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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49)화 (49/89)

49화 진짜 뻔뻔해

“억지로 벗기면 이안한테 무리가 간다고 했다고!”

“그래 보여?”

히켄카가 말했다. 상태를 확인하려던 리체는 이안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정확히는 눈동자.

흑안이었던 왼쪽 눈마저 금빛으로 변했다. 목걸이를 벗자 원래 색을 찾은 것이었다.

이상하다. 같은 금안인데도 느낌이 달랐다.

게르웨르 공작의 금안은 소름이 끼쳤고, 히켄카의 금안은 위험해 보였는데. 이안의 금안은 그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평온해질 듯 맑고 찬란했다.

“쟤는 밤에 등불이 따로 필요가 없겠네.”

파이톤스가 리체의 어깨 위에서 중얼거렸다. 

이렇게 인간의 외모에 잠시 정신을 뺏긴 것도 오랜만이었다.

머리카락까지 금색인 데다가, 얼굴까지 잘생겨 버리니. 한때 아름다움의 신이라며 뻗대던 별이 꼬리를 빼고 달아날 듯했다.

하지만 겉모습이 그렇다는 거고, 지금 이안의 몸속에 있는 건 히켄카였다. 

파이톤스는 수상쩍은 히켄카의 입꼬리를 유심히 바라봤다. 정수리까지 짜증이 치미는 걸 보아하니, 저 자식이 뭔가 꾸민 게 분명해.

“그 목걸이, 별 조각이잖아. 네가 이안드웨인에게 줬어?”

별 조각. 파이톤스의 물음에 리체도 히켄카의 대답을 기다렸다. 히켄카가 태연스레 입을 열었다.

“아니. 게르웨르 공작한테 위치만 알려줬는데?”

“그게 준 거잖아. 노랑아.”

“노랑이? 내 애칭이야?”

“……계약자, 저거 오늘 무덤으로 보내버리자. 너, 그냥 다시 잠들어 버려.”

파이톤스는 소름이 돋는다며 털을 부르르 털었다. 리체가 히켄카에게 물었다.

“왜 그랬어?”

“이안드웨인의 능력을 봉인할 필요가 있었거든.”

“필요가 있었다니?”

“걔가 널 알아보면 안 되니까. 기껏 로드윅이 게르웨르 공작에게서 널 숨겼는데 이안드웨인이 알게 돼서 들키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르티옴, 너는 게르웨르 공작에게 잡히면 안 됐거든.”

잡히면 안 됐다니. 무슨 말인지 좀 더 듣고 싶었지만, 히켄카는 물어볼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말을 이었다.

목걸이를 뜯은 건 게르웨르 공작이 이제 네 정체를 알았기에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며. 

원래의 소유주는 본인이기에 뜯는 데 문제가 없다고 했다. 게르웨르 공작이 목걸이에 할 수 있었던 것은 저주까지. 그도 목걸이의 주인이 아니기에 목걸이를 벗길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르티옴. 나를 범인으로 몰면 조금 억울해. 내가 게르웨르 공작한테 알려준 건 아티팩트의 위치랑 사용법이거든. 그걸 좋다고 제 아들에게 준 건 게르웨르 공작이란 말이지? 어떻게 아들한테 그런 일을 할까? 하여간에 음침한 작자라니까.”

히켄카는 자기는 아무 죄가 없다는 듯, 제삼자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파이톤스가 음침한 건 너라며, 리체가 하는 추궁에 말을 거들었다.

“방금 한 말이랑 앞뒤가 다르잖아. 멍청아. 이안드웨인의 능력을 봉인할 필요가 있었다며?”

“필요가 있었지만, 내가 그런 건 아니란 말이지.”

“어딜 발뺌해. 전부 네가 꾸민 일이잖아. 게르웨르 공작이 이안드웨인에게 목걸이를 줄 걸 알았을 텐데. 그래 놓고 내 계약자한테 이안드웨인을 살리라고 해? 제정신이야?”

“아, 그거.”

히켄카가 어깨를 으쓱했다.

“인간계에 능력을 봉인하는 별 조각이 그것밖에 없더라고. 저주는, 나도 안타깝게 생각해. 그래서 르티옴한테 이안드웨인을 구하라고 했잖아? 얼마 전에는 정말 죽을 뻔해서 내가 급하게 나오긴 했지만.”

그 말에 리체가 히켄카를 노려봤다. 이안을 그렇게 만든데다가, 지금은 이안의 몸에 빙의해서 그런 소리를 하다니. 

“……넌 진짜 나빠.”

“계약자, 그것도 욕이라고 한 거야? 더 심하게 말해도 된다고. 따라 해 봐. 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노랑아.”

“……이…….”

“됐다. 됐어. 야, 노란 눈깔. 너 양심이란 게 있냐? 그러고 게르웨르 꼬맹이 몸에 빙의해?”

파이톤스가 히켄카에게 항의했다.

“너무 화내지들 말라고. 상처받으니까. 그래서 내가 로드윅 공작한테 몽유병을 막는 아티팩트도 줬잖아?”

히켄카는 이안의 목에 하나 남은 목걸이를 흔들었다. 리체는 목걸이를 향해 시선을 뒀다.

이안이 얼마 전 블레이크에게 도움을 받았다면서 받아온 목걸이였다.

“그걸 네가 줬다고?”

히켄카는 히죽거렸다.

“블레이크 로드윅의 수행원이 찾는 정보상에 빙의했지. 돈은 좀 받긴 했지만. 로드윅은 돈이 썩어날 정도로 많으니까 그쯤은 괜찮지?”

“안 괜찮아.”

“그래? 그러면 이안드웨인이 갚을 거야.”

뻔뻔한 기세에 리체는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고 히켄카와 함께 가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히켄카였으니까.

파이톤스가 히켄카에게 물었다.

“그 녀석들이 노리는 게 이번 세대 능력자들인 건 확실해?”

“확실해. 티타가 되돌린 미래, 그러니까 르티옴이 있던 미래에서 그랬으니, 이번에도 똑같이 흘러갈 거야.”

리체가 경험했던 미래를 말한 것이었다.

게르웨르 저택에 갇힌 아그네스가 알지 못했던 바깥세상의 이야기.

그 미래에서 깨어난 위대한 별들은 인간계로 건너왔다. 그리고 자신들의 그릇으로 능력자들을 노렸다. 정확히는 데온과 로벤하프와 지크베르트.

히켄카가 티타라는, 르티옴을 만든 위대한 별에게 들은 이야기라 했다. 

“그 미래에서 너만은 인간계로 넘어오지 않았다고? 그래서 걔가 너한테 그 자식들을 막자고 제안한 거야?”

“정확히는 거래지. 티타를 도와주는 대신 내가 원하는 걸 주기로 했거든.”

“그게 뭔데?”

“비밀이야. 파이톤스.”

히켄카가 한쪽 눈을 감았다. 파이톤스가 못 볼 걸 봤다며 헛구역질했다.

“소름 끼쳐. 이번에는 그 자식들이랑 같이 행동 안 하나 보지? 왜? 자고 있을 때 너한테도 접근했을 거 아니야.”

위대한 별의 잠은 일반적인 잠과는 달랐다.

잠에 빠지면 본체는 모든 행동에 제약받지만, 정신은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바깥의 일을 보고, 들을 수 있으며 힘이 어느 정도 채워졌다면 잠에 빠진 다른 별과 대화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니 이번 계획도 히켄카의 귀에 들어갔을 터였다. 히켄카도 몇백 년 전 인간계로 넘어온 네 개의 별 중 하나였으니.

“계획이 별로였거든.”

히켄카는 유치하다는 듯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세 개의 별이 히켄카에게 제안한 건 인간계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네 개의 공작 가문이 전쟁을 하는 거야. 그중 한 가문만 승리하면 되니까. 녀석들이 원하는 건 인간들 사이에서 나올 영웅이거든. 인간계를 지배할 정도로 강한 힘을 보여줄.”

“그게 말처럼 돼?”

“유치하지만 실제로 전쟁을 일으키는 데에는 성공한 모양이야. 르티옴이 있던 미래에서 말이지.”

황제보다 큰 권력을 가진 공작들의 전쟁이었다.

당연히 무혈 사태란 없었다. 로크샤 제국은 피로 물들었고, 셀 수 없는 이들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위대한 별들이 만들려는 영웅은 그러한 과정이 필요했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강한 존재가 되기 위해. 인간계를 지배하고 인간들이 별을 칭송하게 만들어야 했으니.

받는 칭송이 커지면 별은 다시 신이 되었다. 그렇게 인간계에 별들이 넘어올 환경을 만들 계획이었다.

“지겨운 얘기는 이쯤 하고. 르티옴의 방에 있는 다람쥐 몸이나 찾으러 가. 그 녀석들을 막으려면 파이톤스, 네 힘이 필요하니. 사념체를 영혼으로 되돌려서 본체에 집어넣어 줄게.”

* * *

하지만 모든 게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리체의 기숙사실.

“다람쥐 모습은 네가 더 잘 어울린다. 그렇지? 계약자.”

“응. 귀엽다.”

“……히켄카야?”

파이톤스, 리체, 이안은 부들부들 떠는 다람쥐 한 마리를 바라봤다.

파이톤스와 똑 닮은 생김새였지만, 오른쪽 눈이 금색이라는 점이 달랐다.

파이톤스가 낄낄거렸다.

“고마워해라. 노랑아. 내가 이안드웨인에게서 영혼이 튕겨 나온 널 위해 내 몸을 빌려줬잖아?”

히켄카의 영혼이 인간계의 환경을 버티지 못했다.

필립에게 한 것 같은 빙의라면 다시 무덤에 있는 본체로 사념체가 돌아가면 됐지만.

이번에는 히켄카가 직접 인간계로 넘어와 이안의 몸을 그릇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파이톤스의 사념체를 영혼으로 바꾸어 몸에 집어넣으려던 히켄카는, 도리어 이안의 몸에서 튕겨 나와 파이톤스의 몸으로 들어갔다.

‘내가 하찮은 다람쥐라니.’

좌절하는 히켄카를 위로할 겸, 리체가 말을 걸었다.

“그냥 나오면 되지 않아?”

“……안 돼.”

히켄카는 고개를 저었다.

“르티옴, 이걸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별들의 융합이야. 한 번 융합된 몸과 영혼은 별의 무덤에나 가야 떼어진다고. 내가 왜 저 근육밖에 모르는 놈이랑 융합을…….”

보통 정신까지도 교류할 정도의 친밀한 사이여야 하는 것이 별들의 융합이었다.

히켄카는 파이톤스의 다람쥐 몸에 제 영혼이 들어가 버린 게 꽤 자존심이 상했는지,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슬퍼했다.

리체는 그런 히켄카를 비웃는 파이톤스를 향해 물었다.

“파이톤스, 괜찮아? 히켄카가 네 몸에 들어갔는데.”

“응? 뭐, 무덤 한 번 다녀오면 떨어질 테니까.”

파이톤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처음에는 히켄카와 함께 절규하던 파이톤스였는데. 히켄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더니 관람료로 제 몸쯤 빌려주는 건 괜찮다며 상황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러면 이제 가자.”

초조해진 리체가 히베츠만 공작이 머무는 곳으로 가기를 재촉했다.

곧 인간계로 넘어올 별들이 능력자들을 노린다는 게 신경이 쓰였다.

이안이 리체에게 말을 걸었다.

“리체, 가면 아버지한테 정체를 들킬 거야. 차라리 나랑 히켄카만-.”

“아니야. 이안. 내가 갈게.”

리체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숨길 수 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설령 게르웨르 공작이 알고, 블레이크나 데온, 로벤하프가 알아 제게 배신감을 느낀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별들이 세 사람의 몸을 차지하게 두면 위험해.’

리체는 숨이 끊기기 전 봤던 세 명의 공작을 떠올렸다.

비상식적으로 쌓인 기운. 이제야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전쟁이 시작될 거다.” 

게르웨르 공작이 말한 전쟁. 그 전쟁에서 게르웨르 공작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살아남은 세 공작도 거대한 크기의 기운을 달고 자신이 갇힌 지하실을 찾아왔다. 불과 20, 21살이라는 나이에.

과연 그렇게까지 능력을 사용하는 게 그들의 뜻이었을까. 세 사람도 별들의 도구로 사용되었는지 모른다.

자신이 게르웨르 공작의 정화 도구로 사용됐던 것처럼.

“내가 구하러 가야 해.”

이안의 빛나는 금안이 리체의 말이 진심임을 알아보았다. 네가 그러길 원한다면.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울게. 리체.”

* * *

그렇게 달려온 히베츠만 공작이 머무는 귀빈 숙소.

그리고 얼어붙은 게르웨르 공작.

“…….”

이안은 노한 얼굴로 손을 뻗고 있는 제 아버지를 바라봤다.

늘 무섭게만 여겼던 아버지인데, 이렇게 보니 그저 탐욕스러운 한 명의 인간처럼 보였다.

“너는 도둑이다. 내 피를 이어받았다는 이유로 내 것을 앗아가려는.”

게르웨르 공작의 말을 들을 때마다 이안은 그 말을 부정했다.

자신은 아버지의 것을 빼앗지 않을 거라며. 그러니 절 미워하지 마시라며.

하지만 이안은 지금 처음으로 그 말이 이뤄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것이 언젠간 제 것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들어가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안의 귀에 리체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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