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43)화 (43/89)

43화 제발 나 좀 살려주게

머릿속에 소리가 들리는 익숙한 감각.

파이톤스다.

‘파이톤스?!’

리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복도는 리체 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실망스러움이 감돌던 그때, 다시 파이톤스가 리체를 불렀다.

[여기!]

‘어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라고!”

답답함에 터져 나온 육성이 창가에서 들려왔다.

드디어 소리의 근원지를 찾은 리체의 얼굴에 놀라움이 자리 잡았다.

“……파이톤스?”

타오를 듯한 붉은색의 장발, 강렬한 주황색의 눈.

떡 벌어진 어깨, 근육들이 조화롭게 자리 잡은 상체, 광택이 흐르는 피부.

온몸에서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듯한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다만,

“오랜만이다? 계약자.”

그가 리체의 손바닥보다도 작긴 했지만.

* * *

별들은 한때 신이었다.

그 힘이 강하든, 약하든. 적게는 수백 년부터 많게는 수억 년의 시간을 행성과 함께 존재했다.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영원한 것은 없었다.

생명이 탄생하고, 죽고, 문명이 생기고, 다시 무너지고.

신들 또한 존재하고, 추앙받고, 잊혔다. 

잊힌 신은 별이 되었고, 그들은 인간계에서 더는 존재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별들은 무덤이라 불리는, 자신들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세계를 찾아 그곳으로 들어갔다.

“전투의 신. 옛날이야기지.”

리체의 방.

쿠션 위에 파이톤스는 옆으로 누워 발목을 까딱였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파이톤스의 원래 외형과 가까운 모습이라 했다. 겉모습이 낯설어 낯을 가렸지만, 가벼운 말투나 행동이 리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파이톤스다.’

리체는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헤실거리는 제 계약자의 모습에, 파이톤스는 뿌듯함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나야.

이게 다 내가 대단하기 때문이라니까. 아무렴.

“그러면 그 유리병에서 완전히 나온 거야? 다람쥐 몸은?”

“그게, 좀 애매해.”

파이톤스는 몸을 일으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팔짱을 꼈다.

“내가 아직 사념체거든. 그러니까, 지금 네가 보고 있는 내 모습은 허상이라고 해야 하나. 인지 조작으로 내 외형을 이렇게 보이도록 한 거지. 아직 몸을 되찾은 건 아니야. 아, 유리병에서는 완전히 나왔고.”

“히켄…… 걔는 어떻게 됐어?”

리체는 이름을 부르려다가, 그러면 제 위치를 히켄카가 알게 된다는 걸 떠올리고 얼버무렸다.

“노랑이라 불러. 그 자식은 그런 호칭이면 충분하지.”

노란 눈깔이란 별명이 더 잘 어울릴 거 같지만, 제 자식 같은 계약자에게 그런 험한 말을 입에 담게 할 수 있나.

“개가 어떻게 됐는지 알려줄까?”

파이톤스는 속 시원하다는 얼굴로 제가 나오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한 달 전, 이안이 물에 빠진 날.

유리병 밖으로 나왔던 파이톤스는, 자신의 인지 조작 능력으로 히켄카를 속였다.

히켄카가 자신을 다시 병 안에 가둔 것처럼 여기게 한 뒤, 필립의 몸속에 잠들어 있던 것이었다.

“필립한테 빙의한 거야?”

“아니, 그냥 병 속에서 장소만 옮겨진 느낌? 원래라면 안 돼. 사념체라 가능했지.”

운도 좋았다. 그 당시에 히켄카가 눈을 사용했다면 파이톤스의 인지 조작을 간파했었을 테니.

히켄카는 이상하게 그날따라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 기사 몸에 있다가, 노랑이 자식이 빙의하는 틈을 노렸지. 그 자식, 지금은 나한테 그동안 모은 힘을 다 뺏겨서 잠들어 있다고.”

덕분에 파이톤스는 지금 힘이 넘치는 상태였다. 본래의 모습을 작게나마 구현할 수 있을 정도로.

“그동안 잘 지냈어? 계약자?”

“응……!”

파이톤스가 안부를 묻자, 리체가 벅찬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쪼그만 게 그새 컸다며, 파이톤스는 리체에게 낄낄거리다, 그간 있었던 일이나 털어놓으라 말했다.

“아, 히……노랑이가 널 꺼내주는 조건으로 부탁을 들어달라고 해서…….”

리체는 파이톤스가 히켄카에게 먹힌, 감옥에서 있었던 일을 시작으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자신이 겪었던 일을 쭉 설명했다.

필립이 호위 기사가 된 것, 이안드웨인을 살린 것, 블레이크의 옴을 정화한 것,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

그러다 몇 시간 전, 블레이크와 데온의 대화에서 들었던 럼블라 교수의 일까지 설명하게 되었다.

“하.”

파이톤스는 기가 찬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가진 걸 조절 못 한다고 마법을 금지하겠다고? 감히, 인간이? 내 계약자한테?”

“조절 못 하는 건 맞는데…….”

리체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훈련장 사건 이후로 마석을 빌려 아주 간단한 마법을 몇 번 시도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아카데미에 하룻밤 사이에 자란 의문의 거대 고목이나. 눈이 부실 정도로 청소돼 번쩍이는 복도. 인공호수에 갑자기 생긴 분수. 등등.

최근 아카데미에서 일어나는 의문의 사건들은 리체의 실패한 마법 결과물이었다.

“그랬겠지.”

파이톤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법 같은 걸 배울 줄 알았으면 미리 알려줬어야 하는 건데. 

제 불찰이다.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애를.

리체가 왜 그랬는지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계약자. 너, 인간들의 주문을 사용했지? 그 따분하게 긴 거.”

“마법 주문? 응.”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을 영창 해야 마법을 사용하니까.

파이톤스는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쯧쯧 찼다.

“코딱지만 한 능력으로 별의 힘을 쥐어 짜내겠다고 발악해 만든 걸 네가 사용하면 어떻게 해?”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파이톤스는 심드렁하게 말을 내뱉었다.

제 계약자에게 놀란 적이 몇 번인가. 이제는 이 말을 하는 것도 지겨웠다.

“네가 괴물이라는 소리지.”

* * *

“이안드웨인. 절 따라오세요.”

수업이 끝났다. 이안은 먼저 강의실 밖으로 나간 럼블라 교수를 따라 나가려 몸을 일으켰다.

같은 반인 지크베르트가 이안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지크베르트.”

“같이 가.”

같이 가자니. 기숙사를 말하는 건가?

이안은 학생들이 나가고 있는 강의실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학생들이 나갈 때마다 흠칫거리는 걸 보니, 복도에 럼블라 교수가 서 있는 모양이었다.

“미안. 나 럼블라 교수님께서 따라오라고 하셔서.”

“응.”

지크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붉은 털의 작은 멧밭쥐로 변해 이안의 상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지크베르트?”

그 사이, 럼블라가 이안과 지크베르트만 남은 강의실로 들어와 다시금 재촉했다.

“이안드웨인 학생.”

“네. 갈게요.”

이안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주머니 속의 지크베르트가 신경 쓰였지만 뭘 하는 건지 물어볼 틈이 없었다.

살짝 손끝으로 주머니를 건드려봐도 지크베르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대로 쭉 있을 생각인가 보네.

어쩔 수 없이 이안은 그대로 럼블라의 뒤를 따랐다.

총장실

걸음을 멈춘 문에 달린 명패를 보고 있자니, 안에서 문이 열렸다.

6명 되는 인원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아, 리체다.’

이안의 눈이 제일 먼저 리체를 찾았다. 반갑게 손을 살짝 흔드는 그 모습에, 이안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소파에 앉은 리체의 옆에는 블레이크가 있었고, 총장, 마법과 교수 세 명이 그 주위를 채웠다.

“오오, 이안드웨인 군이 왔군요.”

총장이 반갑게 이안을 맞이했다.

이안은 그런 총장에게 인사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블레이크와 시선을 교환했다.

럼블라 교수가 왜 자신을 총장실에 데려왔는지는, 이미 블레이크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어지는 상황도 블레이크가 말해준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리체한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좋아.’

잠시 뒤.

블레이크가 준 마법 약을 미리 먹어둔 이안의 눈이 때맞춰 금빛으로 변했다.

이안은 교수들 앞에서 능력을 사용하는 척, 리체를 본 후에 연습했던 말을 꺼냈다. 

“트아리체는 위험하지 않아요.”

자연스러운 그 말에,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 속에 있던 교수들이 안도했다.

“그러니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쓸데없는 염려라고.”

“내 말이! 천재가 어렸을 때 사고도 일으키고 그러는 거지. 어떻게 착하게, 바르게만 사냔 말이야.”

“트아리체 양은 로크샤 제국의 등불이 될 걸세! 우리 아카데미의 자랑이야!”

“이안드웨인 군, 고생했어요. 이것 참, 공작 각하를 괜한 걸음 하시게 만들었군요. 죄송합니다. 각하.”

총장은 진땀을 흘리며 블레이크에게 말을 걸었다.

블레이크가 총장실에 있는 건 두 번째였지만, 여전히 무서웠다. 

그나마 트아리체란 목숨줄이 있기에 교수들이나 저나 로드윅 공작 앞에서 이렇게 말도 하는 것이었다. 

설마하니 딸 앞에서 능력을 사용하시지는 않겠지.

“괜찮네.”

블레이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총장은 블레이크를 의식하며, 평소 지었을 표정보다 엄한 얼굴을 하고 럼블라에게 말했다. 

“럼블라 교수, 이제 트아리체 학생의 마법에 관해 더는 말하지 않는 거예요.”

하지만 꼿꼿한 자세로 서 있는 럼블라의 보라색 눈은 총장을 향하지 않았다.

그녀는 리체와 마주 보며 웃고 있는 이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안드웨인 학생.”

“네?”

“정말 능력을 사용했습니까?”

그녀의 물음에 순간 총장실이 조용했다.

숨 막히는 분위기를 감지한 총장이 허허 웃으며 럼블라에게 다가갔다.

“교수, 지금 각하께서도 와 계시는 자리이네. 이안드웨인 군이 거짓으로 그랬을까. 그런 의심은-.”

“게르웨르 공작 가문의 능력자의 특징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금색 눈동자입니다.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능력을 사용할 때 눈동자는 은은하게 타오르는 것처럼 발광하지요. 하지만 이안드웨인의 눈은 한 번도 빛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교수들이 이안을 보고, 리체를 보고, 블레이크의 눈치를 봤다.

아아. 또 시작이다.

‘제발 나 좀 살려주게, 럼블라……!’

총장은 울고 싶었다. 진짜 이 외골수.

이안드웨인이 능력을 사용하면 어떻고, 안 사용하면 어떤가. 트아리에 로드윅이 황립 아카데미를 빛낼 천재고 그 아버지가 블레이크 로드윅인데.

‘로드윅은 암살자 가문이라고……!’

블레이크가 가업은 자신의 대에서 끝내겠다고 말했지만.

아직은 블레이크의 시대였다. 그 말은 즉.

‘나 죽네!’

포근한 침대에 누워 잠든 채 다음 날, 다다음 날, 다다다음 날, ……. 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도 기약 없이 눈을 뜨지 못하는 제 모습이 총장의 머릿속에 흘러갔다.

그 와중에도 럼블라는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딱딱한 태도로 이안과 대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럼블라 교수님. 같은 능력자라고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건 아니에요. 아버지께서는 능력을 사용하실 때 말씀하신 것처럼 눈이 빛나지만, 저는 아닌 것처럼요.”

“그러면 내게 능력을 사용해보세요. 겪어보고 판단하겠습니다.”

이안은 태연히 대답했으나, 럼블라 교수에게 통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점차 굳어져 갔다. 교수들까지 엉거주춤 일어나 그녀를 말릴 정도였으니. 블레이크가 나서려던 차,

“저, 럼블라 교수님.”

지금껏 가만히 있던 리체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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