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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44)화 (44/89)

44화 화해했어?

블레이크가 리체를 바라봤다. 

리체가 나설 줄은 몰랐지만, 하고자 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블레이크는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리체는 럼블라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께서 걱정하시는 원인이 제가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거죠?”

“……맞습니다.”

“그러면 교수님께서 절 직접 판단해보세요. 이안드웨인 선배의 능력 말고요.”

뭘 하려는 거지?

모두의 시선 속에, 리체는 메고 온 가방에서 가져온 것을 탁자 위에 꺼냈다.

“이건…….”

비커와 돌멩이와 마석.

마법 실습 첫날의 실습 도구들이었다.

“제가 그동안 연습했거든요.”

“트아리체 학생!”

리체가 마석과 돌멩이를 양손에 하나씩 들어 올리자, 럼블라 교수가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말릴 새도 없이 리체가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비커로 쏟아지는 물.

그걸 목격한 럼블라와 마법과 교수들이 속으로 기함했다.

놀랄 일은 트아리체 로드윅이 능숙하게 마법을 부린 게 아니었다.

‘1초?’

영창 시간이 고작 1초라니.

원체 긴 탓에 제일 짧은 주문을 아무리 빠르게 말해도, 7초는 걸리는 게 마법 주문이었다.

‘무슨!’

‘저렇게 짧은 주문이라니!’

탐구열에 휩싸인 마법과 교수들의 눈빛이 리체에게 향했다.

방금 일어난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어 당장이라도 몰려갈 듯했다. 리체는 슬며시 소파에 있는 쿠션을 손에 쥐었다.

“로, 로벤하프 학생을 불러야 합니다! 지금 당장!”

그때, 훈련장에서 리체의 마법을 바로 앞에서 목격했던 럼블라 교수가 소리쳤다.

트아리체의 마법에는 제 역술식이 통하지 않는다. 

지난번에도 물이 차오르던 비커는, 잠잠해진 것처럼 보였다가 폭발하듯 물이 역류해 쏟아져나왔다.

총장이 비커와 럼블라 교수를 번갈아 보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지난번처럼요?”

“물이……!”

“물이?”

“…….”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 않습니까.”

럼블라의 우려와 달리, 비커를 가득 채운 물은 시간이 지나도 표면의 장력을 유지한 채 흘러넘치지 않았다.

이때다. 총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럼블라에게 말했다.

“럼블라 교수, 제가 쓴소리는 하고 싶지 않은데 이번에는 해야겠네요. 교수는 학생을 믿어야 해요. 어떻게 가르치는 제자가 미래에 사고를 칠 거 같아 걱정된다는 소리를 합니까?”

할 말이 없었다. 럼블라는 반박하지 못하고 진 것을 인정했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리체는 웃으며 블레이크에게 고개를 올렸다.

“아빠, 저 이제 마법 계속 써도 되나 봐요.”

“그래.”

블레이크가 칭찬하듯 리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빠, 죄송해요. 어젯밤에 오빠랑 하시는 얘기 엿들었어요…….”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전.

갑자기 절 찾아와 지난 얘기를 꺼낸 리체는, 자신도 이안과 하려는 일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그저 불편한 마음에 함께 하고 싶다는 줄 알았는데.

‘이런 걸 준비하고 있었나.’

그것도 위험하지 않은 방법으로.

블레이크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번졌다.

그 사이, 리체와 이안이 속닥거리며 대화했다.

“잘 됐다.”

“응. 이안이 분위기를 잘 잡아줘서 그래. 이안 덕분이야.”

“나는 별것 안 했는데.”

이안의 연기 없이, 처음부터 마법이 성공하는 걸 보여줬으면 지금처럼 일이 풀리지 않았을 터였다.

럼블라 교수가 마법이 성공하는 것과 미래는 다른 일이라며 반박했을 수 있었으니까.

“이안이 교수님하고 맞서줬잖아. 럼블라 교수님 무서운데.”

리체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럼블라 교수와 대립하는 것쯤은 리체를 도울 수 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리체가 원하는 대로 돼서 다행이다. 이안은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리체 덕분이야.”

[내 덕분이지. 고마워하라고. 계약자.]

가방 속에서 상황을 지켜본 파이톤스가 리체에게 말을 걸었다.

하긴. 파이톤스가 기존의 마법 주문에서 리체에게 불필요한 수식을 제거해주지 않았더라면 이번에도 과도한 효과로 물난리가 날 뻔했다.

‘고마워. 파이톤스.’

그때였다.

이안의 주머니에서 멧밭쥐 한 마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찍.”

그 소리에 리체는 시선을 내려 멧밭쥐를 바라봤다.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검은 눈. 그리고 익숙한 주황색의 붉은 털.

“지크?”

멧밭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베르트였다.

……왜 이안의 주머니에서 지크베르트가 나오지?

그제야 지크베르트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이안이 리체에게 설명하려 했다.

“아, 아까 강의실에서-.”

“리체.”

주둥이에서 울음소리 대신 나온 익숙한 지크베트의 목소리가 리체를 불렀다.

“도망쳐.”

“응?”

쿠우우웅.

총장실 전체가 강한 진동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와.’

지겹다.

로벤하프는 따분함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했다.

점심 식사 후에 듣는 수업이 고대어 문법이라니. 

이건 귀족의 체면을 시험하려는 누군가의 농간으로 짜인 시간표가 분명했다.

‘그 농간에 질 수는 없지.’

자신이 누군가. 그 긍지 높은 히베츠만 공작 가문의 가주 후계자다.

밀려오는 졸음 따위에 꾸벅꾸벅 졸아 품위를 잃을 수는 없었다.

로벤하프는 눈에 힘을 주며 정면을 응시했다.

‘교수님 얼굴을 리체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 흰머리는 리체의 반짝이는 은발이고. 

저 얼굴은 리체의…….

무리다. 전혀 이입이 안 돼.

로벤하프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래도 리체 생각을 했더니 잠이 달아나는 것 같았다.

‘데르케디온은 안 졸리나?’

로벤하프는 옆자리에 앉은 데온을 힐끔 바라봤다.

인상을 쓰고 팔짱을 끼고 있긴 했어도 시선은 똑바로 칠판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데르케디온이 조는 건 한 번도 못 봤네.

“뭘 봐.”

데온이 시선을 느끼고 로벤하프에게 물었다.

로벤하프는 씩 웃으며 종이에 펜을 움직였다.

- 리체랑은 화해했어?

로벤하프의 메모를 본 데온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아직인가 보다.

‘5일 정도 됐나? 데르케디온도 힘들겠네. 나는 재밌지만.’

지난 월요일, 동아리방.

주말에 저택에 다녀왔다는 데온과 리체 사이가 평소랑 달랐다. 

데온이 리체의 손에 묻은 크림을 닦아주려는데, 리체가 손을 테이블 아래로 슬그머니 내렸다. 마치 데온이랑 닿는 걸 피하는 것처럼.

로벤하프는 제가 목격한 것을 믿을 수 없었지만, 이내 제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오빠. 다음부터는 그냥 말로 해 줘. 만지면 안 되니까…….”

“…….”

그때의 데르케디온의 표정이란.

로벤하프는 그렇게 멍청한 얼굴의 데온을 처음 봤다.

너무 놀라 리체에게 따로 물어보았더니,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 했다.

“일주일 정도만.” 

“일주일? 이유가 있어?” 

“그래야 나중에 내 손을 안 피할 테니까.”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리체의 손을 피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는 건 잘 알겠다.

로벤하프는 다짐했다.

평생 리체의 손을 피하지 말자고.

지금 데르케디온한테 하는 것처럼 리체가 절 피한다면, 얼음에 들어가 일주일 동안 잠들어 있는 편이 나을 터였다.

“이틀만 더 참아라. 데르케디온.”

갑자기 데온이 짠해진 로벤하프는 데온의 등을 토닥이며 격려했다.

뭐 하는 짓이야.

데온이 로벤하프를 노려보던 그때였다. 데온을 안쓰럽게 여기던 푸른 눈이 점점 믿을 수 없는 것을 목격하는 것처럼 크게 뜨였다.

평소와 같은 장난인 듯싶어 데온이 로벤하프를 무시하려던 찰나,

“꺄악!”

“으, 으아악!”

창가에 앉은 학생들을 시작으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교실을 채웠다.

비명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데온도 학생들이 본 것을 확인했다.

창틀에 올려진 거대한 새의 다리.

“데르케디온.”

“어.”

로벤하프의 말에 데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마물이다!”

“도망쳐!”

마물.

그것도.

“열 마리는 돼 보이는데.”

멀리서도 보이는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조류형 마물들이 아카데미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기겁하며 강의실 밖으로 뛰어나가는 학생들 사이에서, 데온과 로벤하프가 태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아가씨, 여기 계세요. 위험합니다.”

셀린느는 자신의 호위기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금 황립 아카데미의 대피소 안에 있었다.

아카데미를 덮친 마물들의 공격에 학생들과 교수들, 그 외 다른 이들이 대피한 장소였다.

“이즈라는요? 찾았나요?”

“바깥에 계시는 듯합니다. 마법과 학생분들이 수업받는 건물이 멀리 있는지라…….”

셀린느는 아직 도착하지 못한 동생을 걱정하며 닫힌 문을 바라봤다.

동생과 같은 반인 그 아이도 함께 있을까.

‘트아리체 로드윅…….’

이안드웨인의 목격담을 말한 뒤, 셀린느는 신경이 쓰여 리체의 주변을 맴돌았다.

자신이 괜한 말을 해서 끌어들인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번번이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멸망할 거야.”

셀린느의 주변에 앉은 학생이 중얼거렸다.

마물을 코앞에서 보고 겨우 도망친지라, 패닉이 심하게 온 듯했다.

하긴, 그런 말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로크샤 제국에 마물이 나타나는 지역은 세 곳으로 한정돼 있었다.

로드윅 영지와 세르디야 영지 사이에 있는 마물의 숲.

판 대륙과 로크샤 제국 국경에 있는 광활한 롬 사막.

제국 서쪽에 있는 거대한 지하 동굴.

하지만 황립 아카데미는 셋 중 그 어느 지역과도 가까이 있지 않았다.

설립 계획 단계부터 마물, 전쟁 등에 안전한지를 고심해 위치를 선정했으니.

실제로 설립 이후, 황립 아카데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대규모의 습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마물이 왜 여기까지 온 거지?”

“몰라. 분명 아카데미는 마물한테 안전하다고 들었는데.”

학생들은 마물의 등장 원인에 관해 의견을 나눴으나, 마땅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모두가 불안함에 떨던 그때, 누군가 소리내어 외쳤다.

“그, 그래도! 우리 학교에는 능력자들이 있잖아!”

능력자들.

그 소리에 학생들의 얼굴에 약간의 안도가 돌았다.

특히 3학년에는 데르케디온 로드윅과 로벤하프 히베츠만이 있었다.

둘 다 전투에 특화된 능력이었다.

게다가 2학년에는 지크베르트 세르디야와 이안드웨인 게르웨르도 있으니.

네 공작 가문의 능력자가 아카데미 안에 있다. 같은 편이라 생각하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게르웨르는 비전투 능력…… 아얏.”

학생들 사이로 조금씩 희망이 퍼져갔다. 학생 한 명이 중얼거리다 옆의 학생에게 눈치 좀 챙기라며 옆구리를 찔렸다.

* * *

쩌어어억.

“조류형 마물이 끝이 아니네?”

로벤하프는 제게로 달려오는 짐승형 마물 한 마리를 얼리고 데온에게 말을 걸었다.

“공중형 마물 말고도 지상형, 지하에도 있는 거 같지?”

“응.”

대답하는 데온의 앞에도 숨이 끊기기 직전인 조류형 마물이 날개를 퍼덕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피난한 아카데미 동쪽.

데온과 로벤하프는 그곳에서 마물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로벤하프의 능력에 주변은 얼음으로 가득 찼다.

대부분의 마물이 두 사람의 능력 앞에 금방 쓰러졌지만, 문제는.

“와, 너무하네.”

얼음을 깨고 나오는 마물과,

“……쳇.”

숨을 쉬지 않아도 움직이는 마물이 있다는 것.

두 사람은 다시금 달려드는 마물들을 마주하며 전투 태세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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