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멍멍이 맞네
- 무슨 일 있어요?
얼이 빠진 이안의 눈에 새롭게 쓴 리체의 칠판이 들어왔다. 걱정스럽게 절 보는 은색의 눈동자까지.
그제야 주변으로도 시야가 트였다. 주위에 앉은 세 사람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안드웨인,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왜 멍하니 서 있고 그래?”
로벤하프의 말에, 이안은 자신이 의자에서 몸을 살짝 일으킨 엉거주춤한 상태로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아니요.”
이안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다 리체와 잠시 눈이 마주쳤는데, 심장이 두근거렸다.
능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아이다.
‘왜 그러지?’
리체는 그런 이안이 의아했으나 조용히 칠판을 거둬들였다.
분위기가 정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로벤하프는 마지막으로 동아리 개설 신청서를 검토한 뒤에 말했다.
“서류는 다 끝냈으니까 내일 신청서를 제출할게. 다들 괜찮지?”
“응.”
“네.”
모두가 동의하자 디저트 연구회의 첫 모임은 끝이 났다.
동아리 개설 후에 두 번째 모임을 갖자는 말과 함께.
“그때 탈퇴하고 싶은 사람은 말해도 좋아. 개설된 동아리는 3명만 있어도 폐부 되지 않거든.”
이안이 들으라고 한 소리였지만, 책상에 앉은 이안은 로벤하프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시하는 것 좀 봐?’
분명 들렸을 텐데.
로벤하프는 이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가자.”
그곳에는 데온과 자리에서 일어나는 리체가 있었다.
왜 리체를, 하고 로벤하프가 신경 쓰던 그때. 초조해진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확인해봐야 해.’
자신의 확신이 맞는지, 리체에게 물어서 확인해야 했다.
네가 정말 거울 너머의 그 아이냐고.
내가 살기를 바랐던 유일한 사람이었냐고.
“저, 트아리체!”
“?”
리체 한 명을 불렀는데, 모두가 저를 바라봤다.
보는 눈이 많았다. 리체의 정체를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던 이안의 머릿속에 이성이 차츰 자리 잡았다. 여기서 할 얘기가 아니었다.
“……조심히 가라고.”
끄덕.
고개를 끄덕인 리체는 책상 위에 칠판을 내려놓고 글자를 적어 보여줬다.
- 선배도요.
이안의 시선이 선배, 라는 글자에 잠시 멈췄다. 아직 리체가 그 아이라 확인한 것도 아닌데, 거리감이 느껴지는 단어가 아쉬웠다.
칠판을 가져간 리체가 뒤를 돌아 강의실 문으로 걸어갔다. 이안은 그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 * *
“오빠,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
데온과 둘만 남자, 리체는 드디어 입을 열 수 있었다.
하도 입을 다물고 있었더니 단내가 나는 것 같았다.
쭉 이래야 할 성싶어서 걱정이지만, 로벤하프가 동아리 활동은 한 달에 한 번 활동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했으니.
어차피 데온을 위해 만들려는 동아리였다. 개설된 뒤에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자주 나가지 않아도 괜찮겠지.
“별로.”
데온은 리체의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모습에 리체는 속으로 웃음 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도와주는 데온이 있어 든든했다.
“오빠, 오늘은 일정 더 없어?”
“어. 끝.”
“진짜? 그러면 내가 놀아줄까?”
“……?”
놀아줘? 데온은 리체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며 걸음을 멈췄다.
뭔가 아닌 기분이다. 제가 리체와 놀아주는 거면 몰라도.
데온은 절 따라 걷는 걸 멈춘 리체의 이마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우리 멍멍이가 여유가 넘치네. 목감기 연기 연습할 시간도 없을 텐데.”
“…….”
피식 웃는 입꼬리에 절 놀리려는 의도가 가득했다. 반격하고 싶었지만, 오늘 도움을 받았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도.
“멍멍이……라고 안 부르기로 했잖아.”
“내가 언제?”
저 시치미 떼는 것 좀 봐라. 그러고 보니 아까 로벤하프 앞에서도 멍멍이 밥 준다 어쩐다고 그랬지.
리체는 데온의 앞에 서서 정수리에 올린 손을 그대로 데온에게로 옮겼다.
“작년에 그랬잖아. 분명히 내가 오빠 턱까지 자라면……?”
이상하다.
신중하게 옮긴 손날이 닿은 곳이 턱이 아니라 가슴팍이었다.
데온이 리체를 내려다보며 가소롭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턱?”
“자, 잠시만.”
리체는 발뒤꿈치를 슬그머니 올렸다.
그래도 어깨.
‘조금만 더…….’
이제는 대놓고 뒤꿈치를 들었다. 발가락 끝으로 버티기 시작했지만, 왜 아직 눈앞에 보이는 건 데온의 셔츠 깃일까.
데온이 바들바들 떨며 제 목으로 다가오는 리체의 손을 잡아채고 말했다.
“멍멍이 맞네.”
쑥. 하고 리체의 키가 줄어들었다. 더는 버티지 못하고 뒤꿈치를 땅에 붙인 탓이었다.
리체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데온을 올려다봤다.
“오빠, 또 키 컸어?”
“몰라.”
모르긴. 두 달 전만 해도 분명 뒤꿈치를 올리면 턱에는 닿았었는데.
“열두 살이 이렇게 크면 반칙 아니야……?”
작년부터 물먹은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던 데온은, 올해가 되면서 안나의 키마저 넘었다. 제드도 도련님께 곧 제 키를 따라잡힐 것 같다며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였으니.
“너도 열심히 커보든가.”
데온은 위로랍시고 리체의 정수리를 토닥거렸다. 하지만 위로는커녕 분한 마음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블레이크의 유전자를 받은 데온은 점점 더 자랄 터였고. 리체는 전생의 다 자란 자신의 키를 알고 있었다.
이미 진 기분이었다. 데온의 턱은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냥 멍멍이라고 불러…….”
리체는 축 늘어진 어깨로 몸을 돌렸다. 가던 길을 마저 갈 생각이었다.
데온은 아까 붙잡은 리체의 손에 이끌려 그 뒤를 따라갔다.
얼마 가지 않아 목적지인 여자 기숙사 앞에 도착했다.
“오셨어요? 도련님, 아가씨?”
필립이 둘을 맞이했다. 데온이 동아리 모임 후 리체를 데려다준다는 말에 근처에서 기다리던 참이었다.
“오래 기다렸어?”
“그다지요.”
“나 간다.”
“어? 가게? 데려다줘서 고마워. 이따가 잘 자!”
데온은 대답 대신 손을 대충 흔들며 남자 기숙사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데온의 시선이 짧게 필립에게 닿았다.
그게 제 도련님의 경고라는 걸 알아차린 필립은 허리를 바짝 세웠다.
3년 전, 진료실 사건 때문에 데온은 필립을 썩 곱게 보지는 않고 있었으니. 필립은 알아서 기어야 했다.
“저는 리체 아가씨 아니었으면 도련님께 숨통을 내어 드려야 했을 거예요.”
“왜? 오빠 착한데.”
“그거야…….”
아가씨 앞에서만 그러시는 거죠.
필립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눈물과 함께 삼켰다.
데온이 리체에게만 유하게 군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당사자인 리체뿐이었다.
리체와 필립은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휴게실을 지나는데, 낯익은 얼굴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가씨.”
“응.”
필립의 속삭임에 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학식이 있던 날, 필립에게 부딪혀 넘어졌다고 연기하던 셀린느, 라는 이름의 3학년이었다.
왜 수행원도 없이 혼자 앉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썩 반갑지 않은 얼굴이다. 다행히 저쪽은 이쪽을 보지 못했다.
“그냥 지나가자.”
“네.”
눈을 마주치면 시비를 걸지 모르니 발소리를 죽이고 걸어가려 했다.
로드윅 가문에서 지냈던 두 사람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파…….”
그러던 중 울먹이는 셀린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필립은 힐끔 눈동자를 돌려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소파 위에 올린 셀린느의 종아리가 벌겋게 돼 있었다. 그 아래 카펫 위에는 찻잔이 떨어져 있었고.
‘뜨거운 찻물을 다리에 쏟았나.’
수행원이 없는 건, 급히 화상을 치료할 것을 찾으러 갔기 때문인 듯싶었다.
뭐, 위급한 상황이라고는 해도, 저 아가씨를 도울 이유는 없지만.
리체 아가씨를 건드리려던 자였다. 로드윅에 적의를 드러내는 자에게 굳이 호의를 베풀 필요는 없지.
짧은 순간에 판단을 끝낸 필립의 눈이 다시 앞을 향했다.
‘리체 아가씨께서도 그렇게 생각…… 엥?’
허전함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익숙한 귀염뽀짝한 은색 머리가 휴게실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필립은 성큼성큼 휴게실로 들어가는 리체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그건 셀린느도 마찬가지였다.
“너……?”
그녀는 갑작스러운 리체의 등장에 어떻게 반응하지 못하고 리체를 보고만 있었다.
리체가 그 앞에 서서 그녀의 상처를 살필 때까지.
‘다쳤네.’
셀린느의 화상을 확인한 리체가 주머니에서 꺼낸 별 조각을 사용했다. 나아가는 상처를 보는 필립과 셀린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영창?’
특히나 셀린느는 더더욱.
그녀의 가문인 컨트 백작가는 대대로 마법사를 배출해내는 가문이었다.
셀린느의 경우 이번에 입학한 동생만큼의 마력 친화도는 없어, 마법과로 진학하지는 못했지만. 마법 상식만큼은 뛰어났다.
‘손에 쥔 건 마석인가? 로드윅 공작가의 영애니 마석을 개인 소유하는 것쯤은 가능하겠지만…….’
그렇다고 무영창으로 치유 마법을 펼치다니.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마력은 인간 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마석의 마력을 이용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사소한 마법을 사용할지라도 기나긴 영창을 읊는 과정이 있어야 했고.
셀린느가 놀라움에 휩싸여 있는 사이, 종아리는 어느새 말끔히 나아 있었다.
“…….”
리체가 일어나자 셀린느는 어쩔 줄 몰라 손을 살짝 뻗었다. 리체는 간소화한 몸짓으로 예의상 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셀린느를 무표정으로 바라보던 필립은, 걸어오는 리체와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으며 표정이 변했다.
셀린느가 급히 리체를 불렀다.
“저, 저기! 트아리체 양!”
왜 부르지.
치료만 해주고 곧장 방으로 가려던 리체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틀었다.
셀린느가 자신하고 말하고 싶어 할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마지막이 좋지 않았으니까.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어요?”
“이안드웨인이랑 친한가요?”
옆에서 필립이 감사 인사가 먼저 아니냐고 혼잣말했다. 셀린느에게까지 들린 혼잣말이긴 했지만.
평민한테 지적받았다는 사실에 셀린느의 얼굴이 붉어졌다.
“필립.”
“이크. 혼잣말인데 들으셨어요? 죄송합니다. 우리 공녀님 앞에서 제가 실수를.”
일부러 공녀, 란 말에 힘주었다. 셀린느를 의식해서 한 말이었다. 저 백작 가문의 따님보다 우리 아가씨 신분이 높다 이거지.
그 말에 셀린느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풀로 붙여놓기라도 한 듯 딱 붙은 입술이 힘겹게 움직였다.
“고……맙…….”
리체는 자존심이 상한 얼굴의 셀린느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귀족들의 기 싸움은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고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셀리느가 절 부른 용건에나 대답해주고 자리를 뜨자고 생각했다.
“이안드웨인 선배는 그날 처음 봤어요.”
학생들 사이에 흔히 있는 선입견이었다. 같은 공작 가문이니 당연히 아카데미 입학 전부터 교류가 있었을 거라고.
리체도 몇 번 다른 공작 가문의 자제들과 친하냐는 질문을 받아봤다.
“……친분이……. 없는 건가요?”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 내에서는 어쨌든, 자신과 이안은 말로 대화조차 안 해 본 사이였으니까.
셀린느는 리체의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결심한 듯 리체에게 걸어갔다.
그런 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리체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제 수행원이 밤에 이안드웨인이 돌아다니는 걸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