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나한테 손대지 마
리체가 놀란 듯 뒤로 물러섰다.
살짝 들어 올린 눈꺼풀 아래, 붉은 눈이 리체를 응시했다.
데온은 힘겹게 내쉬는 숨이 섞인 목소리로 리체에게 말했다.
“너, 아무것도 하지 마.”
그러고는 필립에게로 눈을 돌렸다.
“저택에 연락해. 아버지께 가야 하니까. 그때까지 너는 쟤 나한테 손 못 대게 하고.”
“네……? 리체 아가씨를요?”
리체라면 뭐든 허락하던 데온의 말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필립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자, 데온은 힘겹게 말을 덧붙였다.
“명령이야.”
“네.”
명령. 필립의 눈빛이 단박에 달라졌다.
로드윅 가의 소속 기사인 필립이었다. 그에게는 가주 후계자인 데온의 명령을 들을 의무가 있었다.
물론, 가장 우선시 되는 건 제가 충성을 맹세한 리체 아가씨의-.
“아가씨?”
필립은 리체에게 고개를 돌리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랐다.
“…….”
리체는 양 주먹을 꽉 쥔 채 데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울 듯한 얼굴이었다. 하긴. 자신이 아가씨여도 상처받았을 거다. 손을 쳐내던 도련님의 그 냉랭한 태도라니.
필립은 리체를 달래듯 말을 늘어놓았다.
“저, 리체 아가씨. 제가 데온 도련님께 명령받긴 했는데요. 저한테 최우선은 아가씨의 명령이거든요? 아가씨께서 명령만 내려주시면 도련님을 맘껏 만지셔도 저는 막지 않을…… 어, 어디 가세요?”
그러다 갑자기 리체가 몸을 돌려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리체는 동아리방을 나가며, 제게 질문하는 필립에게 다급히 대답했다.
“총장실! 가서 외박 허가받아올게!”
“그건 제가……!”
“필립은 오빠랑 같이 있어! ……며, 명령이야!”
필립은 휑하니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다, 데온이 누운 소파 근처에 털썩 자리를 잡았다.
리체 아가씨께 받은 첫 명령이 데온 도련님 지키기라니.
“리체 아가씨는 명령을 잘 모르신다니까.”
그쯤은 부탁만 해도 되는데.
필립은 볼을 긁적였다. 오른쪽 눈에 노란 불꽃이 일렁이다 사라졌다.
* * *
“…….”
눈을 뜬 데온은 평소와 다른 환경에 천장을 가만히 바라봤다.
익숙한 벽지다.
필립이 저택으로 자신을 옮긴 모양이었다.
“너, 아무것도 하지 마.”
리체의 손을 쳐낸 손등에 그때의 감각이 남은 듯했다. 데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일부러 사납게 말했다. 뭐든, 저를 위해 하지 말라고.
만약 제게 하려던 것이 리체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게 뭐든 달갑지 않았다.
‘멍청이.’
놀란 리체의 바보 같은 얼굴이 아른거렸다.
‘…….’
상처받았을까.
이번에는 미안하다 사과해도 받아주지 않을지 모른다.
손 하나 대지 말라니.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아픈 말도 없었다.
데온은 오히려 자신이 상처받은 얼굴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
그러다 침대 끝쪽에 엎드려 앉아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리체였다.
곤히 잠들어 있어 깨울까 걱정됐다. 데온은 움직이던 몸을 그대로 굳힌 채, 리체의 머리통을 보며 의문에 휩싸였다.
‘왜 여기에 있어? 저택까지 같이 온 건가?’
“계속 곁을 지키다가 잠들었지.”
막 침실로 들어온 블레이크가 데온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잠든 리체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데온이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다 블레이크에게 물었다.
“리체도 같이 왔어요?”
“그래. 총장이 주말 동안 외박 허가를 내려줬다더구나.”
블레이크는 데온의 침대 옆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몸은 이제 괜찮으냐.”
“네.”
“가끔은 능력을 사용해야 해. 오늘같이 고열로 폭주하지 않으려면.”
“……알고 있어요.”
데온은 가진 힘이 크기에 주기적으로 능력을 사용해 힘을 순환시켜 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몸속에서 이리저리 얽힌 힘이 폭주하곤 했다.
같은 능력자인 블레이크가 뭉친 힘을 풀어주면 금세 안정되는 증상이지만, 그전까지는 견딜 수 없는 고열에 시달렸다.
“네가 리체한테 손대지 말라고 했다던데.”
“네.”
“그래서 저기에 쭉 있었단다. 리체가 널 많이 걱정했어.”
데온의 시선이 포갠 양팔에 머리를 두고 잠든 리체에게 향했다. 침대 발판에 한쪽 팔이 닿을 정도로, 리체는 커다란 침대의 끝에 자리를 잡았다.
실수로라도 데온을 만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위치 선정이었다.
데온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제 흑발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가, 터져 나오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내뱉었다.
“……쟤는 왜 그래요?”
“쟤라니. 리체?”
“쟤, 아픈 게 제일 싫대요.”
그러면 알아서 몸이라도 사리든가.
이해할 수 없었다. 아픈 게 싫다면서 매번 사람들을 못 도와줘서 안달이다.
리체는 마치 제게 남은 선택지는 희생밖에 없는 것처럼 굴었다.
“리체가 걱정되니?”
“걱정될 짓을 하니까 그렇죠.”
블레이크는 짜증을 내는 아들을 바라봤다.
타인을 위해 열을 내는 데온이라니. 앞으로 데온에게 리체만큼이나 소중한 존재가 생길까.
블레이크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데온, 리체는…….”
“알아요.”
안다니. 블레이크는 제 아들의 말에 숨을 삼켰다.
리체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걸까.
데온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상하다는 거죠.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다른.”
어렴풋이 짐작만 하는 듯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데온에게 털어놓아야 할 터였다. 블레이크는 윗세대이니, 언제까지고 아이들과 함께일 수는 없었다.
“그래, 리체는 특별하지. 그러니 네가 나중에는 리체를 지켜줘야 해.”
데온은 블레이크의 당부에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건성처럼 보였으나, 데온은 진심으로 약속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것도 물어볼 자격이 제게는 있었다.
“이안드웨인은 왜 같이 오라고 하신 거예요.”
분명 주말에 리체와 가겠다고 했는데. 돌아온 블레이크의 서신에는 이안드웨인도 함께 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설마 걔가 마음에 드신 건 아니죠?”
데온은 경계했다.
이안드웨인이 리체와 지금보다 더 깊은 관계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게 지금 당장이든, 먼 미래든.
능력자가 소중한 사람이 되는 건, 그 바보 같은 동생의 희생을 예견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럼블라 교수가 리체의 마법 금지를 원한다.”
럼블라 교수?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이름에, 데온은 블레이크에게 물었다.
“왜요?”
“리체의 재능이 너무 뛰어나서 장래가 의심스럽다는구나. 리체가 그 힘을 통제하지 못하고 피해를 줄까 봐.”
“그렇다고 마법을 금지시킨다고요?”
능력자들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능력과 마법의 충돌로 주문이 상쇄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데온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마법에 큰 흥미가 없긴 했지만, 마법사들 사이에서 유명한 말 하나 정도는 알았다.
마력 친화도의 숫자 1은 10년의 노력과 맞먹는다.
그만큼 마력 친화도는 재능이었다. 리체의 재능은 다른 이들이 평생을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거대했고.
그런 리체에게 마법 금지를 주장하다니.
“리체의 힘을 빼앗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데온은 인상을 썼다.
그 보라색 눈의 마녀. 말이 안 통하는 상대라고는 생각했는데, 그런 미친 소리까지 할 줄이야.
한편, 리체는 두 눈을 감은 채 귀를 세우고 있었다. 처음부터 둘의 대화를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깨었다고 말하기가 애매한 상황이었다.
리체가 잠에서 깬 건 데온이 리체를 두고 블레이크에게 이상하다고 말했을 때였다.
대화 주제가 자신이라는 것에 당황해 그만 자는 척을 시작했다가, 일어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럼블라 교수님이 나를?’
그 정도로 자신을 위험하게 보고 있었다니.
얼마 전에 일어난 훈련장 마법 사고는 변명할 여지가 없는 일이긴 했지만.
하지만 놀랄만한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어진 블레이크의 말에, 리체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황립 아카데미 측에서 게르웨르 공작에게 리체를 보인다고 하더구나. 게르웨르 가문의 능력 때문에.”
게르웨르 공작 앞에 서야 한다고? 그 금안에 저를 보여야 한다니.
여태껏 피해왔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카데미를 그만둬야 하나. 하지만 이안은? 파이톤스는?
‘싫어.’
이내 ‘싫어’라는 하나의 단어만이 리체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게르웨르 공작이 제 존재를 알 것이다. 저를 잡고, 가두고, 정화를 강요할 것이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정화해라!”
“나의 아그네스.”
“넌 영원히 내 것이다.”
…….
“있잖아, 르티옴. 넌 어떨 거 같아?”
“네 마지막도 똑같을 거 같아?”
리체의 귓가에 게르웨르 공작의 목소리와 히켄카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맴돌았다.
“이안드웨인은 그래서 부르려고 하신 거예요? 그 능력 때문에?”
블레이크는 데온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한 곳을 응시했다. 데온도 시선을 그쪽으로 옮겼다. 두 사람은 대화를 멈추고 리체를 바라봤다.
여전히 잠자는 듯 엎드려 있었지만, 호흡이 달라졌다.
‘들었나 보군.’
블레이크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리체가 듣기에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사실 리체가 이번 논란을 모르길 바랐다. 이안드웨인과 교수들만을 데리고 사건을 끝낼 생각이었다.
이안드웨인에게는 연기를 부탁하려고 했다.
이안이 멀리서 리체를 혜안으로 보는 척하고, 교수들에게 리체가 위험하지 않다는 걸 증언하도록.
블레이크가 필요한 건 럼블라 이즈마틱이 제 의견을 주장하지 못하게 할 명분이었으니.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꾸나.”
“네.”
블레이크는 잠든 척하는 리체를 모르는 척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리체의 방 침대에 리체를 뉘었다.
“염려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마. 리체.”
* * *
‘히켄카.’
블레이크가 나가고 얼마 뒤, 리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곧 히켄카가 파이톤스를 다시 만나게 해준다고 한 날이었다.
오늘쯤 나타날지도 몰라.
‘히켄카하고 이야기를 해봐야 해.’
리체는 필립의 방을 찾아갔다.
하지만 아카데미처럼 쭉 필립과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같은 방을 쓰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리체 아가씨가 절 보러 오셨나?”
문을 연 제드는 리체를 발견하고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매사 설렁설렁해 보여도 제드는 눈치가 빨랐다. 일도 잘했고.
그러니까 셋이서 있다가 히켄카가 눈치 없게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제드가 이상한 걸 알아챌 것이고.
‘아빠한테 말할지도.’
리체는 제드를 올려다보며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제드, 필립이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
“이런. 한밤중에 필립이랑만요?”
“저랑요?”
제 이름이 들리자 필립이 안쪽에서 문으로 걸어왔다.
양쪽 눈이 모두 갈색이었다.
“필립, 기분이 이상하거나…….”
“멀쩡해요.”
“그렇구나.”
“무슨 일 있으세요?”
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제드와 필립이 문틀에 비좁게 서서 그런 리체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글렀다. 이래도 저래도 둘 중 한 명에게 의심을 사는 미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이만 가볼게. 잘 자. 두 사람.”
“어? 저한테 볼일 있으신 거 아니었어요?”
“필립, 내가 누누이 말했지. 아가씨 기사 노릇 제대로 안 하면 수행원은 안나가-.”
“악. 제드 씨. 그런 소리 하시지 말라니깐요.”
제드와 필립이 방까지 데려다준다는 걸 거절하고, 리체는 복도를 걸었다.
이대로 히켄카가 절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히켄카는 황도 저택에 있는 제 방을 모를 텐데.
그런 걱정을 하며 걸어가던 그때였다.
[르티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