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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35)화 (35/89)

35화 알면 큰일 나겠네

데온은 리체의 앞쪽 어깨를 한쪽 팔로 감아 품에 가두고, 두 사람을 바라봤다. 

한 명은 익숙했고, 한 명도 최근 사냥제에서 봤기에 면식이 있었다.

“세르디야, 게르웨르. 너희 내 동생한테 뭐 했냐?”

“아니.”

“안녕하세요, 데르케디온 선배. 트아리체랑 인사하던 중이었어요.”

데온은 네가 말해보라는 의미로 리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말할 수 있을 리가.

“…….”

“…….”

리체는 자신을 쳐다보는 데온을 향해 열심히 신호를 보냈다.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싸우지 마.’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하긴 그렇지.

파이톤스도 아닌데 지크베르트나 데온이나, 제 생각이 들릴 리가. 

체념하는 리체에게 데온이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잔소리하는 건 알겠네.”

시비 걸지 말라 이거지.

데온은 리체를 안은 채 몸을 돌려 강의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너네도 들어와라.”

“응.”

“실례하겠습니다.”

창가 쪽 책상에 로벤하프가 앉아 있었다.

로벤하프는 동아리 개설 신청서를 작성하다, 데온이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반갑게 말을 걸었다.

“왔어? 리체, 친구 데려 왔…….”

그러다 데온을 뒤따라오는 이안을 발견하고 몸을 움찔했다.

“이안드웨인?”

“안녕하세요.”

금발만큼이나 반짝이는 외모가 화려한 소년이었다.

쟤가 왜.

더 들어오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고개를 옆으로 빼고 뒤쪽을 바라봤지만, 지크베르트가 강의실 문을 닫고 있었다.

리체가 데려온다던 친구가 정말 이안드웨인인 모양이었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로벤하프는 당혹스러웠다.

리체가 데려올 친구가 같은 반 여자아이 정도일 줄 알았다. 잘해줘서 리체한테 친절한 선배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썩 내키지 않는 인물의 등장이었지만, 리체의 앞이었다. 

로벤하프는 사회용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했다.

“어서 와. 리체 친구가 이안드웨인이었다니. 리체 말대로 정말 능력자 동아리가 됐네?”

끄덕.

리체는 자신을 보는 로벤하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로벤하프는 리체가 묘하게 조용하다 생각했지만, 이안을 신경 쓰느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잠시 뒤. 로벤하프의 주도하에, 다섯 명은 마주 붙인 책상에 앉았다.

조용하고 어색한 분위기 속, 리체가 옆자리에 앉은 데온에게 귓속말했다.

데온은 가만히 듣더니,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리체를 데리고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걸 본 로벤하프가 책상을 짚고 일어나 데온을 향해 말했다.

“데르케디온! 어디가?”

“멍멍이 밥 주러.”

“뭐?”

뭔 소리야. 너한테 개가 어디에 있다고.

로벤하프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강의실 문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리체도?”

“어.”

리체한테 물었는데 왜 데온에게서 대답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데온의 돌발행동에는 익숙했다. 로벤하프는 닫히는 문을 보곤 자리에 앉았다.

‘이따가 다시 오겠지.’

정확히는 리체를 믿었다.

데온이라면 몰라도 리체는 다시 돌아올 테니.

문제는 로드윅 남매가 빠진 이 조합이지. 로벤하프는 제 오른편 앞쪽에 나란히 붙인 책상으로 눈을 돌렸다.

“…….”

그냥 말 없는 세르디야.

“……?”

아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이안드웨인.

둘 다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내심 지금의 자신처럼 돌아가고 싶어 할지도.

지크베르트는 리체가 가입하는 조건으로 부원이 된다고 한 거고, 이안드웨인은 리체가 데려온 친구니.

동아리 개설 목적이었던 인물들의 부재. 의욕이 사그라든 로벤하프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이렇게 셋이 남아버렸네. 궁금한 거 있어?”

“동아리 개설 신청서는 저희끼리 작성하나요?”

“응. 리체랑 데르케디온한테는 다 설명했으니까, 우리가 작성하고 서명만 받으면 돼.”

설명이라고 해봤자 지난번 리체한테 얘기한 게 전부였지만.

놀고먹는 동아리에 무슨 자세한 얘기가 필요하겠는가.

로벤하프는 펜을 집어 들었다. 조금 전 데온과 있을 때 대부분 작성해놨기에, 공란 몇 군데만 채우면 됐었다.

“……그런데, 이안드웨인. 그날은 잘 들어갔어?”

로벤하프는 작성하고 있는 신청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안에게 떠보듯 물었다.

자신을 보는 이안의 시선이 느껴졌다.

필립에게 업혀 있었을 때 정신을 잃고 있어서 그날 일을 모르는가 했더니. 

‘알고 있나?’

로벤하프는 그런 이안의 시선을 모르는 척, 태연히 신청서 공란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잠옷도 줬는데. 입던 거 말고 새것.”

“……잠옷이요?”

“응. 그날 너 정신을 잃은 걸, 내가-.”

“그, 아이!”

내가 한밤중에 리체한테 부탁도 받는, 서로를 신뢰하는 사이다.

그렇게 리체와 제 사이를 어필하려던 로벤하프는, 다급히 끼어든 이안의 목소리에 하려던 말을 멈췄다.

“그 아이, 저를 구해준 사람을 아세요?”

로벤하프는 고개를 들어 자리에서 일어난 이안을 바라봤다.

얼마나 급하게 일어났으면, 의자까지 뒤로 넘어갔다.

“선배, 아시는 거예요? 알려주세요……!”

이안은 책상을 짚은 상체를 로벤하프 쪽으로 기울이며 그 사람을 알려달라 사정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세상에서 제게 내려질 구원을 찾는 사람처럼.

사막에서 며칠 동안 헤매며 물 한 모금을 구걸하는 이도 저렇게 절박한 표정을 짓지 않을 것 같았다.

……뭐가 이렇게 투명해?

‘속이 훤히 다 보이잖아.’

로벤하프는 놀란 얼굴로 이안을 보며 생각했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저렇게 애타게 찾으면서도, 이안드웨인은 그게 리체란 것을 모른다. 

“……알면 큰일 나겠네.”

작게 중얼거린 로벤하프는 절 보는 이안을 향해 생긋 웃었다.

“미안. 몰라.”

* * *

“너, 걔랑 친구 아니지.”

리체는 데온의 말에 뜨끔 하며 눈을 데굴 굴렸다.

데온과 리체는 식당 건물을 나와 길을 걷는 중이었다.

“뭐, 뭐가?”

“게르웨르.”

어떻게 알았지.

리체는 고개를 끄덕인 뒤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내 친구 아니고 지크 친구야.”

데온이 한 번 의심하기 시작했으니, 변명한다고 다른 거짓말을 해도 줄줄이 들킬 게 빤했다.

“그래서.”

“뭐가?”

“배고프다고 한 건 뭔데. 걔랑 같이 있는 것도 불편해?”

“…….”

리체는 얼굴을 붉혔다. 오늘 왜 이렇게 눈치가 빠르지.

아까 데온에게 귓속말한 것도 거짓말인 걸 들킨 모양이었다.

“오빠, 나 배고파.”

우선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데온에게 핑계를 댄 건데.

내가 너 핑곗거리마저 챙겨줘야 하냐.

데온은 투덜거리면서도 막 식당에서 가져온 컵케이크를 쪼개 리체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부끄러움에 얌전해진 리체를 향해 물었다.

“쫓아내 줘?”

“누구를? 이안을?”

리체는 데온에게 고개를 급히 저었다.

안 그래도 세상이 힘들게 하는 이안인데, 데온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리체는 컵케이크를 손에 쥔 채 데온을 따라 걸으며 그러지 말라 당부했다.

하지만 몇 번을 말해도 들은 척도 안 하니,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오빠, 이안 절대 괴롭히지 마!”

“시끄러워. 입 좀 다물고 그거나 먹어.”

그래, 데온 말처럼 차라리 제가 입을 다물면 몰라도. 이안이 데온에게 내쫓겨 상처받는 일은 없어야 했다.

“……입을 다물어?”

“먹고 다물든가.”

리체는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자신을 따라 걸음을 멈춘 데온을 올려다봤다.

“오빠.”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나 좀 도와줘.”

* * *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강의실로 돌아왔다.

아직 자리를 지키던 세 명이 둘을 맞이했다.

“당분간 내 동생 말 못 해.”

“리체? 왜?”

“목감기.

자리에 앉은 데온이 옆의 의자를 빼주며 리체의 목을 가리켰다.

목을 따뜻하게 해주려는 용도로 감긴 천이 눈에 띄었다.

심각해 보이는 상태에, 로벤하프가 놀라 물었다.

“아까도 목 아파서 말을 못 했던 거야? 많이 아파?”

- 괜찮아

리체는 가져온 작은 칠판에 분필로 글을 적은 후, 로벤하프에게 보여줬다.

얼마나 아프길래 저런 걸로 의사소통할까 싶어 로벤하프의 마음이 짠해졌다.

“리체, 저녁에 목에 좋은 차를 가져다줄게.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많다며, 로벤하프는 제 숙소 살림을 다 털어줄 각오로 리체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해달라고 했다.

지크베르트와 이안도 리체의 목 상태를 걱정하며 안부를 물었다.

-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데온이 옆에서 구경하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뻔뻔해져야 이 짓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리체는 칠판을 돌리며 주위의 세 사람을 바라봤다.

말이 끊기자, 달라진 강의실 분위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안은 어딘가 침울해 있었고, 로벤하프는 평상시와 같았으나 가운데 낀 지크베르트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 무슨 일 있었어?

리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칠판에 글을 적어 물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리체.”

“응. 별일 없었어.”

세 사람 다 하나같이 입을 모아 아니라고 말하니.

‘내 착각인가?’

오늘따라 눈치 빠른 데온에게 물어보려 옆을 바라봤지만.

데온은 관심 없다는 듯 턱을 괸 채 만년필을 돌리고 있었다.

“…….”

그래도 이안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리체는 가져온 상자를 열어 그 안에 있는 컵케이크를 꺼냈다.

로벤하프와 지크베르트에게 하나씩 준 뒤, 이안에게도 하나를 내밀었다. 

이안과 눈이 마주치자, 리체는 밝게 웃어 보이며 칠판을 가리켰다.

로벤하프와 지크베르트에게도 한 번씩 보여줬던 글이었다.

- 맛있어

아, 맞다.

아카데미에서는 이안하고 말을 놓는 사이가 아니지. 선후배 사이니까. 이안에게 말을 놓는 게 익숙해서 그만 반말로 적은 걸 그대로 가리켰다.

리체는 급히 칠판을 가져와 뒤에 ‘요’자를 붙인 뒤, 이안에게 보여줬다.

이안은 그런 리체를 향해 다정히 웃으며 말했다.

“말 편하게 해도 돼. 고마워. 잘 먹을게.”

이제 좀 마음이 놓였다.

리체는 고개를 끄덕인 뒤, 칠판을 가져와 지우개를 들었다.

‘이제 지워야지.’

다음 말을 바로바로 적으려면 미리 지워두는 편이 좋았다.

매번 지워야 해서 좀 불편하긴 하지만, 대화를 아예 못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데온이 칠판을 구해줘서 다행이야. 이따가 고맙다고 말해야지.’

리체는 고개를 숙인 채 지우개로 열심히 글자를 지웠다.

단순노동이 썩 재미있었다. 리체는 칠판 구석에 있는 찍힌 자국까지 지울 정도로 열중해 있었다.

그런 리체의 숙인 머리를 바라보던 이안은 별안간 놀란 듯 숨을 들이켜며 제 입을 가렸다.

“……?”

그 소리에 리체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지?

‘케이크가 놀랄 정도로 맛이 없었나……? 맛있었는데……?’

이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밤하늘 같은 이안의 검은 눈동자에 리체의 은발이 비쳤다.

“이안드웨인!”

그날, 유일하게 자신의 눈에 비쳤던 광경. 

흐릿한 그 광경에서 결코 잊을 수 없던 것이 있었다.

‘은색, 달.’

이안의 입술이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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