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깨어났어?
히켄카의 빙의 능력이 필립에게만 한정돼 있지 않다는 건, 리체나 파이톤스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이라니.
“너, 너…….”
파이톤스는 당혹스러움에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넘기는 이안을 가리켰다. 정확히 이안에게 빙의한 히켄카였다.
리체는 굳은 얼굴로 히켄카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안의 몸에 빙의한 거야? 파이톤스가 네 힘을 빼앗아서 잠들었을 거라고 했는데.”
“그거?”
히켄카는 입매를 비틀었다. 위험한 분위기가 이안의 아름다운 외모와 썩 어울리기는 하였으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내가 고작 그 정도에 자는 약골 같아? 저 다람쥐처럼.”
“야, 약골?!”
“…….”
파이톤스가 펄쩍 뛰었고, 리체는 히켄카를 노려봤다.
“매섭네. 그렇게 바라보면 자꾸 계약하고 싶어진다니까. 르티옴.”
히켄카가 다가오자 이안의 입술이 리체에게 닿을 듯 가까워졌다.
리체의 눈과 이안의 눈이 마주쳤다. 익숙한 눈이지만, 그곳에 이안은 없었다. 낯설다.
매혹하듯 리체를 보던 히켄카는, 굳은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지난번 이안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말했을 때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이번에도 너 때문에 계획이 틀어졌어. 좀 더 빨리 나왔어야 했는데. 유리병에 얌전히나 있지, 왜 나와서는 난리지?”
“내가 뭐?”
파이톤스가 지지 않고 날카롭게 반응했다.
저 노란 눈깔이 보자마자 시비네.
싸워보자는 건가 싶어 히켄카에게 맞서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리체의 손바닥이 파이톤스의 시야를 막았다. 또다시 히켄카에게 잡힐까 염려되니 접촉하지 않았으면 했다.
히켄카는 파이톤스에게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별의 탐지 범위나 넓혀봐. 그 녀석들이 왔을지 모르니까.”
“네가 뭔데 내 능력을 넓히라 말아라……. 잠깐, 그 녀석들?”
그 녀석들.
히켄카가 그렇게 지칭하는 이는 몇 없었다. 예를 들면 인간계를 노리고 함께 이쪽으로 넘어왔던 세 위대한 별이라던가.
파이톤스가 놀라 리체의 손을 내리며 히켄카에게 물었다.
“깨어났어?!”
“그래. 나도 깨어났고.”
그래서 내가 빼앗은 힘이랑 상관없이 이안드웨인한테 빙의한 거였네. 파이톤스가 중얼거렸다.
[계약자, 조심해. 노랑이 자식 지금 강하니까.]
‘응.’
히켄카는 잠들어 있을 때도 사념체로 빙의가 가능했지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의 제약을 크게 받았다.
깨어 있는 지금은 이안의 몸에 히켄카의 영혼이 빙의돼 있을 터였다. 사념체와 달리 본체의 힘을 낼 수 있는.
“잠시만.”
파이톤스는 히켄카를 경계하다, 불현듯 생각난 것이 있는 얼굴로 히켄카에게 다급히 물었다.
“그, 그럼 티타도?!”
히켄카는 히죽 웃었다.
“걔는 아직 잠들어 있지. 우리보다 몇백 년은 늦게 잠들었잖아.”
파이톤스는 실망한 듯 꼬리를 내렸다. 리체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파이톤스가 당황해 물어보는 데다가, 몇백 년 늦게 잠들었다는 히켄카의 말을 미루어 짐작할 때. 르티옴을 만든 위대한 별의 이름이 티타인 듯했다.
‘아직 잠들어 있구나.’
만난다면 자신을 왜 과거로 돌려보냈는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히켄카가 그런 리체를 보며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으나, 파이톤스의 물음이 더 빨랐다.
“그래서. 그 녀석들이 깨어난 거랑 내가 별의 탐지를 하는 게 무슨 상관인데?”
히켄카는 리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그야, 녀석들이 원하는 게 여기 있으니까 그렇지.”
* * *
한편, 능력자들은 여전히 히베츠만 공작이 머무는 침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
그저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지크베르트.
‘리체가 르티옴이라니. 이건 운명이야.’
제 사랑의 운명론을 펼치며 머릿속 꽃밭에서 뛰어다니는 로벤하프.
“…….”
“블레이크.”
말이 없는 블레이크와, 그런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히베츠만 공작과 데온.
‘재밌게 흘러가는군.’
자신이 한 말로 능력자들 사이에 불신의 싹이 트인 듯했다.
게르웨르 공작은 이 상황이 꽤 마음에 들었다. 총장이 보낸 서신을 보고 아카데미로 온 보람이 있지 않은가.
게르웨르 공작 각하.
히베츠만 공작 각하께 들으셨겠지만, 직접 말씀을 드리는 것이 도리라 생각되어 서신을 전합니다.
지난번 거절하셨던 일은 아드님인 이안드웨인 군의 조언을 얻고자 하여…….
기억에도 없는 거절. 그리고 총장의 부탁으로 능력을 사용한다는 이안드웨인.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들에게 준 아티팩트는 결코 벗을 수 없는 저주였으니.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거라.”
게르웨르 공작은 이안의 목걸이에 그렇게 저주를 걸었다.
사라지거라. 너조차도 모르게. 처음부터 세상에 없던 것처럼.
‘이안드웨인. 네게는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죽지 않을 테니.’
게르웨르 공작은 재작년부터 고대의 아티팩트로 생명을 유지했다.
능력자의 저주를 대신 받아주는 아티팩트였다. 그러나 새롭게 쌓이는 기운에만 효과가 있었고. 그마저도 일정 기운을 넘기자 깨지고 말았다.
결국, 능력자의 기운을 정화하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었다. 르티옴.
‘로드윅의 수양딸이 르티옴이다.’
게르웨르 공작은 블레이크를 본 순간 확신했다.
그렇게 줄어든 부작용이라니. 르티옴인 리체처럼 선명하게 기운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의 금안에도 능력자들에게 쌓인 기운이 비쳤다.
‘내가 차지하겠다. 이번에야말로.’
히베츠만 공작과 로드윅 공작이 아카데미 내에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부터 생각했다.
수양딸이 르티옴인 걸 밝히고, 그들 사이에 불화를 불러일으켜 상황을 악화시킬 생각이었다. 마침 하늘도 저를 돕는지, 마물들이 아카데미를 덮쳤다고 했다.
능력자들이 트아리체 한 사람에게 정신을 쏟을 수 없는 상황. 자신이 르티옴을 차지하기에 최적의 기회가 아닌가.
‘한 번 남았군.’
게르웨르 공작은 손가락에 낀 반지를 살짝 문질렀다.
그가 모은 고대의 아티팩트 중 하나였다. 착용자가 치명적인 공격을 받았을 때, 대신 그 충격을 받아주는. 일회용이기에 반지 두 개 중 하나는 아까 블레이크의 공격으로 깨어졌다.
‘별 조각이라……. 그자가 아니면 평생을 모르고 살았을 테지.’
몇 년 전, 르티옴을 찾아 노예시장을 헤매던 중 만난 자신의 선조.
그가 고대의 아티팩트가 있는 장소 몇 군데를 알려줬다. 마석이 아닌 별 조각이란 것으로 만든 고대 유물이라 했다.
속는 셈 치고 찾아본 아티팩트는, 사용자가 영창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마석과 달리, 그 자체로 고유의 능력을 갖고 있었다.
강력한 힘으로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했다. 상식 밖의 물건에 게르웨르 공작은 순식간에 매료됐다. 그는 고대 유물을 수집하며 그중에서 별 조각을 사용한 아티팩트를 찾기 시작했다.
제 능력과, 그 부작용을 대신 받아주는 아티팩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수가 틀려서 로드윅과 히베츠만과 싸울 일이 생긴다 해도, 맞설 수 있을 정도는 되지.’
몸이 근질거렸다.
어서 빨리 제 눈앞에서 르티옴을 두고 두 공작이 싸워줬으면. 그래야 제가 그 틈을 타 르티옴을 가지러 갈 테니.
“리체는 내 딸일 뿐이야.”
“그걸 묻는 게 아니잖나!”
그 사이, 블레이크와 히베츠만 공작 사이의 대화가 격해졌다. 히베츠만 공작이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때다.
게르웨르 공작은 몸을 돌려 방문을 열었다. 그 순간, 그의 뒤로 강한 빛이 번쩍이며 침실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게르웨르 공작은 침실을 돌아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아아.”
은은하게 발광하는 그의 금안이 흔들렸다.
꿈에서 본 이후로 늘 그리워만 했던, 그 신비한 빛이 제 앞에 서 있었다.
“나의 르티옴.”
은발의 제 르티옴이, 거실 한 가운데서 저를 보고 서 있었다.
내게로 온 것인가. 내 것이다.
게르웨르 공작은 감격에 벅차 리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콰직.
그 순간, 게르웨르 공작의 검지에 있던 반지가 깨지며 두 동강 나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게 왜.
‘또 로드윅 공작인가!’
또 방해받았다. 바로 제 앞에 르티옴이 있는데!
몇 년을 로드윅 공작에게 속아 르티옴을 갖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3년 전, 자신이 그 더러운 곳에서 르티옴을 주웠을 것이다. 더러운 르티옴을 씻기고 입히고 먹였을 것이다. 그렇게 제게 감사하게 하며 저택에서 길렀을 것이다. 종국에는 르티옴의 세상에 저 밖에 남지 않게. 오로지 제 곁에서 자신만을 정화하는 존재로 살아가게.
‘그렇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감히 제 르티옴에게 가족 같은 불필요한 존재를 만들어 주다니.
내 목숨을 두 번이나 앗아가려 하다니!
그간 쌓였던 분노가 한 번에 터져 나오는 듯했다.
게르웨르 공작은 몸을 돌려 침실에 있는 블레이크를 노려보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저를 붙든 듯,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쩌어억.
사람이 아니었다. 바닥에서부터 올라와 제 몸을 얼리는 얼음이었다.
얼음은 불길처럼 순식간에 게르웨르 공작의 몸을 타고 치밀어올랐다.
게르웨르 공작이 히베츠만의 능력이라는 것을 인지한 순간은, 이미 온몸이 얼음 속에 갇힌 뒤였다.
“…….”
그제야 가만히 서 있던 리체가 걸음을 뗐다.
게르웨르 공작을 앞에 두고 얼마나 긴장했던지,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했다.
리체와 같은 공간에 있던 사람들은 조금 전 침실에서 빛이 번쩍일 때 모조리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 공간에서 움직이고 있는 건 리체와,
“괜찮아? 리체?”
“응. 이안은? 아버지잖아.”
“……나도 괜찮아.”
양쪽 눈이 금빛으로 빛나는 이안드웨인.
“괜찮긴! 저 자식은 우리 토끼 같은 계약자한테 트라우마라고!”
“진짜 변태 같다니까. 게르웨르 공작은.”
그리고 똑같이 생긴 두 마리의 다람쥐였다.
* * *
게르웨르 공작이 얼려지기 이십여 분 전.
리체는 숨었던 건물에서 나와 기숙사로 향하는 중이었다.
어깨에는 파이톤스가 있었고 옆에는 이안에게 빙의한 히켄카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리체는 히켄카에게 이안이 호수에 빠졌던 날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안이 걸렸던 몽유병, 게르웨르 공작이 준 목걸이 때문이래.”
“지금 이안드웨인이 하고 있는 목걸이?”
“응. 그게 이안의 능력을 봉인하고 몽유병이 생기게 했대. 아, 하나는 우리 아빠가 준 거야. 몽유병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던데?”
“그래?”
히켄카는 리체의 말에 두 개의 목걸이를 바라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하나를 잡아 뜯었다.
게르웨르 공작이 준 목걸이였다.
“아, 안 돼!”
그 모습에 리체가 기겁하며 소리쳤으나, 이미 목걸이는 끊겨 히켄카의 손에서 달랑거렸다.
리체의 머릿속에 블레이크에게 들은 말을 조곤조곤 전해주던 이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로드윅 공작님께서 알아봐 주셨는데, 목걸이를 억지로 뜯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러셨어.”
리체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태연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히켄카의 모습에, 리체가 소리쳤다.
“히켄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