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39)화 (39/89)

39화 너는 몰라

“왔군.”

블레이크는 제 서재로 들어오는 소년을 향해 아는 척을 했다.

“안녕하세요. 로드윅 공작님.”

금발의 소년, 이안드웨인이었다.

어제 도착한 블레이크의 서신에 외출 허가를 받아 황도에 있는 로드윅 저택을 찾은 것이었다.

블레이크는 보던 서류를 마무리한 뒤, 책상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맞은편에는 블레이크에게 자리를 권해 받은 이안이 앉아 있었다.

“몽유병의 원인을 찾았다.”

“정말이세요?”

블레이크의 말에 이안의 얼굴이 밝아졌다.

블레이크는 자신이 알아 온 것을 이어 설명했다.

“고대에 사람을 병들게 하는 저주를 가진 아티팩트가 있었다더군. 몸에서 떨어지지도 않고. 마력을 봉인하는.”

“그러면……”

짚이는 것이 있었다. 이안은 가슴뼈 쪽에 손을 가져갔다. 셔츠 아래로 목걸이가 만져졌다.

“능력자들의 힘이 마력과 연관이 있다는 연구도 있었지. 게르웨르의 능력자인 네가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 목걸이가 고대 유물일 가능성이 커.”

게르웨르 공작이 고대 유물에 심취해 있다는 보고와 이안의 입학 시기도 엇비슷했으니.

“혜안을 가진 미치광이. 게르웨르 공작은 정말 이름값을 하네요.” 

제드의 말마따나 미친 게르웨르 공작이 제 아들을 죽이려고 목걸이를 차게 했을 터였다.

“……예상, 했어요.” 

“그렇군.”

블레이크는 이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도 없는 어쭙잖은 위로를 건넬 성격도 못 되었다. 그는 이안에게 따뜻한 말 대신 해결책을 제시했다.

“알아보니 당장 목걸이를 벗기는 것은 어렵다더군. 원칙대로라면 저주를 건 게르웨르 공작만이 벗겨낼 수 있는 거라, 강제로 시도해보기도 뭣해. 잘못하면 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테고.” 

“…….”

블레이크는 이안에게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주머니 속에서 이안의 것과 비슷한 목걸이가 나왔다.

“게르웨르 공작이 준 것과 비슷한 고대 유물이지. 능력의 봉인은 목걸이를 벗는 것 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지만. 병들어가는 건 그게 막아 줄 거다.”

“몽유병은 사라진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우선은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당장 죽지 않을까 걱정하며 밤을 지새우지 않아도 될 터였으니.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공작님.”

이안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은혜는 내 딸에게 갚게.” 

“……트아리체요?”

블레이크의 말에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체가 너를 도와줬으면 좋겠다더군.”

입학식 날의 일을 보고하러 온 필립이 전한 말이었다.

“가주님. 리체 아가씨께서 게르웨르 도련님을 도와주실 수는 없으시냐고 여쭤보라 하셨습니다.”  

오랜만에 리체가 제게 한 부탁이었다. 그러니 들어주는 수밖에 더 있나.

로드윅 가의 집사, 폴이 그 정보와 고대 유물을 얻는 데 사용한 경비 지출 내역서를 받고 웃는 얼굴로 기절하긴 했지만.

“……트아리체가요.”

블레이크는 리체의 이름을 듣고 수줍게 웃는 이안을 바라봤다.

“리체와 무슨 관계지?”

리체의 교우 관계에는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안드웨인의 얼굴을 보니 그저 친구가 아닌 듯했다. 아버지로서 딸에게 이상한 놈이 꼬이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안이 이상한 놈이란 소리는 아니었지만, 만일의 사태라는 건 언제나 예상 밖에서 일어나는 법이다.

“친구입니다.”

“친한가?”

“네.”

이안은 묘하게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당히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이다. 거울 너머의 아이가 리체였으니.

반면 블레이크는 애매한 숨을 들이켰다. 친한, 친구라.

잠시 뒤, 이안은 블레이크와 리체에게 꼭 은혜를 갚겠다며 한 번 더 감사 인사를 전했다.

서재를 나서는 그에게 블레이크가 말했다.

“리체랑 친하게 지내거라.”

“네.”

“친하게만.”

“……? 네.”

블레이크의 말을 잠시 생각하던 이안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카데미로 돌아온 이안은 교수실로 가던 중, 복도에 몰려 있는 인파를 발견했다.

‘지나쳐 가자.’

조용한 길을 찾아가려는 이안의 귀에, 익숙한 인물의 이름이 들렸다.

“트아리체!”

리체?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마법과 강의실의 입구에 리체가 있었다. 학생들에게 갇혀 이도 저도 못 한 채 곤란해하는 얼굴이었다.

“자, 잠시만요.”

학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수행원은 별도의 명령이 없는 경우 방과 후가 돼서야 시중이나 호위를 드는 게 일반적이었다.

리체도 마찬가지였기에, 주변에는 필립이 없었다.

“지, 지나갈게요.”

학생들을 뚫고 나오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어떻게 틈을 찾아야 하는지 모르는 듯했다.

도와줘야 해.

이안은 인파를 헤치고 들어가 강의실 문 앞에 서 있는 리체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체!”

‘이안?’

이안의 얼굴을 확인한 리체가 서둘러 손을 잡았다.

“앗, 트아리체. 잠시만!”

“나 아직 할 말이 있는데-!”

빠져나가는 리체의 모습을 본 학생들 사이로 아쉬운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안은 팔로 리체의 몸을 보호해준 뒤, 인파 밖으로 나오자마자 리체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 이안. 그만 뛰어도 될 것 같아.”

얼마 뒤, 리체가 숨이 찬 목소릴 이안을 불렀다.

이안은 리체의 말에 뛰는 것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새 건물 몇 개를 지나쳤다. 주위에 학생들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다행히 리체를 쫓아오지는 않은 듯했다.

“무슨 일이었어?”

“그, 얼마 전에 훈련장 마법 사고 때문에…….”

리체의 볼이 붉었다. 달리느라 열이 오른 건지, 사고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건지 몰랐다.

훈련장 마법 사고. 이안도 익히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한동안 학생들의 대화 주제가 그것이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리체에게 몰려간 건가?

“혹시 지난번처럼 널 괴롭히려고 했어?”

지난번, 복도에서 필립에게 무릎 꿇으라던 사건이 있었지 않은가.

그때처럼 리체가 피해자가 되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이안이 당장이라도 항의하러 갈 것처럼 몸을 돌리자, 리체가 급히 팔을 잡았다.

“아니. 안 그랬어. 그냥-.”

“그냥?”

“……하나 더 만들어 달라고.”

리체는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가뜩이나 민망해하고 있는 사건이었다. 파이톤스가 그렇게 별의 힘을 조절하는 걸 연습하자고 했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문제인 듯싶었다. 마력을 잘 조절하지 못해 벌어진 일.

파이톤스가 봤었더라면 아직 멀었다며 혀를 찼겠지.

‘으. 창피해.’

그런데 의외로 그게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였다는 게 문제였다.

훈련장에 만들어진 커다란 빙판장.

얼린 건 로벤하프였는데. 로벤하프가 그건 리체의 마법이라고 떠들고 다닌 바람에, 리체는 아카데미 학생들 사이에서 영웅이 되어 있었다.

고학년은 유치하다 여겼지만, 4학년들까지는 확실히.

“그래서 쉬는 시간마다 학생들이 찾아오는데, 오늘은 유독 몰려서…….”

리체는 우물쭈물했다. 평소라면 혼자서도 잘 빠져나가는데 오늘만 유독 애를 먹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이안.”

리체는 짧은 한숨과 함께 고민을 털어버린 뒤, 속 시원한 얼굴로 이안에게 인사했다. 그래도 덕분에 살았다.

“하마터면 오빠랑 저녁 먹기로 한 약속에 늦을 뻔했어.”

“데르케디온 선배랑?”

“응. 학생 식당에서. 너도 갈래?”

데온과 학생 식당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로벤하프도 식당으로 올 테니, 이안이 껴도 분위기가 그렇게 험악해지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고 싶은데, 교수님께 갔다 와야 해. 외출증을 반납해야 하거든.”

“그래? 기다릴까?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아니야.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 편하게 식사해. 리체.”

아쉽다. 내심 데온과 이안이 친해지길 바랐는데.

그래도 갈 곳이 있다는 이안을 억지로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리체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런데 외출? 밖에 다녀온 거야?”

리체가 궁금한 듯 물었다. 

이안은 리체에게 속삭였다.

“로드윅 공작님을 뵙고 왔어.”

“어?”

리체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이안을 바라봤다.

세상에. 이안이 우리 아빠를 보고 왔다니.

“왜? 왜? 우리 아빠? 아빠는? 잘 계셔?”

반가움과 놀라움에 흥분한 리체가 발까지 구르며 이안에게 질문했다.

이렇게 신난 리체는 처음 봤다. 반짝이는 은색 눈동자를 보니 입이 근질근질했다. 

나중에 조용히 말할까 했는데.

‘빨리 알려주고 싶어.’

이안은 다시 리체에게 귓속말했다.

“로드윅 공작님께서 몽유병을 막는 방법을 찾아주셨어.”

“진짜?!”

그 소리에 리체는 제 일처럼 크게 기뻐했다.

잘됐다며, 아빠가 도와줘서 다행이라며, 신나 하던 리체는 점점 울 듯한 표정을 짓더니 결국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다행……이야…….”

얼마나 걱정했는가. 이안이 죽을까 봐.

데온이 싫어할 걸 뻔히 알면서도 이안을 밤에 감시해달라 부탁할 정도로 걱정됐다.

그랬는데, 블레이크가 방법을 찾아준 것이다.

리체는 당장이라도 아카데미를 나가 블레이크를 꽉 안고 고맙다고 외치고 싶었다.

“고마워. 리체.”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뜬금없는 이안의 인사에 리체가 어리둥절해 물었다.

이안에게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할 사람은 블레이크인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리체의 말에, 이안의 눈에도 눈물이 살짝 고였다.

‘너는 모르지.’

네가 나한테 무슨 존재인지. 네가 나에게 뭘 해줬는지.

“고마워. 진짜.”

블레이크나 데온이 무슨 의도로 리체와의 관계를 물어보는 건지, 이안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11살은 생각보다 어리지 않다. 누구를 좋아한다느니, 사귄다느니 말들이 나오는 시기니까.

하지만 제 또래 아이들이 느끼는 그런 감정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라면, 제 마음은 그런 게 아니었다.

‘리체는, 그런 것보다 소중해.’

이안도 정의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자신이 리체에게 느끼는 마음은, 그 어떤 형태의 관계 속에서도 찾을 수 없는 가장 커다랗고 묵직한 감정이라 생각했다.

“리체.”

이안은 볼에 눈물 자국이 선명한 리체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미소 지었다.

“나는 앞으로도 살 거야.”

“……?”

“널 위해서.”

* * *

“너.”

리체는 식당 근처에서 저를 기다리던 데온을 보고 뜨끔해 재빠르게 달려가 말을 가로챘다.

“아-. 오빠, 많이 기다렸어? 어? 배고프다! 빨리 가서 밥 먹자!”

손을 잡아끄는데도 바위를 붙잡은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평소라면 투덜거리면서 따라왔을 텐데.

리체는 별수 없이 두어 발자국 뒷걸음질 쳐 데온의 양팔을 제 어깨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데온의 양손을 잡아끌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가자!”

어림도 없지.

리체는 제 뒤에 서서 꿈쩍 않는 데온에게 물었다.

“안 가……?”

데온의 손이 리체의 양 볼을 잡아 들어 올렸다.

으어,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낸 리체가 마주한 건, 잔뜩 심각해진 데온의 붉은 눈이었다. 

“울었냐?”

“……으어니(아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