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어떻게 알았지
리체는 땀이 맺힌 손바닥을 교복 재킷에 문지르며 걸어갔다.
히베츠만 공작이 있는 침실로 가려면 얼어붙은 게르웨르 공작을 지나쳐야 했다.
게르웨르 공작을 향한 트라우마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안에 있을 사람들이 걱정됐다.
이안 또한 그런 리체의 곁을 지키며 따라갔다. 리체의 어깨 위에는 파이톤스가 올라가 있었다. 히켄카는 어디론가로 모습을 감췄다.
‘조용해.’
거실에서 살짝 보이는 침실 안쪽이 조용했다. 조금 전, 침실을 가득 채웠던 번쩍이는 빛.
‘별들이 온 거야.’
침실로 들어가니, 블레이크와 히베츠만 공작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히켄카의 말대로라면 아카데미 내에 깨어 있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 녀석들이 한꺼번에 오면, 강한 별의 힘 때문에 도시 하나 크기 내에 있는 생명체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지. 그러니까 와 봐. 그 반동을 이겨낼 수 있게 암시를 걸어줄 테니까.”
“암시?”
“정신에 거는 보호막 같은 거야.”
히켄카는 리체와 이안에게 암시를 걸었다. 덕분에 쓰러지는 사람들 속에서도 두 사람은 멀쩡히 서 있을 수 있었다.
게르웨르 공작의 경우, 착용한 팔찌의 별 조각이 히켄카의 암시와 비슷한 역할을 했기에 멀쩡했지만. 오히려 정신을 잃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랐다.
그랬더라면 데온과 로벤하프에게 빙의한 별들에게 공격받지는 않았을 테니.
“뭐야? 오늘 무슨 날이야? 왜 여기 다들 모여 있어?”
파이톤스의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그리고 의자와 소파, 창가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익숙한 얼굴들.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건 전혀 다른 존재였다.
[파이톤스.]
데온의 입에서 흘러나온 낯선 목소리가 파이톤스의 이름을 부른다. 처음 보는 날카로운 눈빛에 리체가 움찔했다.
[네가 왜 인간계에 있지?]
이번에는 로벤하프.
평소와 다른 차가운 얼굴이 리체의 어깨 위에 있는 파이톤스를 응시했다.
[……다람쥐.]
그리고 지크베르트.
과묵한 모습은 닮았지만, 지크가 아니었다. 지크는 파이톤스를 저렇게 사냥감 보듯 하지 않으니.
파이톤스는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별들을 향해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냐? 너희 이제 그릇을 반납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소리지?]
“뒤통수 조심하라는 거야.”
창가에 선 데온의 뒤쪽에서 히켄카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축 늘어져 바닥으로 쓰러진 데온.
데온의 등 위에 착지한 히켄카의 작은 손에는 지난번 파이톤스의 사념체와 같은 작은 빛이 들려 있었다.
“이안드웨인! 가져와!”
히켄카가 외쳤다. 그 소리에 이안은 아까 히켄카에게 받은 유리병을 곧장 가져갔다. 히켄카가 유리병 안에 빛을 넣고 이안이 마개를 닫았다. 갇힌 빛이 화를 내듯 날뛰며 유리병 안쪽 면에 이리저리 부딪혔다.
히켄카는 오른쪽 금안을 빛내며 사악한 다람쥐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제일 골치 아픈 놈 처치했고.”
로벤하프와 지크베르트가 그런 히켄카를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히켄카, 배신했군.]
[…….]
“배신은 아니지. 몇백 년 전의 우리는 일시적 협력관계였을 뿐이잖아?”
잠시 뒤.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침실 외벽이 무너졌다. 얼음이 만들고 부서지는 소리와 짐승의 포효, 파괴되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마침내, 리체와 이안, 두 다람쥐 앞에는 빛이 담긴 세 개의 유리병이 놓이게 되었다. 위대한 별들의 사념체를 유리병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이게 다 내 계약자가 강한 덕분이라니까.”
위기 상황이 있었지만, 리체가 파이톤스가 가진 파괴의 힘을 사용한 덕분에 전세가 역전됐다. 적군, 아군 가리지 않은 무차별적 공격이긴 했지만.
“사념체인 내 몸으로는 엄두도 못 낼 공격이었지.”
전투의 신인 자신의 계약자답다며, 파이톤스가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힘 조절에 실패했다. 얼굴을 붉히는 리체에게 이안이 말을 건넸다.
“멋졌어. 리체.”
그렇게 말하는 이안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 맺혀 있었다. 히베츠만 가문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얼음 때문에 침실에 냉기가 흐르고 있음에도.
정신을 잃은 능력자들을 안전한 거실로 옮기느라 꽤 애를 쓴 모양이었다.
키가 엇비슷한 지크베르트를 제외하고 다들 이안보다 덩치가 컸으니.
리체가 도와준다는 것을 끝내 사양하고 혼자 모두를 옮겼다.
“고마워. 이안. 많이 힘들지 않았어?”
“뭘.”
이안은 별것 아니라며 웃음 지었다.
한편, 유리병 앞에서 별들을 한참 약 올리던 파이톤스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히켄카에게 물었다.
“그런데 얘네도 사념체잖아. 본체는 능력자들 몸에 남아 있을 텐데, 그건 어떻게 하려고?”
인간계로 나오는 별은 기본적으로 빛 형태였다. 파이톤스처럼 외형을 바꿀 수도 있지만 힘을 더 사용해야 했기에, 인간계와 환경이 맞지 않는 별들에겐 무척이나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리체와의 계약이 없었더라면 파이톤스도 빛 형태로 지내야 했을 터였다.
“빛 형태일 때는 내가 손에 쥘 수 없으니까 사념체로 만들 수 없어. 녀석들이 능력자들의 몸에 들어가고, 몸의 주도권을 잡았을 때를 노려야 해. 그때가 녀석들의 의식이 바깥으로 나와 있을 때니까.”
그렇게 히켄카의 능력으로 별들의 정신을 뽑아 사념체로 만들었지만.
문제는 본체가 여전히 능력자들의 몸 안에 있다는 거였다.
“그거야.”
히켄카는 슬쩍 이안과 대화하는 리체를 보더니,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키워 답했다.
“그릇을 파괴하고 꺼내야지.”
“어?!”
그릇을 파괴한다니. 능력자들을 파괴한다는 소리였다.
그 말에 리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르티옴은 놀리는 보람이 있네. 히켄카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농담이고. 녀석들의 의식을 사념체로 만들어 유리병에 가뒀으니까 본체는 아무것도 못 해. 정신을 잃은 빈 껍데기가 뭘 하겠어? 그러니 제일 좋은 건 아무것도 안 하고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거야. 그 사이 이 녀석들은 유리병에서 서서히 힘이 빠질 테고, 능력자들은 때가 되면 죽을 테니.”
“죽는다니?”
리체의 물음에 히켄카가 답했다.
“인간도 수명이 있으니까. 백 년을 넘게 살지는 않을 거 아니야?”
그릇을 잃은 별들의 본체는 자연히 능력자들의 몸 밖으로 나올 테고, 그때쯤 유리병에서 힘을 잃은 별들은 사념체를 영혼으로 되돌려도 바로 잠에 빠질 거라 했다.
하지만, 그래도 찝찝했다. 리체는 마지막까지 안전을 확인받듯 물었다.
“오빠랑 로벤하프 오빠, 지크 안에 별들 본체가 들어가서 안 좋은 점은 없어? 위험하다던가.”
“위험하지. 적이 되는 사람들이.”
“……?”
“본체에 있는 별의 힘이 스며들 테니까,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거든. 상대하려면 꽤 힘들 거야?”
둘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파이톤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히켄카. 네가 말하는 건 그 녀석들이 얌전히 유리병 안에 있는다는 가정하에 이뤄지는 거잖아. 나처럼 밖으로 나오면 어떻게 하려고?”
파이톤스와 쌍둥이 다람쥐 같은 모습을 한 히켄카는 자존심이 몹시 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같은 실수는 두 번은 안 해.”
어쨌든. 처음 목표한 대로 별들을 가뒀으니, 사람들이 깨기 전에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리체는 별 조각의 복구 능력을 사용해 깨지거나 망가진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커다란 구멍이 뚫린 외벽도 말끔하게 돌아왔다.
전투의 여파로 남은 얼음과, 얼어붙은 게르웨르 공작을 제외하면 모든 게 이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얼음은 못 녹여. 저 녀석이 직접 얼린 거니까.”
히켄카는 세 번째 유리병을 가리켰다. 살짝 푸른색을 띠는 빛은 지치지도 않고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다음 날이 되자 사람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일제히 정신을 잃었던 일로 잠시 소란이 일어났지만, 원인을 모르는 데다가, 해를 입은 것이 없었다.
마물에게 습격받은, 큰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이번 일은 그저 이상한 일을 겪었다고 여기는 정도에서 그쳤다.
“게르웨르 공작님……?”
한편, 히베츠만 공작의 숙소에 있던 사람들은 정신을 잃은 것보다 더 큰 일을 맞이했다.
얼려진 게르웨르 공작.
블레이크는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목격자들을 입단속 했다.
공작의 신변에 관한 일이니, 황제에게 보고는 들어갔지만.
곧바로 황궁에서 조사를 나온다는 답신을 받았다. 능력을 가진 이안에게 조사 협조를 요청했다고 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히베츠만 능력자들이 용의자가 되지는 않을 거야.”
모든 것이 해결되어 가는 듯했으나, 리체에게는 자신도 몰랐던 한 가지 위기가 남아 있었다.
“야, 멍멍이. 너 르티옴이라고?”
뒤늦게 깨어난 데온의 화난 얼굴.
……어떻게 알았지.
리체는 슬쩍 뒷걸음질 쳤다.
* * *
황립 아카데미.
마물 사건으로 3개월간 휴교가 결정됐다.
전교생은 아카데미 교정 여기저기 흩어져 집으로 가는 마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의 시선은 단연코, 이번 사태를 해결한 능력자들에게로 쏠렸다.
“저기 봐. 능력자들이다.”
“나 지크베르트 등에 탔었다?”
“데르케디온이랑 로벤하프도 있어. 싸울 때 엄청 멋있었는데.”
“이, 이안드웨인 눈 왜 금색이야? 외모 무슨 일이야…….”
다 함께 있다가 교정으로 나오는 건지, 뭉쳐서 걸어오기에 더 눈에 띄었다.
“그런데 가운데에 있는 사람…… 트아리체 맞지?”
“맞네. 능력자들한테 가려져서 잘 안 보이긴 하지만.”
“트아리체도 대단하더라. 그때 대피소로 들어온 애들이 그랬잖아. 트아리체가 구해줬다고.”
“그때 힘들었나? 왜 저렇게 기운 없어 보이지?”
리체는 터덜터덜 힘없이 걸었다.
그제, 능력자들에게 르티옴인 걸 들켰다.
“블레이크, 자네 딸이 정말 르티옴이라고?”
히베츠만 공작은 블레이크를 추궁하려다, 리체가 옴을 깨끗이 정화해주자 두말하지 않고 영지로 떠났다.
심경이 복잡한 듯했다. 친우인 블레이크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그의 딸 덕분에 자신의 옴이 정화된 것에 기뻐해야 할지.
심경이 복잡한 건 리체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이제 네 눈 앞에 펼쳐질 건 부귀영화나 기다리면 되는 거지. 내가 봤던 르티옴들은 다 그랬어. 장담한다니까?]
리체의 걱정에 파이톤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금도 능력자들이 널 떠받들어 주고 있지 않냐며, 상황을 즐기라고 낄낄거렸다.
하지만 리체의 걱정에 그런 부귀영화 생각은 들어올 틈도 없었다.
‘다들 화난 거 같아.’
블레이크는 사실 알고 있었다며 리체를 위로해줬지만.-이것도 듣고는 무척이나 놀랐다.-
데온과 로벤하프는 전혀 모르고 있다가 제가 르티옴이라는 말을 들은 것이었다.
아마 배신감이 들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점점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이틀째 두 사람하고는 사이가 영 어색했다.
“리체.”
“어?”
“나는 운명을 믿어.”
“……?”
오랜만에 말을 걸어놓고 한다는 소리가 운명을 믿는다니.
리체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당황하는 사이, 로벤하프는 푸른 눈을 반짝이며 리체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몇 년만 더 기다려줘.”
뜬금없는 소리에 리체는 로벤하프를 바라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데온이 그런 로벤하프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운명 같은 소리 하네. 너만 능력자냐?”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으니 꿈도 꾸지 말라는 의미였다.
미래는 모르는 일이라며, 로벤하프가 생긋 웃었다.
“오빠, 화 안 났어?”
“뭐가.”
“그……. 내가 숨겨서…….”
데온은 리체를 빤히 바라보다 머리를 툭 쳤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었다. 역시 화가 난 모양이었다.
‘데온은 정말 화났나 봐…….’
리체의 고민이 깊어져 가는 동안, 가문의 마차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공작 가문들의 마차도 마찬가지였다.
로드윅 영지로 놀러 가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로벤하프와 지크베르트가 각자 떠났다.
이안도 얼어붙은 게르웨르 공작을 사방이 막힌 짐수레에 실었다.
황궁에서 사건을 조사하러 나온 일로, 이제는 게르웨르 공작이 당한 일을 모두가 알았다.
황궁에서는 게르웨르 공작을 얼린 용의자로 히베츠만 가문의 능력자를 지목했다. 하지만 이안이 히베츠만의 능력이 아니라 증언했기에, 히베츠만은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래도 공작이 당한 사건이니, 게르웨르 영지로 돌아간 후에도 조사가 진행될 예정이라 했다.
리체는 떠날 준비를 마친 이안에게 물었다.
“이안, 그 저택으로 가도 괜찮겠어?”
“응. 아버지가 저렇게 되셨으니까, 괜찮을 거야. 목걸이도 사라졌고.”
이안은 생긋 웃다가 리체에게 속삭였다.
"리체, 어젯밤에 꿈을 꿨어.”
게르웨르의 혜안이 드물게 보여주는 미래였다.
“조만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좋은 일? 리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길래.
“나도 로드윅 영지로 놀러 갈게. 곧 보자.”
이안도 그렇게 마차를 타고 떠났다. 공작 가문 중 남은 건 로드윅뿐.
하지만 리체는 아주 잠시, 아카데미에 남아도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리체, 가자꾸나.”
마차 앞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는 블레이크와 데온.
이번에는 황도의 로드윅 저택이 아닌 로드윅 공작성으로 갈 예정이기에, 몇 날 며칠을 두 사람과 마차를 타고 가야 했다.
“네…….”
리체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마차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