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우리 왜 도망친 거야?
아,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리체는 데온이 오기 전에 히베츠만 공작의 옴을 정화해야 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나 금방 다녀올게! 오빠 오기 전까지 들어가 있어야 하니까!”
“응. 천천히 와도 돼. 데르케디온 선배한테는 내가 말씀드릴게.”
“아니야! 우리 오빠 무섭단 말이야. 금방 올게.”
리체는 급히 복도를 달려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고는 방향을 틀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안의 옆을 다시 지나갔지만, 인지 조작을 발동했기에 리체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역시, 내 능력은 완벽하다니까. 이걸 간파한 데르케디온은 뭐 하는 애야?]
전사의 싹이 보인다며, 파이톤스는 군침을 삼켰다. 그 자식들의 잔해지만 이 정도라면 제 제자로 삼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는 사이, 리체는 히베프만 공작의 침실에 들어왔다.
생각에 잠긴 블레이크, 어두운 얼굴의 로벤하프. 의원과 병문안을 온 다른 몇 사람.
리체는 사람들을 지나쳐 침대 위에 누운 히베츠만 공작에게로 걸어갔다.
쌓인 기운은 온몸으로 퍼졌다. 얼굴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렇게까지 심한 건 그때 이후로 처음 봐.’
마치, 이전 생의 아그네스가 죽기 전에 봤던 그 능력자들 같았다.
‘……왜 그렇게 심했지? 지크가 20살, 데온과 로벤하프가 21살이었을 텐데.’
그렇게까지 기운이 퍼질 일이 있었던 걸까.
하나 당시 아그네스의 세상은 게르웨르 저택의 지하실이 고작이었기에, 그들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지 못했다.
‘기숙사로 돌아가면 게르웨르 공작이 했던 말을 정리해봐야겠어. 거기에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리체는 그런 생각을 하며 히베츠만 공작의 손을 잡고 정화를 사용했다. 기운이 점차 줄어들고, 보이기 시작한 공작의 얼굴에서 고통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파이톤스가 물었다.
[전부 정화할 거야?]
‘아니. 지난번 봤을 때만큼만.’
쌓인 기운을 깨끗이 정화하면 좋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블레이크나 데온을 정화한 전적이 있으니. 히베츠만 공작까지 모든 옴을 정화하면 그들은 공통점을 찾을 테고, 결국 그 교집합 속에는 자신이 있는 걸 알아차릴 거다.
……이미 데온은 수상히 여기는 것 같지만.
‘빨리 가자.’
그러니 이제 데온이 돌아오기 전에 들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얌전히 소파에 앉아 있어야 했다.
히베츠만 공작의 좋아진 안색을 확인한 리체는 서둘러 침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블레이크가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붉은 눈이 잠잠한 문을 잠시 주시하다 침대 위의 히베츠만 공작에게로 향했다.
한편, 침실을 나간 리체는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좋아……!’
성공했다는 벅찬 마음이 치솟았다. 이제 히베츠만 공작은 죽지 않을 것이다. 로벤하프도 슬퍼하지 않을 테고.
리체는 복도로 나가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때쯤 인지 조작을 풀었다.
기다리고 있을 이안을 찾아 걸어갔지만, 헤어진 장소에 이안은 없었다.
[얘는 어디 갔대?]
“글쎄…….”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 리체의 손을 낚아채 달리기 시작했다.
그 힘에 이끌려 리체도 얼떨결에 발을 움직였다.
반짝이는 금발. 이안이었다.
“이안? 왜 달리는 거야?”
놀란 리체가 묻자, 이안이 달리는 걸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도망쳐야 해.”
“도망? 왜?”
“아버지가 왔어.”
* * *
“…….”
마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잡은 뒤, 데온은 서둘러 리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자리가 널널한 거실 소파와, 거기에 앉은 지크베르트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 느낌이 싸했는데.
“리체는?”
“기숙사에. 필요한 게 있다고 가지러 갔어.”
세르디야. 리체 말이라면 지금 당장 하늘이 뒤집힌다고 해도 믿을 놈.
데온은 곧장 침실로 향했다.
“도, 도련님. 지금 거기에……!”
누군가의 수행원이 데온에게 다급히 말을 걸었다.
안에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한 모양새에, 데온은 망설임 없이 침실 문을 열었다.
예상한 상황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침대에 상반신을 일으켜 앉은 히베츠만 공작. 상태가 호전됐다.
리체는? 다급히 감각을 끌어올리는 데온에게, 블레이크의 노기 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자네가 왜 왔지?”
데온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향해 묻는 것이 아니었다.
“게르웨르 공작.”
침실의 한쪽에, 블레이크와 거리를 둔 채 마주 보며 서 있는 남자.
2년 만에 보는 게르웨르 공작은 이전보다 몸이 많이 야위었다.
살짝 패인 볼 위로 은은히 발광하는 금안이 블레이크를 바라봤다.
“맞았군.”
하필이면 리체가 있는 아카데미에서 마주치다니. 블레이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게르웨르 공작은 입꼬리를 올렸다.
“자네까지 정화됐어.”
정화? 그 소리에 히베츠만 공작과 로벤하프가 귀를 세웠다.
조금 전. 게르웨르 공작이 등장하자 블레이크는 사람들을 물렸다. 그렇기에 지금 침실 안에 있는 이들은 능력자들뿐이었다.
블레이크와 데온, 히베츠만 공작과 로벤하프, 게르웨르 공작.
“…….”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데온이, 미처 닫히지 않은 침실 문을 완전히 닫았다. 그러기 전에 데온의 뒤를 따라온 지크베르트가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능력자 여덟 중 여섯이 모인 자리.
게르웨르 공작이 입을 열었다.
“2년 전에 내가 본 자네 딸은 누구였지? 대역이었나?”
게르웨르 공작의 숨통이 서서히 조여졌다.
그 이상 리체에 관해 말하지 말라는 블레이크의 경고였다.
하지만 게르웨르 공작은 부족해지는 숨에도 가소롭다는 듯이 입매를 비틀었다.
“나를 죽일 건가? 어떤 명목으로?”
블레이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게르웨르 공작의 말은 이어졌다.
“공작일지라도 같은 공작을 살해하면 사형이지. 자네가 죽으면?”
게르웨르 공작 외에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실 안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했다.
“저 어린 것이 자네 딸을 독차지하나?”
게르웨르 공작의 손가락이 데온을 가리켰다.
불쾌하다. 마치 리체를 소유물처럼 대하는 말투.
데온이 입을 열려던 차.
“아니지. 자네 딸이 아니라,”
게르웨르 공작이 블레이크를 향해 실소를 머금었다. 다음 말이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 블레이크는 게르웨르 공작을 향해 능력을 최대치로 사용했다.
단숨에 숨이 끊어질 정도의 강한 능력의 발동.
하지만.
“르티옴이라고 해야지.”
게르웨르 공작은 멀쩡히 기어코 다음 말을 내뱉었다.
블레이크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게르웨르 공작을 바라봤다.
챙. 게르웨르 공작의 손가락에서 반지 하나가 깨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히베츠만 공작, 데온, 로벤하프는 숨마저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방금 게르웨르 공작이 무슨 말을.
‘리체가…….’
‘블레이크의 딸이…….’
르티옴?
게르웨르 공작의 말이니 거짓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짐작 가는 사건이 서로에게 한 가지씩은 있었다.
깨끗하게 사라진 데온의 옴.
30대 중반이 되었음에도 안색이 나빠지기는커녕 이전보다 건강해 보이는 로드윅 공작.
당장 죽을 것처럼 생사를 오가던 히베츠만 공작마저 증세가 안정되어 깨어났다.
그 모든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능력자들의 부작용을 정화하는 것.
“르티옴밖에 할 수 없는 일이지. 이 저주 같은 부작용을 정화할 수 있는 건.”
게르웨르 공작은 블레이크를 바라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히베츠만 공작과 로벤하프, 데온까지.
“게르웨르 공작은 안 돼.”
왜 그토록 딸을 게르웨르 공작에게 보이길 꺼렸는지. 이제야 알 듯했다.
“블레이크.”
히베츠만 공작이 그를 불렀다.
“로드윅은 르티옴을 데리고 있었나?”
“…….”
“자네 딸은 지금 어디에 있지?”
* * *
앞서 뛰어가는 이안의 뒷모습을 보며 리체는 생각에 잠겼다.
이안이 게르웨르 공작을 피하는 것은 이해가 갔다.
이안을 죽이려고 한 아버지이니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왜 혼자 도망가지 않고 자신을 끌고 가는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것도.
“리체, 저 건물에 숨자.”
자신을 본인 아버지로부터 숨겨야 하는 것처럼.
리체는 이안이 가리키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카데미 부지 내에 있는 예배당을 연상케 하는 작은 건물이었다. 방치된 건물인지 불이 들어오지 않아 사방이 어둑했다. 이안은 리체에게 물었다.
“춥지는 않아?”
“응. 이안은?”
“나도 괜찮아.”
둘은 벽에 붙은 단에 커다랗게 처진 휘장 뒤로 가서 숨었다. 가려진 공간이 널찍했기에, 둘이 숨을 장소로는 충분했다.
당장 뒤쫓아오는 게르웨르 공작을 피한 것이 아니라, 다급한 상황은 아니었다.
어둠 속, 바닥에 다리를 뻗고 이안과 나란히 앉아 있자니 파이톤스가 머릿속으로 말을 걸었다.
[이참에 빛 마법도 연습해 봐.]
파이톤스가 바꿔준 주문은 돌멩이를 물로 만드는 주문과 불, 빛을 만들어내는 주문이었다.
리체가 주문을 외자, 작은 빛 하나가 공중에 떠서 주위를 밝혔다.
이안이 신기하다며 리체를 칭찬했다. 리체는 고개를 돌려 그런 이안을 가만히 바라봤다.
예쁜 얼굴이다. 반짝이는 금빛 속눈썹 아래, 깨끗한 검은 눈동자. 리체를 향해 늘 다정한 빛을 띠는 이안의 눈.
“이안, 그런데 우리 왜 도망친 거야?”
물론 리체는 게르웨르 공작에게서 도망쳐야 했지만.
이안이 그 사정을 알 리 없었을 테니 물어보는 것이었다.
이안은 망설이다 붉은 입술을 조용히 움직였다.
“……아버지께서 널 보시면 안 되니까.”
차분한 음색이었지만 리체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차마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이안은 리체가 어떤 질문을 할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널 찾고 있어. 리체. 아버지는…….위험해.”
어렸을 적 봤던 게르웨르 공작의 광기 어린 모습.
제 아버지는 리체를 찾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절 죽이려고 하는 것처럼 집요하게.
이안은 게르웨르 공작이 로드윅 공작의 수양딸을 보겠노라고 로드윅 영지에 여러 번 갔던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제 아버지는 리체의 정체를 알아보면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아마, 리체가 죽을 때까지.
복도에서 사람들이 게르웨르 공작이 방문했다고 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이안의 머릿속에는 리체를 숨겨야겠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카데미에 왜 오셨는지, 언제까지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아버지와 만나면 안 돼.”
“……어, 언제부터 알았어?”
데온에게 들킨 줄 알았던 상황과는 달랐다. 이안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리체의 정체가 뭔지. 그리고 게르웨르 공작이 리체를 왜 노리는지.
더듬거리는 리체의 물음에 이안은 순순히 대답했다. 이제 자신이 알고 있는 걸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난 주말에 알았어.”
지난 주말.
데온의 증세 때문에 로드윅 저택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하지만, 어떻게? 이안. 너 목걸이 때문에 능력을…….”
리체는 이안의 목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뛰면서 셔츠 밖으로 나온 목걸이 두 개가 보였다.
“맞아. 내 능력으로 안 게 아니야. 누가 알려줬거든.”
“누가? 지크가?”
리체가 아는 한, 자신의 정체를 아는 이는 지크베르트뿐이었다.
이안과 지크는 친구 사이이니, 지크가 알려줬을지도 몰라.
하지만 리체의 추측은 빗나갔다.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히켄카가.”
“……뭐?”
“뭐라고?!”
파이톤스까지 주머니 속에서 튀어나와 외쳤다.
히켄카라니. 그 이름이 왜 이안의 입에서 당연하게 나오는가.
“게르웨르 꼬맹이!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왜 그 자식을 알아?!”
급기야 파이톤스가 이안의 머리 위로 올라가 상체를 숙인 채 따졌다.
그 모습을 보던 리체는, 깜짝 놀라 파이톤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피해! 파이톤스!”
“어? 계약자, 왜?!”
리체가 파이톤스의 몸을 낚아챈 순간, 파이톤스도 리체와 같은 것을 느끼고 털을 곤두세웠다.
“이안……?”
리체의 눈에 비친 이안의 오른쪽 눈이 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