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41)화 (41/89)

41화 왜 조용하지?

지금 데온을 움직이게 하는 건 머리로 하는 사고가 아니라 과거의 후회였다.

로드윅 공작 부인의 숨이 멎기 전, 제 능력을 사용했더라면 어머니가 호흡을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그러나 그것 또한 데온의 가정이자 미련이었다. 블레이크마저 못한 일을 당시 막 능력이 발현된 데온이 할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더욱이 지금 리체에게 능력을 사용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리체의 병세는 호흡을 조절한다고 나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렇기에 블레이크는 아들의 행동을 저지한 것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도련님. 리체 아가씨는 숨을 쉬고 계시잖아요?” 

제드가 데온을 침대에서 떼어놓았다.

그날부터 벽에 가져다 놓은 의자 하나가 데온의 지정석이 되었다. 침대에 누운 리체가 잘 보이는 곳이었다.

데온은 지크베르트와 사람들의 숨 냄새를 맡으면서도, 리체가 있는 방을 떠나지 않았다.

“한 번은 죽을 뻔했는데, 살아났어.” 

“……어떻게 살아났는데?”

“모르겠어. 신한테 빌어서 그랬나?”

“신?”

“응. 더는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했거든.”

분명, 리체가 마물의 숲에서 제게 말하지 않았는가. 죽을 뻔했는데 신이 살려줬다고.

신은 제 편이 아니지만, 리체의 편일지 모른다.

“…….”

데온은 몇 날 며칠 생사를 오가는 리체를 보며 결심했다. 

만약, 리체가 무사히 깨어난다면 다시는 이런 일을 겪게 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리체를 자신이 지켜낼 것이라고.

‘그러니까 게르웨르는 안 돼.’

데온은 필기하던 펜을 내려놓고, 옆자리에 앉은 로벤하프에게로 고개를 틀었다.

“왜 그래?”

뜨끔한 로벤하프가 데온에게 물었다. 데온은 경고하듯 로벤하프에게 말했다.

“너도.”

* * *

디저트 연구회의 동아리방.

리체, 이안, 지크베르트는 쪼르르 같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 소파.

“…….”

차를 마시고 있는 고귀한 분위기의 귀족.

단정히 올린 하늘색 머리카락이나, 격식을 갖춰 차려입은 옷차림이 빈틈없는 그의 성향을 보여주는 듯했다.

‘춥다.’

리체는 귀족의 상반신을 채운 일렁이는 기운을 보며 몸을 살짝 떨었다. 냉기를 다루는 능력자, 히베츠만 공작이었다.

‘인사 말고는 한 번도 얘기를 안 나눠봤는데.’

히베츠만 공작과 이렇게 나란히 앉은 건 처음이었다. 

그간 로드윅 공작성에 히베츠만 공작이 종종 방문하긴 했지만, 리체와는 짧은 인사만을 나눈 게 전부였으니.

‘왜인지는 알 것 같기도 하고.’

다들 쉬쉬하며 말을 하진 않았으나, 리체는 히베츠만 공작이 저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생각했다.

명문가인 히베츠만 공작가는 태생을 중요시하니. 평민 출신인 자신이 공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을지 몰랐다.

그러니, 리체에게 지금의 상황은 조금 어려웠다.

눈치를 보는 리체와 히베츠만 공작의 눈이 마주쳤다.

‘앗.’

능력만큼이나 차가운 푸른 눈. 

로벤하프의 눈이 한여름의 청량한 푸른빛을 닮았다면, 히베츠만 공작의 눈은 한겨울의 냉랭한 얼음꽃을 닮았다.

“별로 좋은 차는 아니군. 조만간 괜찮은 차를 보내주지.” 

“감사……합니다.”

리체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어색한 건 리체만이 아닌 듯했다. 찻잔을 만지던 이안은 리체와 눈이 마주치자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수인화를 푼 지크베르트는 리체의 옆에서 가끔 하품하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로벤하프 오빠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이 자리가 끝이 날 것 같았으니.

한편, 히베츠만 공작은 차를 음미하는 척하며 리체를 살피는 중이었다.

그가 동아리방으로 오기 전.

장학금 후원 문제로 방문한 총장실에서 트아리체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다.

총장은 서랍에서 서신 한 통을 꺼내며 히베츠만 공작에게 물었다.

“히베츠만 공작 각하, 혹시 게르웨르 공작님과 연락이 닿으시는지요?”

“게르웨르 공작?”

“네. 재학생 관련해 상담 드릴 게 있어 몇 번 통신을 신청했는데, 부재중이시라는 답변만 돌아오더군요.”

“학생 상담을 게르웨르 공작에게? ……재학생 이름을 알 수 있나?”

“각하께서도 아실 겁니다. 트아리체 로드윅. 로크샤 제국의 미래를 빛낼 대단한 학생이지요.”

블레이크의 딸과 게르웨르라니.

별로 좋지 않은 감이 흘렀다. 그 작자는 이미 데르케디온 로드윅을 노리던 전적이 있지 않은가.

히베츠만 공작은 총장의 손에 들린 서신을 보며 태연히 물었다.

“그건, 게르웨르 공작에게 보낼 건가?”

“맞습니다. 서신은 부재중이어도 받아보실 수 있으니깐요. 시간이 되실 때 답장해주십사-.”

“주게. 내가 전해주지.”

“아, 아닙니다. 각하께 그런 번거로운 일을-.”

“주게.”

총장에게 뺏듯이 가져온 서신은 지금, 히베츠만 공작의 상의 안주머니에 고이 자리 잡았다.

‘블레이크에게 이야기해두는 게 좋겠군.’

히베츠만 공작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리체와 이안이 움찔했다.

“잘 마셨다.”

“가, 가시려고요?”

“히베츠만 공작님. 조금만 기다리시면 로벤하프 선배가 올 거예요.”

“……하암.”

히베츠만 공작은 일어나는 자신을 따라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제 아들인 로벤하프를 보러 온 게 아니었다. 블레이크의 부탁으로 트아리체를 보러 온 것이었지.

총장에게 아이들이 만든 동아리방이 있다길래 와봤다가, 운 좋게 마주쳤다.

“트아리체 로드윅.”

“네!”

“잘 지내나?”

“자, 잘 지내고 있어요.”

히베츠만 공작은 블레이크와 친한 사이인 데다가, 명문가의 수장이니 책잡힐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힘이 들어간 리체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묘하게 뻣뻣했다.

실수했다, 라는 생각이 리체의 머리를 채웠다. 히베츠만 공작은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래.”

블레이크에게 해줄 말이 생겼군.

히베츠만 공작은 미련 없이 동아리방을 나갔다.

몰아치던 눈보라가 사라진 것 같았다. 세 사람은 닫힌 문을 바라봤다.

이어 복도에서 으악, 하는 로벤하프의 비명이 짧게 들리더니.

로벤하프가 허겁지겁 동아리방을 열고 나타났다. 

“리체! 우리 아버지가…….”

히베츠만 공작이 리체한테 심한 말을 했을까 걱정돼 달려온 것이었다. 

평소와 같은 리체의 모습을 확인한 로벤하프는, 그제야 시름을 놓고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뭐 해.”

히베츠만 공작에게 인사하고 뒤따라온 데온이 그런 로벤하프를 보며 인상 썼다.

그러고는 리체를 보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야, 멍멍이.”

“……?”

“저거, 마음에 드냐?”

데온이 가리킨 곳에는 강아지 인형들로 한 줄을 채운 진열장이 있었다.

리체는 그런 데온을 보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제 오빠는 키만 컸지, 아직 자라려면 멀었다.

* * *

블레이크의 서재.

아카데미를 나온 뒤, 곧장 로드윅 저택을 찾은 히베츠만 공작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셨다.

“괜찮은 차군.”

그런 히베츠만 공작의 맞은편 시야에 들어오는 책상. 

블레이크는 그곳에 앉아 히베츠만 공작이 가져온 총장의 서신을 읽는 중이었다.

“……트아리체 로드윅의 장래, 에 관해 확인해주셨으면 좋겠다?”

꾸깃. 

블레이크의 손에서 구겨지는 서신을 본 히베츠만 공작이 눈매를 좁혔다. 어차피 제 쪽에서 태워버리려던 서신이었지만, 블레이크의 손에서 알아서 없어지겠군.

“블레이크, 사건의 발단이 누군지 아나?”

“모르지.”

“럼블라 이즈마틱. 자네가 15년 전에 전쟁터에서 살린 그 여자.”

블레이크는 의자 팔걸이를 검지로 두드렸다.

히베츠만 공작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럼블라 이즈마틱이 트아리체의 재능이 위험한 것이라 주장했다더군. 그래서 게르웨르 그 작자에게 부탁해 자네 딸이 장래에 위험인물이 될지를 확인해보자고 이야기가 된 모양일세.”

하필 게르웨르.

그 눈이 리체를 본다면 위험했다. 제 딸아이가 숨기고자 하는 것을 그자가 알아차리게 될 테니.

하지만 히베츠만 공작에게 리체의 정체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필 럼블라 이즈마틱이네. 블레이크.”

히베츠만 공작이 혀를 찼다.

나쁜 이는 아니었으나, 자신의 소신을 강하게 밀고 나가는 자였다.

좋게 말하면 소신이고, 나쁘게 말하면 독선가였다. 자신의 의견만을 옳다고 믿고 강요하는.

15년 전, 전쟁에 참전한 블레이크의 능력에 한 부대가 몰살됐다.

로크샤 제국의 작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그 마을의 생존자 중 한 명이 럼블라였다.

“생존자이면서 적군을 동정해? 웃기는 소리야.”

그 뒤로 럼블라는 일 년간 능력자의 힘이 위험하다며 주장하고 다녔다. 그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얽히면 귀찮은 자인 건 확실했다.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히베츠만 공작이 럼블라의 이름에 불쾌한 기색을 내비칠 정도니.

“게르웨르 공작의 말이면 럼블라 이즈마틱이 의견을 굽힐까? 이봐, 블레이크. 차라리 그자에게 자네 딸을 보여주는 건-.”

“안 돼.”

블레이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생각해보게. 자네 딸이 졸업하려면 아직도 8년은 더 이즈마틱이 교사로 있는 아카데미에 다녀야 하는데. 매번 그 시비를 받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잖나.”

히베츠만 공작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리체의 마법 금지까지 주장했다고 하니. 럼블라 교수에게 확실한 반박의 증거를 보여, 싹을 잘라 버리는 편이 좋을 터였다. 

그래도 게르웨르 공작은 안 된다. 블레이크는 서신을 완전히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블레이크?”

“다른 방법이 있을 거네.”

게르웨르의 혜안은 그자만의 것이 아니니.

* * *

금요일 오후. 동아리방.

리체는 테이블에 몸을 바짝 붙이고 신중히 눈앞의 나무 블록들을 살폈다.

“아가씨. 저거, 저 블록을 뽑으세요.”

“저거?”

리체는 필립의 조언을 받아 젠가 탑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나무 막대를 조심히 집었다.

슬슬 막대를 움직여 끝까지 빼내는 데 성공했으나,

“헉.”

“으앗.”

나무 막대를 쌓아 만든 탑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아-. 이번엔 정말로 아가씨께서 도련님을 이기실 수 있었는데 말이죠-!”

필립은 안타까움에 제 허벅다리를 쳤다.

또 데온 도련님이 이기고 말다니. 아가씨의 수행원으로 면목이 없다.

곧 도련님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조용하시네요?”

“……왜 그러지?”

“글쎄요.”

지금쯤 그럴 줄 알았다며 비웃는 소리가 들려야 정상인데.

리체와 필립은 고개를 올려 앞을 바라봤다. 

데온은 축 늘어진 곰 인형처럼 소파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무서워.’

필립은 꿀꺽 침을 삼켰다. 

거친 숨소리를 듣자 하니, 화가 나신 게 분명했다. 

왜지? 너무 본인만 이기셔서 게임이 재미가 없으셨나?

“오빠, 왜 그래? 어디 아파?”

역시 아무것도 모를 때가 제일 용감할 때다. 필립은 데온의 뺨을 만지는 리체를 기겁하며 바라봤다.

“아, 아가씨. 지금 도련님은 함부로 만지시기에 그다지 좋은 상태가…….”

“헉. 열 나!”

“네?!”

리체는 급히 데온의 이마와 목에도 손을 가져갔다.

열이 나다 못해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필립은 리체를 도와 데온을 소파에 눕혔다.

‘정말 아프시잖아?’

믿기 힘든 일이었다. 우리 도련님께서 아프시다니.

‘그러면 이 몸으로 방금까지 아가씨랑 젠가를 두신 거야? 멀쩡한 척까지 하시면서?’

전혀 몰랐다. 아니, 아프면 의원을 찾으셔야지. 누가 그렇게까지 비상식적인 체력을 보고 싶다고 했나.

리체도 필립처럼 생각했으나, 지금은 데온의 몸을 치료하는 게 먼저였다.

‘어떻게 하지?’

데온이 쓰러질 정도로 아픈 걸 보는 건 마물의 숲 이후로 처음이었다.

리체는 데온의 옴을 확인했다. 

주먹만 한 옴은 일렁이지 않고 단단히 뭉쳐져 있었지만, 몸에 이상을 줄 정도의 상태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 별 조각으로 데온의 상태를 낫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치료를-.’

리체는 주머니에서 별 조각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데온의 손을 잡으려 했는데.

탁.

데온이 리체의 손을 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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