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34)화 (34/89)

34화 친구 있잖아

갑자기 동아리라니.

리체는 로벤하프가 가져온 주스를 한 모금 삼켰다가, 할 말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아, 맞다. 필립한테 들었어. 지난번에 도와줘서 고마워. 로벤하프 오빠.”

필립이 이안의 방을 못 찾고 복도에서 서성이는 걸, 로벤하프가 우연히 발견해 도와줬다고 했지.

정확히는 필립이 로벤하프의 방에 무단 침입을 한 것이지만.

로벤하프와 말을 맞춘 필립이 리체에게 그렇게 말했기에, 리체는 그날 운이 좋았다고만 여겼다.

“신경 쓰지 마. 리체가 아는 사람인데, 그 정도는 별것도 아니지.”

“……뭘 도와줘?”

그러다 책상에 엎드려 있던 데온이 눈을 슬며시 뜨며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 심기 불편한 눈.

로벤하프는 팔꿈치를 세운 손에 턱을 괴고 데온을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안 알려줄 건데.”

“내 동생 일인데 네가-.”

또 싸울라. 리체는 후다닥 데온의 입에 쿠키를 물렸다.

입이 막힌 데온이 리체를 슬쩍 쳐다봤으나, 리체는 모른 척 로벤하프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로벤하프 오빠. 동아리를 새로 만든다고?”

“응. 3학년부터 동아리 가입이 필수거든. 1, 2학년은 선택사항이고.” 

그러니 올해 3학년이 된 데온은 동아리에 가입해야 했다.

문제는 체험하러 가는 동아리마다 학생들이 데온이 무서워 겁을 먹는다는 것이었다.

과거, 로드윅 가의 놀이 상대로 들어갔다가 하루 만에 집으로 도망친 아이들의 경험담까지 더해지면서, 나날이 높아진 데온의 악명 탓이었다.

“데르케디온이 왔다 간 동아리는 부원들이 탈퇴 신청서를 부장한테 주고 간다더라.”

“……우리 오빠 그렇게 안 나쁜데.”

괜히 남이 데온을 피한다니까 속상했다.

리체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데온의 등을 토닥였다.

정작 당사자인 데온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흥. 혼자 남아도 상관없어. 그게 더 좋지. 아무도 없고.”

“그러면 폐부잖아.”

로벤하프의 말대로였다. 황립 아카데미 내에 데온의 가입을 받아들이는 동아리가 있다고 해도, 폐부 결말을 맞게 될 터였다.

그렇다고 학년 수석인 데온을 동아리 없이 다니게 할 교수님들도 아니고.

로벤하프는 결국 리체의 오빠이자 제 친구인 데온을 위해 힘써보기로 했다.

“동아리원은 우선 데르케디온이랑 나랑. 지크베르트도 가입한대.”

데온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으다 보니 저런 조합이 나왔다.

죄다 공작 가문의 능력자들. 리체는 로벤하프에게 물었다.

“……능력자 동아리야?”

“아니야. 리체는 일반인이잖아.”

벌써 자신은 가입 확정인 모양이었다.

데온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거절할 생각도 없긴 했지만.

리체는 로벤하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가입 의사를 대신했다.

“그런데 무슨 동아리야?”

아직 동아리 이름을 듣지 못했다.

데온을 위해 만든 동아리라 해도, 활동 목적은 있어야 할 텐데. 그래야 동아리 개설 허가가 나올 터였다.

로벤하프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디저트 바구니를 가리켰다.

“디저트 연구회.”

“연구?”

디저트 연구면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게 아닌가.

리체는 놀라서 로벤하프에게 물었다.

“그걸 우리가 해?”

“응. 맛있는 거 먹고 빈둥거리는 동아리거든.”

“그렇구나.”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런 불순한 의도를 가진 동아리가 개설 허가를 받을 수 있을까.

하지만 문제는 리체가 걱정하는 것보다 더 기초적인 데에 있었다.

“개설 신청서를 내려면 최소 다섯 명이 필요해.”

“다섯 명?”

“응. 우리는 지금 네 명이니까 한 명이 부족하네. 3학년은 가입한다는 사람이 없고…….”

없다 뿐인가. 

로벤하프가 개설하려는 동아리에 데온이 부원으로 있다는 말이 아카데미에 다 퍼져서, 이제는 로벤하프가 ‘ㄷ’자만 꺼내도 다들 도망가느라 바빴다.

“얼굴이 잘 안 알려진 사람이 이야기를 꺼내는 게 나을 거 같긴 한데…….”

로벤하프는 리체에게 물었다.

“리체, 친구 있어?” 

“어……?”

“마법과로 옮긴 지 일주일 정도 됐지?”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과로 옮긴 건 지난주 월요일.

그 전날, 황도 저택에 다녀온 필립이 마법과도 괜찮겠다는 블레이크의 편지를 받아왔다.

원하는 게 있으면 해 보거라. 네 의견을 존중한단다.

그러고 리체가 총장실을 찾아가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럼블라 교수가 호출됐다. 이런저런 물품을 받고, 서명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마법과 강의실에서 자기소개하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수월했는데.’

하지만 입학식을 치른 지 2주나 흘렀음에도 아직 친구를 못 사귀었다.

문제는 블레이크에게는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있다고 편지했다는 점이었지.

책상에 뺨을 붙이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데온의 시선이 느껴졌다.

친구가 있냐는 질문에 리체가 할 대답이 궁금해진 모양이었다.

‘친구 하나도 없는데.’

블레이크와 데온이 자신이 혼자 지내는 걸 알면 실망할까.

처음 로드윅 공작가에 들어오게 된 계기도 데온의 사교성을 위해 놀이 상대로 온 건데.

그런 제가-.

“리체?” 

“이, 있어. 친구.”

잘 됐다. 로벤하프는 악의 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다음에 데려올래?”

* * *

그렇게 되었으니, 로벤하프에게 친구를 데려가야 했다.

리체는 12명 되는 같은 반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리체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하고, 피하고, 또 피했다.

처음에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지만, 일주일 전과 지금은 다를 게 없었다.

‘이 반 그대로 8년을 지내야 한다는 거지……?’

그나마 종종 말을 거는 건, 리체를 라이벌로 의식하는 듯한 여학생 하나인데.

“트아리체, 이거 볼래?”

리체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이 뿌듯하게 들이미는 종이를 바라봤다.

방금 럼블라 교수에게 받은 마력 친화도 검사지였다.

이름 : 이즈라 컨트

……

마력 친화도 : 43

일반적인 마법사들보다도 높은 수치였다. 뿌듯할 만도 했다.

‘역시 난 천재야!’ 같은 생각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서 드러났다.

이즈라는 리체의 손에 있는 검사지를 낚아챘다.

“내 것 보여줬으니까 네 것도 보여줘.”

“저, 저기. 이즈라.”

리체는 순식간에 뺏긴 검사지에 당황해 이즈라를 불렀다.

‘보여줘도 괜찮은 건가?’

검사지가 학생들에게 전달된 건 오늘이었다.

말인즉슨, 리체의 마력 친화도는 아직 교수들만 아는 이야기라는 의미였다.

아니나 다를까. 리체의 검사지를 보던 이즈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뭐야, 이게?”

아직 10살.

받아들이기 힘든 커다란 숫자에 이즈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마법은 내가……. 항상 일등이었는데.’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아이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

리체는 이즈라의 눈물에 안절부절못하고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이즈라, 괜찮아?”

“트아리체, 너 마력 친화도가 구십팔이야?”

이즈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심 리체의 수치가 궁금해 귀를 기울이던 동급생들의 고개가 일제히 리체에게로 향했다.

“구십팔?”

“트아리체가?”

“……그러면 트아리체, 나중에 대마법사가 되는 거야?”

경악한 아이들로 강의실이 순식간에 술렁였다.

“조용히 하세요.”

럼블라 교수의 말에 강의실은 조용해졌다. 하지만 달라진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면서도, 앞으로 꼿꼿이 향한 고개는 뒤쪽에 있는 리체와 절대로 눈이 마주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 반응에 리체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친구 사귀기는 그른 것 같다.

* * *

“친구 있잖아.”

아카데미 내 인적이 드문 정원 벤치.

리체는 길을 가다 만난 지크베르트와 나란히 앉아 대화 중이었다.

지크베르트는 원래 수행원 없이 혼자 다니는 편이었고, 필립은 저 멀리 떨어진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덕분에 둘의 대화를 엿들을 사람은 없었다.

“내가?”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리체는 눈을 끔뻑였다.

지크베르트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자신이 리체의 친구라는데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당당한 모습이었다.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데 지크는 이미 동아리에 가입하기로 했다며. 새로 동아리에 가입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한데…….”

없지. 데온을 무서워하지 않는 애를 찾기 전에 자신을 피하지 않는 애를 찾아야 했다.

“내가 무섭나?”

아니면 평민 출신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리체는 후자가 더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스스로 평민 출신이라 말하는 건, 블레이크나 데온을 우습게 만드는 기분이었다.

이 제국 귀족들은 평민을 무시하니까.

“…….”

지크베르트는 고민에 빠진 리체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트아리체 로드윅 진짜 예쁘더라.” 

동물 모습으로 교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보면 우연히 듣게 되는 이야기가 많았다.

리체의 이야기도 꽤 있었고.

“너 심장 떨려서 눈도 못 마주치잖아.”

“나만 그래? 너도 그렇다면서.”

…… 

“마법과? 거기 들어가려면 마력 친화도 말고 입학시험도 상위권이어야 한다던데.”

“똑똑한가 봐. 나중에 지나가면 인사해볼까?”

“야, 우리는 인사하면 안 되지. 셀린느 사건 때 구경하다가 걔 기사한테 무릎 꿇으라고 몰아붙였잖아. 아직 사과도 못 했는데.”

“그건……. 그렇지.”

개중에는 리체가 말한 것처럼 로드윅이 무섭다거나, 평민이라던가. 하는 소리도 있었지만.

학생들이 리체를 피하는 게, 리체가 생각하는 것처럼 안 좋은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

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걸 줄줄 설명할 말주변이 되지 않았으니.

“아니.”

지크베르트는 자신이 무서운가, 하는 리체의 혼잣말에 간결하게 대답했다.

“고마워. 지크. 너밖에 없어.”

그게 지크베르트의 어색한 위로라는 걸 알아차린 리체가 살포시 웃음 지었다.

리체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지크베르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머릿속으로 열심히 생각해봤다.

그러다 한 가지가 떠올랐다.

“리체, 내가 데려갈까?”

“누구를?”

“친구.”

“……정말?”

리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그날 오후.

다 같이 모여 동아리 관련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빈 강의실의 닫힌 문 앞.

“…….”

“친구 데려왔어.”

“안녕, 트아리체.”

리체는 지크베르트 옆에서 손을 흔드는 남학생을 넋을 놓고 올려다봤다.

‘아, 안 돼.’

전교생 중 누구든지 괜찮았지만, 단 한 명.

괜찮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왜 둘이 같은 학년인 걸 잊고 있었을까.

지크베르트는 리체에게 자신이 데려온 남학생을 소개했다.

“같은 반, 이안드웨인이야.”

“그날 보고 처음이네. 오랜만이야.”

끄덕끄덕.

리체는 이안에게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지크베르트를 바라봤다.

‘도와줘!’

“……?”

전혀 통하지 않았다. 리체의 머릿속에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이안은 같은 능력자이니 데온을 무서워하지 않을 테고, 자신은 이안과 함께 있으면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면 다들 자신을 수상하게 여길 데고, 결국엔 거울이, 결국엔 히켄카가, 결국엔 자신이 르티옴인 게 밝혀지게-.

벌컥.

“뭐 해.”

먼저 도착해 있던 데온이 인기척을 느끼고 문을 열었다.

후다닥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망연자실한 리체의 얼굴에, 데온이 눈쌀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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