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설명해 봐. 게르웨르
리체는 셀린느의 말에 조용히 숨을 삼켰다.
설마하니 지난번의 일을 목격한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인기척을 느끼지 않았으니.
이안이 호수에 빠졌던 일.
블레이크에게 보고한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데온에게조차도.
한밤중에 공작 가문의 능력자인 이안이 그런 일을 당했다는 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좋은 이야깃거리이니. 이상한 소문이 날지도 몰랐다.
“언제요……?”
“2주 전요.”
봤다. 리체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하지만 셀린느의 대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전 주.”
“네?”
“그리고 작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몰라 리체와 필립은 셀린느를 향해 눈을 끔뻑였다.
* * *
“처음 알게 된 건 작년 가을 학기였어요.”
방으로 들어온 리체는 필립이 내려준 차를 마시며 고민에 빠졌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다른 능력자분들께는 말하기 무섭고……. 트아리체 양이라면 방법을 찾아줄 것 같아서요.”
작년부터 셀린느 혼자 끙끙 앓고 있던 고민을 리체에게 털어놓은 것이었다.
결국 리체가 다른 공작 가문의 사람이나 능력자들보다는 만만하니 꺼낸 말이었겠지만.
그런 문제를 떠나 리체에게 썩 나쁜 정보는 아니었다. 자신은 이안의 생사에 관여해야 하는 처지였으니.
‘히켄카는 알고 있었나?’
그래서 그날 갑자기 나타난 건가 싶기도 했다.
당장은 물어볼 수 없었다. 그래도 파이톤스를 다시 꺼내준다고 한 날이 2주쯤 남았으니. 그때는 오겠지. 그날은 잠을 안 자고 버틸 셈이었다.
“게르웨르 도련님, 몽유병을 앓으시는 게 아닐까요?”
나무 의자에 앉은 필립이 리체에게 물었다.
그도 셀린느가 한 말을 신경 쓰던 중이었다. 이안드웨인 게르웨르는 괜찮은 귀족이라 생각했던 데다가, 한 번 심정지가 온 것을 구해냈으니.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그날은 누가 그 도련님을 빠트린 게 아닌 모양이에요. 나 원. 게르웨르 쪽 수행원은 영 못 쓰겠네요. 밤중에 자기네 도련님이 나가는 것도 모르고.”
필립은 혀를 찼다.
“그 정도로 병세가 심각하면 치료받고 계시겠죠?”
“음…….”
리체는 쉽사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게르웨르 공작이 꾸민 일일 것이다. 치료는커녕 몽유병 증상을 일으키게 만드는 무언가를 당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안이 하고 다니는 아티팩트도 수상해.’
능력을 못 쓰게 만든다는 목걸이.
거기에 게르웨르 공작이 다른 음침한 짓을 해놨을지도. 항상 두 번, 세 번의 일을 꾸미는 인간이었으니까.
‘원인을 알면 좋을 텐데.’
이안의 증상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면, 입학식 날의 일이 또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제가 한번 여쭤볼까요?”
“필립이?”
“아가씨께서는 게르웨르 도련님 앞에서 말씀을 못 하시니깐요.”
필립이 히죽거렸다.
“놀리는 거지?”
“그럴 리가요.”
즐거워하네. 필립은 자신이 이안을 이성으로서 좋아한다고 오해하는 듯했다. 경험상 여기서 굳이 해명하려고 한다면 정말 좋아하는 거냐고 몰아갈 게 분명했고.
리체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부탁할게.”
“넵.”
그렇게 대답한 필립은 머릿속으로 이안에게 할 질문 목록을 생각했다.
키, 발 사이즈, 재력, 성적, 교우 관계, 졸업 후 장래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우리 리체 아가씨는 아무한테나 못 넘겨드리지.’
아무렴.
필립은 깐깐한 시누이처럼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 * *
같은 날, 밤.
이안은 쉬이 잠들지 못하고 침대에 앉아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로드윅 공작님, 도움을 부탁드리고 싶어요.”
리체에게서 은색 달을 떠올리기 며칠 전.
이안은 몸이 좋지 않다는 걸 핑계로 외출 허가를 받아 아카데미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찾아간 곳은 로드윅 저택이었다.
이안은 블레이크에게 그간 게르웨르 공작이 자신에게 한 일을 털어놓았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없어지길 바라세요.”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먹었던 약. 자신을 견제하는 게르웨르 공작의 태도. 그리고 아카데미에 들어온 뒤 원인을 알 수 없는 몽유병 증상까지.
“알겠다.”
가만히 이안의 이야기를 듣던 블레이크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조만간 다시 만나기로 했으나, 문제는 오늘이었다.
그동안 바깥에서 잠을 깬 날들의 주기를 계산해봤을 때, 자신의 몸은 오늘 밤에 또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일 터였다.
‘잠들기가 무서워.’
지금 잠들면 다시는 눈을 못 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에 눕기가 두려웠다.
밤바람이라도 쐬면 찾아오는 졸음을 떨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날이 밝을 때까지 걸으면 내일도 살 수 있을지 모른다.
이안은 몸을 일으켜 움직였다. 방을 나서는 건 쉬웠지만, 정문이 잠겨 있었다. 복도의 창문을 열어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걸었다. 기숙사를 지나서 정원을 지나고, 강의실 건물들을 지났다. 넓은 아카데미를 계속해서 걷다 보니 지난번 자신이 빠졌던 호수가 나타났다.
‘어둡네.’
잠깐 정신을 차렸을 때 봤던 그날의 풍경은 환했는데. 지금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이안은 호숫가에 서서 별빛을 반사하며 은은하게 빛나는 물결을 바라봤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요란한 소리와 함께 별안간 제 몸이 공중에 뜨는 걸 느꼈다.
“잡았다!”
“……?!”
뭐, 뭐지? 이안은 깜짝 놀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누군가 자신을 안아 올렸다. 하지만 어두워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누-.”
“잡았어요! 아가씨!”
“잘했어! 필립!”
멈칫.
이안은 몸을 굳혔다. 이어서 들린 목소리가 익숙했다.
제 쪽으로 다가오는 키가 작은 한 사람. 여전히 어두운 실루엣이었지만, 희미하게 반짝이는 은색만큼은 구분할 수 있었다.
“아가씨께서 기숙사 밖으로 나가는 게르웨르 도련님을 발견하셔서 다행이에요. 하마터면 지난번처럼 또 빠지실 뻔했네요.”
“응. 이번에는 늦지 않아서-.”
“트아리체?”
“헉.”
기숙사를 나가는 이안의 모습을 보고 곧바로 쫓아오길 잘했다.
신이 나서 걸어오던 리체는 절 부르는 이안의 목소리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또렷한 눈빛의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내 목소리 다 들었나……?’
들었겠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 *
“…….”
“하하…….”
필립은 제 앞에 서 있는 도련님을 보며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난 죽을 거야. 죽을 게 분명해.
저 성난 붉은 눈이 자신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지 않은가. 너, 죽는다.
“갑자기 찾아봬서……. 많이 놀라셨죠……?”
한밤중에 저같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기사 나부랭이가 도련님의 방을 찾아와서 너무나 짜증 나셨을 겁니다. 사람이랑 같이 있는 게 싫으시다고 수행원도 안 데려오신 도련님의 뜻을 제가 아무렴 모르고 있었을까요. 다만 오늘 존경하는 도련님의 방을 이렇게 숨어들어온 까닭은…….
필립의 머릿속에서 변명이 이리저리 떠다녔다. 데온이 툭, 치면 억, 하고 내뱉을 수 있게 준비 중이었지만.
‘왜 왔냐고 물어보시지도 않으시니…….’
벽에 삐딱하게 기댄 채 말 한마디 없는 데온은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꺼져. 안 그러면 죽는다.
내심 제 존재를 데온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필립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로드윅 가문의 실세인 누군가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에 한탄하며 자포자기하듯 말을 내뱉었다.
“도련님, 리체 아가씨께서-.”
“왜.”
“그쵸……? 아가씨께서 뭐라 하셨는지 궁금하시죠……?”
“뭐?”
“아, 아닙니다!”
요놈의 입이 방정이다. 필립은 손을 내저으며 자신이 온 이유를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잠시 뵙고 싶다고 하시네요.”
* * *
필립이 안내한 곳은 아카데미의 기숙사와 꽤 떨어진 정원이었다.
얘는 왜 밤에 이런 곳에 와 있는 거야.
데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필립에게 물었다.
“혼자 있어?”
“리체 아가씨요?”
당연히 아가씨 얘기셨겠지. 필립은 방금보다 더 싸늘해진 제 도련님과의 사이를 느끼며 제 입을 찰싹 때렸다.
“혼자 계시지 않습니다. 저기에 있는 정자예요.”
“오빠! 여기!”
정원 퍼걸러의 소파에 앉은 리체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은 이안드웨인 게르웨르.
순식간에 달리듯 걸어온 데온은 리체의 앞에 섰다.
“뭐야, 왜 게르웨르랑 같이 있어.”
“안녕하세요.”
게르웨르가 제 여동생과 밤중에 만나는 사이라니. 더욱이 리체는 한참 어린애였다.
사정이 어쨌든. 이건 오빠로서 한마디, 아니 수백 마디는 해야 했다. 아버지께서 보셨어도 그러셨을 테니.
“너-.”
“오빠, 오늘 이안이랑 같이 자 줄 수 있어?”
하지만 이어진 리체의 말에 데온은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지금 리체가 제게 뭐라고 그런 건가.
‘게르웨르랑 같이 자라고?’
내가?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리체가 그런 데온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설명을 덧붙였다.
“이안이 몽유병이 있대. 그런데 지난번에 몽유병 때문에 호수에 빠졌거든. 오늘 밤에도 그럴까 봐 걱정돼서.”
“…….”
그냥 빠지라 그래.
평소라면 그렇게 말했을 테지만, 데온은 지금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오늘 오후까지만 해도 이안드웨인과 말하기 껄끄럽다며 목감기 흉내를 내던 동생이었다.
갑자기 친한 사이처럼 이안드웨인을 대변해주는 것도 짜증이 나는데.
지난번에 이안드웨인이 호수에 빠졌다는 건 또 어떻게 안단 말인가.
“게르웨르. 너 전에도 내 동생이랑 만났냐?”
데온은 질문 상대를 바꿨다.
제 동생은 멍청할 정도로 착해서 이안드웨인이 불쌍한 척을 하면 금방이라도 넘어가 말을 맞춰줄 게 분명했으니.
설명은 이쪽에서 들어야겠다.
“아, 그게…….”
대답하기를 망설이며 리체와 시선을 교환하는 이안드웨인. 만났군. 데온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결정했다. 이안드웨인을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그러는 데온의 손을 리체가 잡았다.
“오빠, 이안이랑 같이 자주면 안 돼?”
“안 돼.”
“그렇구나.”
리체는 데온의 거절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무리한 부탁이라고 생각했기에, 더 떼를 쓸 생각은 없었다. 데온은 사람을 싫어하니까. 어쩔 수 없지. 리체는 빠르게 단념하고 이안에게 말했다.
“미안, 이안. 아까 말했던 대로 여자 기숙사에 몰래 들어가야 할 것 같아.”
데온이 휙, 하고 고개를 돌려 리체를 바라봤다. 이게 무슨 소리야.
더 어이가 없는 건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안드웨인이 알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한다는 것이었다.
“아니야. 괜찮아. 내 방에서 자도. 침대에 몸을 묶어두면 되니까.”
“지난번에도 그랬는데 풀고 나갔다며. 필립이 쓰는 방을 써. 아침에 나가면 되잖아?”
물 흐르듯이 대화가 흘러간다.
침대, 몸, 방, 아침. ……장난해?
“그래도…….”
“야. 게르웨르.”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리체의 앞이 아니었으면 이안드웨인에게 능력을 사용하고도 남았다.
데온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이안을 불렀다.
그러니까, 제가 이안드웨인을 주워가지 않으면 리체의 방에 들어간다는 얘기지. 어림도 없다.
“따라와.”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