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거짓말이야
“뭘 아니야. 눈가가 빨개져서 평소보다 더 멍멍이 같아졌는데. 야, 누구야.”
“아이라이가(아니라니까).”
볼을 잡힌 탓에 발음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용케도 알아듣고 대답하네. 데온은.
‘아빠 닮았어.’
그러다 리체는 제 앞에 보이는 얼굴을 관찰했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 때문에 인상이 사나워 평소에는 잘 몰랐는데.
저렇게 심각한 눈을 하니까 진중한 느낌의 블레이크를 닮은 듯했다. 리체는 제 볼을 잡은 데온의 손을 끌어내렸다.
“오빠.”
“빨리 말해. 누구야.”
리체는 뒤를 돌아 데온의 품을 파고들었다.
데온이 어처구니가 없는 눈으로 리체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뭐 하는 짓이야. 이런다고 그냥 넘어갈 거 같아?”
그렇게 으르는 것치고 입꼬리가 씰룩거리긴 했지만.
“오빠, 나 아빠 보고 싶어.”
이안이 블레이크를 만나고 왔다고 하니 그만 그리움이 터져버렸다.
한 장 있는 가족사진은 로드윅 공작성에 두고 와 가져올 수가 없었고.
거울을 봐도 저와 블레이크는 닮은 구석이 없으니 왠지 모를 쓸쓸함이 들 때도 있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도 벌써 3주째.
블레이크가 사냥제 때문에 집을 비울 때도 3주면 돌아왔다.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었다.
로드윅 공작성 사람들에게 듣기만 했던 향수병이 블레이크를 두고 생긴 것만 같았다.
“뭐야, 너 그래서 울었어?”
“응? 응.”
운 건 그것 때문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두지. 뭐.
리체가 고개를 끄덕이자, 데온은 리체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바보야?”
왜 갑자기 시비인가.
리체가 고개를 위로 들었다. 데온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가면 되지.”
“어딜?”
“아버지 보러.”
“언제?”
“주말에.”
“……진짜?! 우리 나갈 수 있어?!”
“……어디 감옥에 갇혔냐?”
당연히 나갈 수 있지. 외출 신청만 하면.
데온은 쫑알거리며 이런저런 질문을 시작한 리체의 손을 잡아끌었다.
“일단 밥이나 먹어. 배고프다며.”
* * *
“오늘 리체가 기분이 굉장히 좋은가 보네?”
로벤하프는 음식이 차려진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
조금 늦게 왔지만, 데온과 리체가 앉은 테이블의 맞은편은 늘 비어 있었기에 로벤하프의 지정석이나 마찬가지였다.
“얘 울었다.”
“어? 왜?”
데온의 말에 로벤하프가 깜짝 놀라 리체를 바라봤다.
도리도리.
빵을 씹고 있는 탓에 말을 할 수 없어 리체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데온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눈빛을 보냈지만, 데온은 그런 리체를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아버지 보고 싶다고.”
“로드윅 공작님?”
그것 때문에 울었다고? ……귀여워.
로벤하프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윽, 하는 심장을 조용히 가라앉혔다.
그 사이, 빵을 삼킨 리체가 데온에게 속삭였다.
“로벤하프 오빠한테 왜 말해. 창피하게.”
“리체, 둘이 무슨 얘기 해? 나도 알려주면 안 돼?”
데온은 리체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는, 생글생글 웃는 로벤하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로벤하프.”
“응. 데르케디온.”
“내 동생이 주말에 없을 거니까 찾아올 생각하지 말래.”
“내가 언제-.”
해명하려는 리체의 입속으로 포도 한 알이 들어 왔다. 데온 짓이었다.
왜 이러지. 진짜.
“씹고 삼킨 다음에 말해.”
“…….”
“괜찮아, 리체. 데르케디온이 멋대로 하는 말에는 익숙한걸.”
그 말대로 로벤하프는 타격 한 번 받지 않은 듯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데르케디온의 견제는 아무렇지도 않지.’
자신이 어떻게 리체의 친한 오빠 자리에까지 올라왔는데.
저쯤은 우습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리체에게 전해줄 말도 있고.
“리체, 좋은 소식 가져왔는데 알려줄까?”
좋은 소식? 리체는 포도를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벤하프는 식당에 오기 전에 교수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이 말을 듣느라 저녁 시간에 조금 늦은 것이었다.
“디저트 연구회 동아리 개설 확정됐어.”
“진짜? 잘 됐다.”
리체의 얼굴이 환해졌다. 좋은 소식은 한꺼번에 온다더니.
이안의 몽유병 걱정을 던 데다가, 데온의 동아리 가입 걱정도 덜게 되었다.
“동아리 활동은 언제부터 하는 거야?”
“음, 우선은 모레쯤 한번 모이면 좋을 거 같아. 그때 어떤 방식으로 운영할 건지 상의해야지.”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면 어디서 모여? 지난번 빈 강의실?”
“아니.”
로벤하프의 눈웃음이 깊어졌다. 사실 동아리 개설 허가는 당연히 받을 거라 예상했던 일이었다.
자신이 제대로 활약한 건 그다음.
로벤하프는 리체에게 제 능력을 보여줄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말했다.
“우리 동아리방에서.”
* * *
“동아리방이 특별해?”
리체는 함께 복도를 걷는 이안에게 물었다. 리체의 반대쪽 옆에는 지크베르트가 나란히 걸으며 하품하는 중이었다.
“응. 원래 신설 동아리는 보통 세 동아리가 부실 하나를 나눠서 사용한대. 동아리방은 활동 실적을 쌓아야 받을 수 있다더라.”
“……그러면 우리가 받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우리는 놀고먹는 동아리인데.”
“그러게.”
그 배경에는 로벤하프의 화려한 학생회 인맥이 있었지만, 리체와 이안이 알 리 없었다.
지크베르트는 참새 모습으로 우연히 그 내막을 목격했으나, 흥미 없는 주제인 탓에 지금 대화에 참여할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
“리체.”
오히려 지크베르트의 흥미를 끈 건 따로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지크베르트가 리체를 불렀다.
리체와 이안이 자신을 쳐다보자, 지크베르트는 특유의 나른한 무표정으로 둘을 가리켰다.
“둘이 친해졌어?”
“응?”
“응. 친해.”
리체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이안이 즉답했다.
지크베르트가 다시 물었다.
“친구야?”
“응.”
이번에는 리체가 바로 대답했고, 이안이 조용했다.
“그렇구나.”
지크베르트는 잠시 말없이 걷다가 돌연 늑대로 변해 리체의 옆에 붙었다.
“응? 타라고?”
끄덕.
지크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는 로드윅 공작성이 아니니 말을 해도 되는데.
하지만 지크베르트는 블레이크와의 약속을 지키려는 듯, 늑대의 모습일 때는 리체와 말로 대화하지 않았다.
“여기서?”
끄덕.
‘타야 하는 이유가 있나?’
다행히 복도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있었다면 갑자기 나타난 늑대에 누군가 비명을 질렀을 터였다.
리체는 엉거주춤 지크베르트의 등에 올라탔다.
이제는 늑대화가 성체 모습에 가까워져서, 성인 두 명은 문제없이 탈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리체와 눈이 마주친 이안이 살짝 웃었다.
“나 지크베르트 늑대화 한 거 처음 봐. 멋있다.”
“그, 그치?”
“컹.”
지크베르트의 꼬리가 살랑거렸다.
왜 자신을 태운 건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니 됐나.
조금 더 걸어 복도 끝에 다다르니, 로벤하프가 말한 대로 명패가 붙은 문이 나타났다.
디저트 연구회
리체가 지크베르트의 등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여기인가 봐. 정말 벌써 명패가 나왔네.”
로벤하프가 동아리 개설 이야기를 한 게 그제이니, 상당히 빨랐다.
거기다 내부 인테리어까지 끝내놓아서 그냥 사용한다면 된다고도 했다.
‘그것 말고도 또 무슨 얘기를 했더라.’
리체는 이안과 지크베르트에게 로벤하프에게 들은 내용을 전달했다.
“3학년은 오늘 수업이 늦게 끝난다고 우리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벌컥.
동아리방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나온 한 사람의 등장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 * *
“데르케디온, 게르웨르 공작님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로벤하프는 칠판을 노려보는 데온을 보고 생각했다.
칠판 글자가 잘 안 보이면 좀 더 앞으로 가서 앉으면 될 텐데.
맨 뒷자리를 고수하는 주인 탓에 데온의 눈은 오늘도 고생이었다. 자신은 덕분에 편하게 뒷자리에 앉지만.
주변에 사람도 없어서 속삭이듯 작게 말하면 지금처럼 민감한 얘기도 할 수 있었다.
“아버지한테 들었는데, 다시 사교계에 얼굴을 내비치시는 모양이야.”
“…….”
그 말에 데온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좀 전보다 깊어졌다.
게르웨르 공작.
한동안 안 보여 신경 쓸 일이 없어서 좋았는데. 소식을 들으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올해 32세이신가? 후계자는 이안드웨인이겠지? 슬슬 공표하실 때가 됐는데.”
그 세르디야 공작도 지크베르트를 후계자로 선언했으니.
이번 대에 공식적인 후계자를 발표하지 않은 건 게르웨르 공작뿐이었다.
그러다 로벤하프는 공작들의 나이를 계산해보았다.
세르디야 공작님이 서른일곱, 제 아버지가 서른넷, 로드윅 공작님이 서른다섯.
“데르케디온. 로드윅 공작님 몸은 좀 어떠셔? 우리 아버지는 요즘 통증이 심해지셨대.”
“…….”
“아, 미안. 너 이런 얘기 싫어하지.”
로벤하프는 데온의 침묵에 화제를 더 이어가지 않고 수업하는 교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히베츠만 공작가의 능력자들은 자신들의 수명을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그게 긍지라고 여겼으니.
그렇기에 40세가 가까워지면, 일반적인 7, 80세의 노인들이 이곳저곳이 아프다 소리하듯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곤 했다.
그래서 저도 그만 그런 주제를 꺼내고 만 것이었다.
‘데르케디온에게 실수했네.’
로벤하프는 힐끔 데온의 얼굴을 살폈다.
여전히 칠판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제 말을 크게 담아두지 않는 듯했다.
로벤하프는 안도했다. 데온은 생각이 많아졌지만.
‘아버지의 몸 상태…….’
제 아버지는 무척이나 건강했다. 더는 자신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대신 그때쯤 리체가 크게 앓았지만.
자신이 한 번 경험한 것과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나니, 이번에는 이해가 쉬웠다.
‘아버지의 옴이 정화됐어.’
그리고 그 과정에 리체가 연관이 있을 터였다.
정확히 리체가 무슨 존재인지는 알지 못해도, 데온은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
사실 리체가 무슨 존재이든 데온에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재작년.
방학을 맞은 데온은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천천히 달리는 마차 안에서, 오랜만에 멍청한 얼굴을 보겠네, 하고 느긋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그러다 로드윅의 기사가 전한 소식에 마차마저 버리고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공작성에 도착했다.
‘거짓말이야.’
본성의 문을 넘을 때까지만 해도 데온은 끊임없이 되뇌었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야.
“헉, 헉.”
……거짓말이 아니면?
리체의 방문을 열었다. 열린 방문 앞에서 데온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끔찍한 광경을 눈에 담았다.
수척한 블레이크,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방 안, 어둡게 내려앉은 공기, 침대 위에 붕대를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리체.
눈가가 새빨개진 안나가 데온에게 다가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아가씨께서 돌아가실……지도 몰라요.”
그럴 리 없어.
데온은 천천히 리체에게 걸어갔다.
일어날 거야. 일어날 거다.
내가 능력으로 리체의 호흡을 조절하면-.
“하지 말거라.”
블레이크의 갈라진 음성이 패닉에 빠진 데온을 막았다.
침대의 머리맡에서 리체에게 손을 뻗던 데온이 블레이크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버지.
“리체가 죽어요.”
데온의 붉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