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46)화 (46/89)

46화 그냥 태울까?

히베츠만 공작의 상태는 위중했으나, 정화한다면 괜찮아질 수 있었다.

파이톤스가 돌아왔으니 블레이크 때처럼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리체는 히베츠만 공작이 이번 전투에서 얻은 옴만을 정화하려 했다.

다만.

“오, 오빠?”

히베츠만 공작이 있는 침실로 들어가려던 리체는, 제 어깨를 붙잡은 데온의 손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안 거지?’

자신의 존재를 돌멩이 정도로 낮춰주는 인지 조작 능력을 사용했다.

거실 소파에서 일어나 이렇게 문고리를 잡을 때까지만 해도 모두 자신을 투명 인간처럼 대했으니, 분명 능력은 발동이 되고 있는데. 

[쟤도 인간적인 범주는 아니야.]

파이톤스가 중얼거렸다.

“나랑 얘기 좀 해.”

데온은 리체의 손을 잡아 귀빈실 숙소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는 복도를 지나, 인적이 없는 곳까지 걸어왔다.

멈춰 섰지만, 데온은 리체의 손을 놓지 않았다. 마치 리체와 떨어지기를 불안해하는 사람처럼.

“……그건 마법이야?”

“마법?”

“지금 너, 사라질 듯이 옅어져 보이는 거.”

티 나지 않았지만, 데온의 심장은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조금 전. 침실 문을 보는 리체를 주시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리체가 사라졌다. 마치 자신의 의식 속에서 리체란 존재가 증발해버린 것처럼. 

얼마나 놀랐던가.

데온은 급히 모든 감각을 날카롭게 세웠다. 익숙한 호흡을 느끼자, 주위 풍경에 녹아들듯 흐릿해진 리체의 형태가 보였다. 

그런 뒤, 히베츠만 공작이 누운 방으로 향하는 형태를 따라와 리체의 어깨를 잡은 것이었다.

‘내 모습이 제대로 안 보이는구나.’

데온이 평소처럼 대해서 능력이 통하지 않는 줄 알았다.

리체는 인지 조작을 풀고 데온에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네 호흡으로.”

다시는 내 앞에서 그거 하지 마.

데온이 툴툴거렸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데온과 달리, 리체는 곤란했다.

‘큰일이네.’

데온에게 들키다니.

몇 시간 후면 히베츠만 공작가의 황도 저택에서 마차를 보내올 터였다.

“마지막은 집에서 보내게 해드려야지.”

힘없이 말한 로벤하프의 말처럼, 히베츠만 공작의 임종을 준비하기 위해.

그렇게 아카데미를 떠나면 히베츠만 공작을 만날 수 없게 된다. 살아서는.

“오빠, 솔직히 말할게.”

긴장한 손바닥에 땀이 찼다. 파이톤스가 드디어 르티옴인 걸 밝히고 부귀영화를 손에 쥘 생각이 들었냐며 머릿속에 대고 히죽거렸다.

데온은 어디 말해보라는 듯이 리체를 바라봤다.

“나, 히베츠만 공작님 병세 약화하는 법 알아.”

말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제 데온이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아냐고 묻겠지. 이미 그럴듯한 변명도 생각해 놨다.

개인 도서관에서 전전대 가주님의 수집품을 발견했다. 그게 병을 약화하는 효과가 있더라.

어느 정도 먹힐 만한 변명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전전대 로드윅 가주는 40세 넘게 살다가 사망했으니.

‘변명거리는 있어.’

리체는 주머니 속 별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데온의 뾰로통한 얼굴을 바라봤다.

연기는 젬병이지만 자연스럽게 말해야 한다. 데온의 의심하지 못하도록. 

“그게, 왜냐면-.”

“알아.”

“도서관……. 안다고?”

리체는 놀라 데온을 바라봤다. 안다니, 무엇을. 설마 제 정체일까.

“안다고? 뭘……?”

순식간에 등줄기가 서늘했다.

제발. 몰랐으면 해.

게르웨르 공작이 알게 되는 것과 별개로. 데온이 알지 않았으면 했다. 블레이크 또한.

자신이 르티옴이라는 걸 알면, 두 사람은 절 여전히 가족으로 받아 들여줄까.

어쩌면 기만이라 여길지 모른다. 지금 데온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절 향한 비난의 말일지 모른다.

데온은 흔들리는 리체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네가 고집쟁이라는 거.”

“……응?”

“잔소리쟁이에 내 말은 더럽게 안 듣지.”

데온은 리체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이번에는 나도 양보 못 해.

* * *

“……오빠.”

히베츠만 공작이 머무는 귀빈실의 거실.

리체는 소파 옆자리에 앉은 데온을 불렀다.

“이거 뭐 하는 거야……?”

리체가 들어 올린 손목에는 끈이 묶여 있었다. 반대쪽 끝은 데온의 손목에 묶여 있었고.

리체는 황당한 얼굴로 끈을 흔들었다.

“뭐.”

데온은 그런 리체를 힐끔 보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리체의 오른편에 앉은 이안에게 말을 걸었다.

“게르웨르.”

데온이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귀했다. 이안은 두 사람의 모습을 웃으며 구경하다, 곧바로 데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이안의 손에 무언가 날아왔다.

리체와 데온의 손목을 묶은 것과 같은 끈이었다.

……데자뷔인가?

지난날을 회상하는 이안의 귓가에 데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묶어.”

“네?”

묶으라니. 데온이 한 것처럼 리체의 손목을 묶으라는 건가?

할 수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오려는데, 손을 뻗은 데온이 순식간에 리체의 다른 쪽 손목과 이안의 손목을 각각 끈으로 칭칭 묶어 버렸다.

황실 기사단장도 탄복할 만한 빠르기다. 

이안은 매듭을 바라보다, 리체에게 넌지시 물었다. 

“리체, 이거 풀까?”

“괜찮아.”

풀어도 데온이 도끼눈을 하고 다시 묶어 버릴 텐데.

이럴 때는 데온의 고집을 꺾을 다른 방법을 찾는 편이 나았다. 

리체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폭 기댔다.

[꽁꽁 묶였네. 뭘 하든 빠져나오기 쉽지 않겠는데?]

파이톤스가 낄낄거렸다. 맞는 소리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파이톤스의 인지 조작으로 주변을 속이고 자유의 몸이 되겠지만. 상대는 무려 데온이었다. 감이 동물과도 같으니, 만만히 생각할 상대가 아니었다. 

‘데온이 왜 이러는 걸까?’

[네가 저 공작을 정화할까 봐 그런 거 아니야?]

‘아니야. 내가 르티옴인 걸 알았으면 아까 말했겠지.’

파이톤스에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신경이 쓰였다. 

리체는 힐끔 데온을 바라봤다.

“왜.”

“불편해.”

“참아.”

모르겠다. 데온의 행동은 평상시에도 종잡을 수 없었으니까.

리체는 한숨을 작게 푹 쉬었다. 눈이 마주친 이안이 다시 풀어 주냐 물었고, 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아빠한테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어. 데온과 노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이미 지나가던 블레이크를 향해 구조 요청을 해본 뒤였다.

끈을 풀어 주려는 블레이크에게, 데온이 “리체가 히베츠만 공작님 침실에 들어가려고 했어요.”라고 말하자.

“오빠랑 잘 놀고 있으렴.”

라면서 자리를 떴다.

필립은 블레이크의 명을 받아 결계 보수를 하는 교수들의 호위를 하러 갔고.

어떻게 빠져나갈까 고민하던 그때.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끝낸 로벤하프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근처를 걸었다. 리체가 로벤하프를 불렀다. 

“로벤하프 오빠!”

“아, 리체. ……뭐 하고 있는 거야?”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로벤하프의 미소는 어딘가 지쳐 보였다.

“손목에 리본 단 거야? 예쁘네.”

“…….”

누가 들어도 이상한 소리. 하지만 아무도 로벤하프에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안이 로벤하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 괜찮으세요?”

“응. 다들 미안. 맛있는 거 사준다는 건 미뤄야겠다. 며칠은 아버지 곁에 있어 드려야 하니까.”

정해진 끝을 생각하며 내뱉는 소리에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로벤하프는 애써 웃음 지었다.

“아, 나는 이만 가볼게. 저택에 통신하러 가야 해서. 이따 봐.”

“로벤하프 오빠. 힘내.”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고마워. 리체. 이안드웨인도.”

데온이 떠나려는 로벤하프의 팔을 붙잡았다.

“왜?”

“방법을…… 찾아볼게.”

방법을 찾는다니. 하지만 데르케디온도 별 뾰족한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렇기에 지금 제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게 아닌가.

로벤하프는 무뚝뚝한 친구의 위로에 기대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

“그래. 고맙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총장이 데온을 찾았다.

“데르케디온 군. 정말 미안하지만, 처치한 줄 알았던 마물 몇 마리가 깨어났어요. 실력 있는 교수님들은 낮에 마물들과 싸우다 부상을 당하셔서…….”

한 번에 여러 마리의 마물을 상대하는 데에는, 로드윅이나 히베츠만의 능력이 적합했다.

하지만 로벤하프나 히베츠만 공작의 상황도 그렇고, 심기가 불편한 로드윅 공작에게 부탁할 수도 없는 일이니.

부탁할 이는 데온밖에 없었다.

‘끈은 뭐지?’

총장은 데온과 리체, 리체와 이안의 손목을 이은 끈을 봤지만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놀이인가 싶어 별말 하지 않았다.

애들 놀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게 많다니까.

“……쯧.”

결국, 고민하던 데온은 혀를 차며 끈을 풀었다. 대신.

“세르디야.”

근처에 어슬렁거리던 지크베르트를 붙잡아 제 자리에 앉혔다.

별생각 없는 얼굴로 데온이 묶는 대로 손목을 내어주던 지크베르트였으나.

데온이 뭐라 속삭이자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다.’

리체는 그 모습을 보고 잘 됐다고 생각했다.

데온보다 지크베르트가 설득하기 쉬울 터였다. 무엇보다 지크는 자신이 르티옴인 걸 알고 있지 않은가.

히베츠만 공작을 정화하기 위해서라는 걸 알면 절 도와줄 터였다. 이안도 끈을 풀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라 했고.

데온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리체는 매듭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지크. 나 이것 좀 풀게!”

“안 돼.”

“어?”

“풀지 마.”

이게 아닌데.

저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은 단호한 태도는, 데온의 것이었다. 혹시 지크 모습을 한 데온인가? 

그럴 리 없지.

지크베르트가 자신이 하려는 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리체는 지크베르트에게 귓속말했다.

“지크, 나 히베츠만 공작님 정화하러 가야 해. 마차가 곧 온단 말이야.”

“정화하면 아프잖아. 그러니까 안 돼.”

“아, 우리 아빠 때? 그때는 피칸이 없어서 그랬어. 지금은 있으니까 괜찮아. 봐봐, 여기.”

리체가 주머니를 열자, 파이톤스가 쪼르르 밖으로 나왔다.

[그래! 내가 있으니까 괜찮다고!]

파이톤스가 당당히 외쳤다. 지크베르트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였지만.

하지만 지크베르트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데온은 뭐라 그랬길래 지크가 제 말을 하나도 안 믿어주지.

진짜 괜찮은데.

‘……마법을 써 볼까? 끈을 태우면 되지 않나.’

파이톤스가 주문을 바꿔준 마법 중에는 불을 만드는 기초적인 마법도 있었다.

불안한 건 아직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마법이라는 것.

‘아니야. 훈련장 때처럼 폭주하면 어떻게 해. 불난리는 더 끔찍해.’

인명피해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어쩌지, 하는 리체의 귓가에 이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체, 기숙사에 뭐 두고 온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

“……?”

내가?

고개를 돌려 바라본 이안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 * *

리체의 말에 꿈쩍 않던 지크베르트는, 의외로 이안의 말에는 넘어갔다.

“겨울옷을 가지러 간다고 했었잖아. 춥다고.”

“으, 응.” 

“…….” 

겨울옷을 찾으러 기숙사에 다녀오겠다고 하니, 순순히 그러라는 지크베르트의 대답이 나왔다.

지크베르트는 둘을 따라가려고 했으나, 그것 또한 이안이 핑곗거리를 만들며 막아주었다.

“데르케디온 선배가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으면 놀랄 거야. 지크베르트, 말 좀 전해줄 수 있어?”

이번에도 이안의 말이 통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지크베르트를 두고 복도로 나오게 되었다.

“자.”

복도로 나오자, 이안은 리체의 손목 매듭을 풀어 주었다.

리체는 자유를 얻은 손목을 만지며, 이안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안. 내가 뭘 할 줄 알고 풀어 주는 거야?”

그것도 거짓말까지 대신 해 주며.

이안은 궁금해하는 리체에게 답했다.

“몰라. 나는 리체가 그러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도와주는 것뿐이거든.”

“……나쁜 일이면 어쩌려고?”

“그래? 그렇지만 나쁜 일이어도 리체가 하려는 일이잖아?”

평생 나쁜 짓이랑은 관련 없을 것 같은 아름다운 외모로 저런 소리라니.

“이안은……. 사람 너무 막 믿으면 안 돼.”

리체가 우물쭈물 말하자, 이안이 살포시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