다주면 되잖아.”

로벤하프는 능청을 떠는 필립을 가소롭게 바라봤다.

그는 필립을 향해 말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대신.”

“네.”

“리체……한테 말 잘해주고…….”

같잖다는 듯 시작한 말치고 점점 목소리 크기가 줄어 들어갔다.

필립은 로벤하프의 빨개진 귀 끝을 바라봤다.

로벤하프 도련님도 순정파라니까.

‘우리 아가씨 매력은 도대체 어디까지인 걸까…….’

정작 리체 아가씨 본인은 그 매력을 모르는 게 옆에서 보기 재밌지만.

필립은 여부가 있겠느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졸지에 일을 떠맡게 된 로벤하프의 수행원이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필립을 흘겨봤다.

그 뒤, 이안은 잠든 채 로벤하프의 새 잠옷을 하나 얻어 입고, 수행원에게 업혀 자신의 침대 위에 눕게 되었다.

* * *

“이안드웨인!” 

이안은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구야?’

누구길래 자신을 이토록 절박한 목소리로 부르는 걸까.

“죽으면 안 돼!”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이안은 그 목소리가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것이란 걸 깨달았다.

‘……너야?’

그 아이였다. 거울 속의.

지금 내 옆에 있는 거야? 눈을 떠서 확인하고 싶었다.

죽지 않을 거라고 대답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꺼풀이 돌덩이처럼 무거워 올라가지 않았고, 축 늘어진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결국 날 죽였구나.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거라.”

이제 와 로드윅 공작의 말이 떠오르는 건 어째서일까. 자신은 그에게 도움을 구할 생각이 없었는데. 

“콜록.” 

기침과 함께, 감각이 깨어났다.

살짝 들어 올린 눈꺼풀 아래, 초점이 잡히지 않은 검은 눈동자에 은색의 달이 비쳤다.

‘정말 너야?’

하지만 달싹거리는 입술은 끝내 말을 내뱉지 못했다.

‘알았다.’

이안은 깨달았다. 로드윅 공작의 말이 떠오른 이유를.

이제 와 삶이 아쉬워졌다는 걸.

그게 다 그 여자애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걸.

이안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난 건, 자신의 방 침대 위였다.

“…….”

이안은 일어나자마자 제 상태를 살폈다.

지난밤 있었던 일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물에 빠졌던 기억과 달리 젖은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침구도 뽀송했다. 

모든 것이 전날 밤, 잠자리에 들었을 때와 같았다. 

‘옷이…… 달라.’

그러다 지금 입은 옷이 전날의 옷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꿈이 아니다. 밤에 물에 빠진 것도.

그 아이를 본 것도.

‘아카데미에 있어.’

이안은 쿵쿵 뛰는 심장에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 * *

“동아리?”

빈 강의실.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가던 길에 갑자기 이곳으로 잡혀 왔다.

리체는 제 앞에 앉아 생글생글 웃고 있는 로벤하프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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