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내 오빠잖아
아카데미에서 로드윅 공작성으로 가는 길은 마차로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중간중간 마을에서 묵기도 했으나, 한동안은 아무것도 없는 길이 나와 야영하는 날도 있었다.
그게 바로 오늘.
기사들과 사용인을 포함한 스물 남짓한 로드윅 가의 일행은 야영하기 좋은 자리를 찾아 마차를 세웠다.
잠자리가 될 천막을 치고 저녁을 준비하는 사이, 데온과 리체는 모닥불을 앞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
평소 같으면 배고프냐며 시비라도 걸어올 텐데.
벌써 4일째. 데온이 조용했다. 리체는 곁눈질로 데온의 눈치를 봤다.
“뭘 봐.”
데온은 장작을 모닥불에 던져넣으며 리체에게 물었다.
그동안 얼마나 대화가 적었으면, 저런 퉁명스러운 말투도 반가울 지경이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타닥타닥 모닥불의 주변 불씨를 바라보던 데온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너, 3년 전에. 마물의 숲에서도 날 정화한 거야?”
“어? 응……”
“왜.”
왜냐니. 리체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 당시 데온은 정화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생명이 위태로웠다.
그래서 앞뒤 안 가리고 정화했더니. 되려 데온의 시비가 날아왔다. 르티옴인 걸 숨긴 건 미안하지만, 이건 추궁받을 일이 아니지 않나.
“그대로 두면 위험했으니까.”
리체는 뾰로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데온이 그런 리체의 변화를 눈치채고 제 말투를 변명했다.
“아, 내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러다 흑발을 쓸어 넘기고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나 같은 거 왜 구했냐고. 내가 너 그때 마물한테 보여 주려고 숲으로 데리고 간 거 알았잖아.”
“같은 거라 하지 마.”
리체는 데온을 흘겨봤다. 미안한데, 밉다. 미운데, 마냥 밉지는 않다.
“구하고 싶었으니까 구했어. ……내 오빠잖아.”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고 해도. 만일 그날 파이톤스를 만나지 않았다고 해도. 리체는 데온을 정화했을 거라 생각했다.
처음으로 생긴 오빠였으니.
“일곱 살한테 성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죽인다고 협박하던 놈이 무슨 오빠야.”
데온은 말하면서도 과거의 자신이 짜증 났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아 성찰하는 데온이 웃겼다.
리체는 작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데온에게 말했다.
“나 그때 오빠 하나도 안 무서웠는데.”
“알아.”
누그러진 분위기에 데온도 평소보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던 눈매를 풀고 대답했다.
“너는-.”
데온이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리체는 아직도 웃음기가 어린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붉은 눈에 왜인지 안타까운 기색이 어려 있었다.
데온은 멀뚱히 자신을 보는 리체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약해 빠졌어.”
“……?”
누가 그 트아리체를 두고 약해 빠졌다는 소리를 하는가.
리체와 같은 반 학생들이 들으면 기겁할 말이었다.
하지만 데온에게 리체의 이미지는 그랬다.
약한 주제에, 다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른 사람의 아픔을 그냥 두지 못하는. 착해빠지기만 한 제 여동생.
데온은 그런 리체가 걱정됐다. 언젠가는 리체가 또 누군가를 구하겠다고 떠날지 모른다. 그렇게 영영 자신들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을지 모른다.
데온은 어째서인지 드는 불안을 홀로 삼키고, 태연하게 리체에게 말했다.
“너, 다음에 위험한 짓 할 것 같으면 나 불러.”
“어?”
“넌 하지 말래도 할 테니까. 차라리 도와주는 게 낫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 걱정하는 건 사양이라며, 데온이 툴툴거렸다.
자신을 신경 써 주는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기에 리체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 블레이크가 그런 남매를 보고 미소 지었다. 화해했나 보군.
“야, 멍멍이.”
그래도 짚고 넘어갈 건 있었다.
데온은 말하기를 몇 번 망설이다 리체에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 몇 명이나 알고 있었어.”
“뭘?”
“너 르티옴인 거. 지크베르트 세르디야는 알고 있었지?”
“아,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위험하다.
데온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적으로 느낀 리체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제 거짓말을 간파한 데온의 눈꼬리가 조금 전보다 올라갔으니.
막아야 해. 리체는 황급히 두 검지로 데온의 눈꼬리를 슬쩍 내렸다.
리체가 그러든 말든. 데온은 개의치 않고 리체에게 다시 물었다.
“로벤하프는 몰랐던 것 같고. 이안드웨인 게르웨르는?”
“…….”
리체는 데온의 얼굴에서 천천히 검지를 떼고 눈동자를 굴렸다.
데온이 말없이 시선을 내려 리체의 조용한 머리통을 바라봤다.
“…….”
싸늘한 침묵이 둘 사이에 감돌았다.
아무래도 오늘 아주 화해하기는 그른 듯했다.
* * *
“역시 집이 최고라니까.”
제드는 공작성 로비에서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너스레를 떨었다. 로비는 돌아온 주인 가족을 맞이하는 사용인들로 북적였다.
제드는 리체의 짐가방을 들고 들어오는 필립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무거워요. 제드 씨.”
“필립, 너도 맡아 봐. 냄새가 다르다고.”
“다르기는요. 매번 똑같은…… 아, 다르네.”
“그렇지?”
“두 사람. 복잡하니까 바보짓은 다른 데 가서 하는 게 어때?”
안나가 필립과 제드 사이를 가로지르며 지나쳤다.
쌩하니 걸어가는 뒷모습에 필립이 제드에게 말했다.
“요즘 안나 씨가 차가워요.”
“바보구나. 필립. 안나는 우리한테 원래 그랬어.”
제드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우리 필립이 리체 아가씨 옆에만 있다 보니, 유독 따뜻한 안나를 많이 봐서 그렇게 느껴지는 모양이라며, 한쪽을 가리켰다.
안나가 방금 지나간 방향이었다. 리체와 함께 계단으로 올라가는 안나가 보였다.
“아가씨! 트라펫 씨가 오늘 오후에 신작을 보내준대요!”
“신작?”
“드레스요! 얼마나 잘 어울리실까! 제가 봐 드려도 돼요?”
반짝인다.
그런 안나의 모습에 필립은 위기감을 느끼고 침을 삼켰다.
‘명심하자, 안나 씨는 하이에나야.’
제드도 말을 거들었다.
“필립, 조심해. 이러다 리체 아가씨 다음 학기 수행원은 안나가 될지도 모른다니까.”
* * *
“여기가 르티옴이 지내는 곳이야? 꽤 좋네.”
리체가 혼자 방에 남자, 히켄카는 짐가방에서 나와 리체의 방을 두리번거렸다.
오는 내내 리체의 짐가방에 숨어 있었더니 좀이 쑤셨다.
“열심히 봐둬라.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
어느새 제 전용 쿠션을 찾아 드러누운 파이톤스가 히켄카에게 말했다. 누가 보면 방 주인이 파이톤스라 생각할 법한 자세였다.
리체는 그런 파이톤스의 근처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오늘 호숫가로 갈 거지?”
“응. 보름달이 오늘 뜨니까.”
오늘을 놓치면 며칠을 다시 기다려야 했다.
파이톤스는 귀찮다는 듯 하품했다. 히켄카만 보내려고 했지만, 몸을 되찾으려면 함께 무덤에 다녀와야 했다.
“인간계 시간으로 하루 만에는 안 될 것 같고, 다음에 돌아오는 건 다시 보름달이 뜰 때쯤일 거야.”
리체는 파이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히켄카의 유리병도 가져가야 하니, 다람쥐 몸으로 힘들 수도 있었다. 리체가 같이 가주겠다고 했지만, 파이톤스가 알아서 할 수 있다고 거절했다.
“그런데 히켄카. 나 궁금한 게 있어.”
리체의 부름에 샹들리에의 장식을 매만지던 히켄카가 눈매를 좁혔다.
방 전체를 구경한다고 올라간 참이었다.
“르티옴이 내게 질문할 게 있어? 뭔데?”
“아카데미를 습격한 마물 말이야. 그런 일이 또 일어날까?”
며칠 전, 마차 안.
데온은 마물의 습격이 누군가 의도적으로 한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짐가방 안에서 듣던 히켄카는 후에 리체에게 그 말을 부정했다.
“의도적이진 않았고, 사고였지.”
범인은 히켄카였으니.
원래는 사념체로 이안에게 빙의해 유리병을 만들어놓을 계획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날 파이톤스에게 힘을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누구 덕분에 잠든 상태로 사념체를 움직일 만한 힘이 없었어. 인간계에서 유리병을 세 개나 만들어 두려면 내 힘을 갖고 있는 이안드웨인한테 빙의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무덤으로 돌아온 히켄카는 마음이 급해졌다. 아직 힘이 온전히 쌓이지 않은 본체를 무리해서 깨웠다. 그런 뒤 이안드웨인을 만나기 위해 본체를 가지고 아카데미, 즉 인간계로 왔다.
그때, 순간적으로 아카데미의 땅에 스며든 강한 별의 힘이 마물을 부른 것이라 했다.
“넌 사념체로도 인간계에 넘어올 수 있잖아. 굳이 본체는 왜 가지고 와서 마물을 불러들여? 어차피 빙의한 상태로 돌아다닐 거면서.”
이번에 히켄카를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별의 탐지에 히켄카의 본체 기운이 한 번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념체를 사용하는 동안 히켄카의 본체는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니, 금고에 보관하듯 어느 인간의 몸에 본체를 숨긴 거겠지.
아마 능력자 가문과 전혀 연관 없는 인간일 터였다. 히켄카는 그런 별이었으니까. 본인 외에는 누구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
파이톤스의 핀잔에 히켄카는 넌 아직 멀었다는 듯 비웃었다.
“일이 잘못됐을 때를 대비해서지. 녀석들을 화만 돋운 상태로 놓치면, 무덤에 돌아가서 무방비한 내 몸을 찾지 않겠어? 아직 소멸은 싫다고.”
어쨌든. 히켄카는 마물의 습격은 자신이 오지 않았어도 일어났을 일이라 했다.
세 위대한 별이 그릇을 노리고 아카데미로 왔을 때도, 별의 힘이 아카데미 땅에 스며들었으니.
히켄카는 아카데미를 마물이 다시 습격할까, 라는 리체의 염려에, 흔들리는 샹들리에를 타며 말했다.
“그건 땅에 처음 위대한 별의 힘이 스며들 때뿐이야. 한 번 강한 별의 힘을 머금은 땅은, 그 이후부터는 이번과 같은 일이 일어나도 마물을 불러들이지 않아.”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리체에게, 히켄카가 말을 이었다.
“대신 아카데미가 마물의 소굴이 되기는 할걸.”
“그게 무슨 말이야?”
“로크샤 제국에 마물이 나오는 장소, 알아? 마물의 숲은 티타가 자기 힘을 실은 운석을 떨어트려 만든 거지만. 나머지 두 군데는 위대한 별이 인간계에 내려온 흔적이야.”
강한 힘을 가진 별이 인간계에 내려왔을 때, 그 힘을 흡수한 땅은 마력을 품고 마물을 탄생시켰다.
“다른 곳처럼 변하겠지. 거기도.”
“아카데미가 마물의 숲처럼 변한다고?”
“그래. 몇 년 안에.”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냐는 리체의 물음에, 히켄카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대답했다.
“그러면 네가 막는 건 어때?”
“내가? 어떻게?”
“파이톤스도 알걸.”
히켄카와 리체의 시선을 받은 파이톤스가 쿠션에 드러누운 채 흥, 하고 손을 내저었다.
“계약자. 그거 엄청 귀찮아. 차라리 마물을 상대하는 게 더 나을 정도라니까.”
“히켄카,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으. 벌써 넘어갔잖아. 저 노랑이가 쓸데없는 말을…….”
“간단해. 땅이 머금고 있는 별의 힘을 빼내면 되거든. 거대한 마석이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인간들이 말하는 마력 생산 코어, 그게 생기기 전에 땅속의 마력을 꾸준히 빼내 주는 거지.”
“간단은 무슨.”
네가 친 사고를 왜 우리 계약자가 수습해야 하냐며, 파이톤스가 투덜거렸다.
그래도 리체에게 제안하는 히켄카를 크게 말리지 못하는 것은, 그 외의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직 1학년이지? 8년이면 충분해. 르티옴.”
히켄카가 리체를 향해 씩 웃었다.
정말 내 몸이지만 재수가 없어 보이네. 파이톤스는 히켄카를 짜증 난 눈으로 바라보다, 결심한 리체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떨궜다.
그려지는 미래가 빤했다. 제 계약자한테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싶었는데.
‘내가 인간계에서 저 자식 본체 찾아내고 만다…….’
그날 밤.
리체는 창가에 서 있는 작은 늑대 한 마리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