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능력자는 안 돼
데온이 이안을 방에서 재워준다는 뜻이었다.
어리둥절한 이안과 달리, 데온의 말을 곧바로 알아들은 리체가 밝아진 얼굴로 데온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진짜? 고마워! 오빠!”
여자 기숙사에 몰래 숨어드는 것보다, 같은 건물인 데온의 방에서 자는 편이 나을 터였다.
리체는 이안에게 잘 됐다며 활짝 웃은 후, 데온에게 속삭였다.
“이안한테 능력 사용하면 안 돼. 알지?”
데온이 뚱하게 답했다.
“몰라.”
* * *
잠시 뒤.
데온과 이안은 침실 문 앞에 서 있었다.
“…….”
밤중에 신세를 지는 것이니 더는 폐가 되면 안 됐다.
이안은 반대쪽에 있는 빈방에 조용히 들어가려고 했으나. 데온에게 붙잡혔다.
“내 동생이 너 감시하란다.”
데온은 어디서 가져온 긴 끈을 제 손목에 묶고, 반대쪽 끝은 이안의 손목에 묶였다.
“이건……?”
“그 몽유병인지 뭔지 아니면 움직이지 마. 잠 방해받는 거 싫어하니까.”
데온은 이안을 노려보며 단단히 경고한 뒤, 침대로 걸어갔다.
이안은 팽팽해지는 손목 끈에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옆쪽, 떨어진 소파에 베개와 이불을 던져 준 걸로 봐, 자신의 자리는 저기인 듯했다.
이안은 조심스럽게 소파에 누웠다.
데르케디온 로드윅에 관한 소문 중 몇 가지는 무시무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데르케디온의 심기를 거스르면 다음 날 아침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는 것이었다.
‘암살자 가문이라 그런지 소문이 살벌해.’
이안은 끈을 묶은 오른쪽 팔에 꼿꼿이 힘을 주었다.
데온을 깨우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무서운 것도 있었지만, 자신을 재워주는 데온에 대한 예의였다. 소파 하나를 차지했으니 잠을 방해하지는 말아야지.
눈을 감았지만, 정신이 또렷했으니 잠이 올 턱이 없었다.
‘리체.’
드디어 이름을 알았다.
이안은 몇 번 더 리체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며 웃음 지었다. 네 이름이 리체였구나.
“두 분은 여기에 잠시 계세요. 제가 금세 도련……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필립이 데온을 데리러 가 리체와 단둘이 남았음에도, 둘은 어색한 공기에 쉬이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거울을 통해 대화하는 것과 실제로 만나 말을 나누는 것은 느낌이 전혀 달랐다.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 상황에도, 이안은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만은 내뱉었다.
“나, 살아 있어.”
“응. 정말 잘 됐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말하는지는 정확히 통했다.
웃으며 리체가 대답해주자, 이안은 정말 제가 살아 있음을 느꼈다.
더 시간이 지난 미래에도 같은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남아야 했으니, 몽유병을 감시해준다는 리체의 제안도 쉬이 거절하지 못했다.
‘데르케디온 선배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들었는데.’
아무리 여동생의 부탁이었다지만, 데르케디온은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을 터였다.
이안은 슬그머니 뜬 눈으로 침대 위에 누운 데르케디온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리체와 닮지 않았다. 저 높은 콧대는 닮았을까. 잠든 데르케디온의 얼굴이 낯설었다. 이렇게 같은 공간에 있는 일이 올 거란 상상도 못 해본 인물이었다.
데르케디온 로드윅. 무섭기는 해도 우수한 성적에, 가문에, 우월한 외모에. 교내에서 은근히 추종자들이 많았다.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지만.
“게르웨르.”
자는 줄 알았던 데온이 입을 열었다. 시선만으로 인기척을 느끼고 반응한 것이었다.
“내 동생이랑 사귀면 죽일 줄 알아.”
“네……?”
눈을 감고 있었으나 잠이 오지 않기는 데온도 마찬가지였다.
게르웨르와 손을 잡고 “리체눈 이안이랑 결혼하고 시푼데…….”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 제 여동생의 환청까지 들린 참이었다.
진짜 어림도 없다.
‘능력자는, 안 돼.’
그러니 게르웨르가 리체와 연애를 한다고 하면 제가 나설 것이다.
언제가 됐든, 능력자와 제 동생은 절대 안 된다.
데온은 아무 걱정도 없이 태평한 제 여동생 대신 이안을 경계했다.
“꿈도 꾸지 마. 게르웨르.”
* * *
“인간의 체내에는 마력을 생산하는 코어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나눠드린 마석이라는 이 광물은, 코어를 가지고 마력을 독자적으로 만들어내는 신비한 물질입니다. 인간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마석의 마력을 이용한 것이지요.”
마법 실습수업이 한참 진행 중인 훈련장.
리체는 럼블라 교수의 설명을 들으며 손에 놓인 마석을 바라봤다.
진주만 한 크기의 별 조각과는 달리, 나눠 받은 마석은 주먹만 한 커다란 크기였다.
‘크기 말고 다른 건 모르겠네. 마석은 별의 고유 특성이랑 관련이 없는 건가?’
주머니에 있는 별 조각을 꺼내 비교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손에 쥔 마석이라도 유심히 살폈다.
그런 리체를 주변 학생들이 힐끔거렸다.
그중에는 지난번, 리체의 마법 친화도 검사지를 가져갔던 이즈라 컨트도 있었다.
그녀는 리체를 의식한 뒤, 제 손에 쥔 마석을 자신만만하게 바라봤다.
‘마석 사용하는 건 자신 있어. 집에서 연습했으니까.’
마법 친화도는 확실한 재능이지만, 그것만으로 마법을 잘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마력의 흐름을 조절하는 연습, 수식에 관한 이해, 그 외 필요한 모든 지식.
이즈라가 아카데미 입학 전부터 피나는 노력으로 습득한 것이었다.
이번만큼은 트아리체를 이길 수 있을 거야.
“오늘부터는 마석을 가지고 실습을 시작할 겁니다. 마석을 가지고 앞으로 나오세요.”
럼블라 교수의 말에 학생들은 훈련장의 넓은 단 위로 올라왔다. 바닥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려진 X자 위에 한 명씩 자리를 잡았다.
각 자리 앞에는 허리춤까지 오는 나무 책상이 있었고, 그 위에 비커와 돌멩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첫 번째로 배울 마법은 변화입니다. 존재를 부정하고 다시 새로운 존재를 부여하는 거죠. 시범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시범을 보인다는 럼블라 교수는 한 손에 마석이 달린 스탬프를, 다른 한 손에는 돌멩이를 잡았다.
돌을 든 손을 비커 위에 올린 뒤, 변화 마법의 영창을 시작했다.
10초가량의 긴 영창이 끝나자, 스탬프의 마석이 번쩍이더니 돌은 물로 변해 비커를 가득 채웠다.
학생들이 사이에서 오오, 거리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물로 변하는 양이 마법 실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미리 들은 탓이었다.
비커를 가득 채울 정도면 고위 마법사였다.
“변화 마법 주문은 이론 수업에서 배우셨을 테니, 시작해보세요.”
첫 마법 실습이었다.
럼블라 교수의 허락이 떨어지자, 너나 할 것 없이 마법을 시도했다.
몇몇은 영창을 실수해 여전히 돌에서 바뀌지 않았고, 몇몇은 비커에 물을 채우는 데 성공했다.
반의반 컵, 반 컵, 그보다는 살짝 높게. 같은 크기의 돌멩이였어도 물의 양은 제각각이었다.
‘됐어!’
이즈라는 비커의 4/5를 채운 물을 보고 뿌듯한 마음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때.
“트, 트아리체 학생!”
럼블라 교수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첨벙.
‘물……?’
이즈라는 발에서 느껴지는 축축함에 밑을 내려다봤다.
믿을 수 없었다. 훈련장의 단에 맑은 물이 얕게 흐르고 있었다. 아니, 얕은 물이 아니었다. 물은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뭐, 뭐야?!”
“저기 봐! 트아리체의 비커!”
우왕좌왕하는 학생들이 리체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 앞에 있는 비커에.
비커는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수도꼭지를 뒤집어 틀어놓은 것처럼, 물이 솟아났다.
럼블라 교수가 다급히 리체에게 외쳤다.
“트아리체 양! 멈추세요!”
“어, 어떻게요?”
“역술식으로요!”
하지만 리체가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배우지 않았으니.
럼블라 교수가 역술식을 행했으나 리체의 마법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멈출 줄 모르는 물에 강의실의 수심이 높아졌다.
학생들은 대피하고, 급기야 수업을 듣던 로벤하프가 호출됐다.
영문도 모르는 채 럼블라 교수를 따라온 로벤하프는, 홍수라도 난 듯한 강의실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났나요? 물난리네요.”
“트아리체 양의 마법입니다. 물이 멈추지 않으니 로벤하프 학생이-.”
리체의 마법. 로벤하프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훈련장 2층에 안절부절못하는 리체를 발견했다.
“이거, 다 얼리면 되죠?”
럼블라 교수가 그렇다고 말할 새도 없었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강의실에서, 로벤하프는 능숙하게 얼음을 타고 리체의 앞에 섰다.
“와.”
“로, 로벤하프 오빠.”
“진짜 멋있다. 리체.”
무서운 게 아니고요……?
근처에서 그 말을 들은 마법과 1학년 학생들이 반박하고 싶어 했지만, 그러질 못했다.
반짝이는 로벤하프의 얼굴이 진심이라고 말하고 있었으니.
* * *
“위험합니다.”
총장실.
럼블라 교수는 총장과 독대했다.
“트아리체 학생은 엄청난 자질을 가졌음에도 그걸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위험하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럼블라 교수께서는?”
“그렇습니다.”
총장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럼블라 교수를 바라봤다.
오전에 있던 훈련장 침수 사건은 총장도 익히 아는 바였다. 소문을 들은 학생들이 몰려와 훈련장을 놀이터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위험하다면, 교수께서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건가요?”
“트아리체 학생이 마법을 배우는 것을 금지해 주십시오.”
나 원 참.
총장은 속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심드렁했다.
‘돌멩이로 그 정도 물을 만들어내는 애를 두고 마법을 배우지 말라니?’
세기에 한 번, 아니 지금껏 본 적 없는 천재다. 트아리체 로드윅은.
마법 금지를 당할 만한 학생이 아니란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럼블라 이즈마틱은 트아리체의 마법 친화도를 보고 흥분하지 않은 유일한 마법 계열 교수였다.
“럼블라 교수, 혹시 트아리체 양이 마법 친화도가 높은 게 싫습니까?”
“어떤 의도도 여쭤보시는 겁니까?”
“로드윅 가문에서 그런 천재가 나오는 게 싫은 거냐고 묻는 겁니다. 당신은 로드윅 공작 각하를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깐요.”
럼블라는 잠시 침묵했다.
총장은 가라앉은 럼블라의 보라색 눈을 보며 말했다.
“교수의 생각이 어떻든, 트아리체 양에게 마법을 금하라는 교수의 말에 동의할 수는 없군요. 이미 마법과로 전과한 학생에게 마법을 금할 방법도 없고요.”
“하지만 총장님. 트아리체가 가진 자질은 위험합니다.”
“그러니 가진 능력을 조절할 방법을 알려줘야죠. 트아리체 양은 숨겨놓는다고 가려질 학생이 아닙니다. 보물은 어디에 있든 빛을 뿜어내기 마련이니까요.”
“통제할 수 없는 큰 빛을 무엇으로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럼블라 교수는 반박했다.
두 사람의 팽팽한 공방 속에, 총장은 타협점을 제시했다.
“그러면 확인해보죠.”
“확인이라니요?”
“결국, 럼블라 교수께서는 강한 힘을 가진 트아리체 양이 위험한 인물이 될까 봐 걱정하는 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총장은 자신의 눈가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러면 아이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분께 확인을 부탁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생각하시는 분이.”
“맞아요.”
럼블라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총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르웨르 공작 각하께 시간을 내실 수 있는지 여쭤보겠습니다. 트아리체 양의 문제는,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해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