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실패했어
히켄카가 사념체인 파이톤스의 외형을 조작한 것이었다.
파이톤스와 히켄카, 둘 다 원래 힘을 내지 못하는 상태라 크기가 작긴 했지만.
지크베르트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에, 리체는 파이톤스를 쓰다듬었다.
“다녀올게. 계약자.”
“응. 잘 다녀와.”
그런 파이톤스의 등에는 끈으로 단단히 엮은 유리병 세 개가 얹혀 있었다.
다람쥐 모습의 히켄카가 파이톤스의 등에 올라타며 리체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나랑은 당분간 볼 일이 없겠네? 파이톤스랑 계약 파기하고 나랑 계약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그러다 할 말이 떠올랐는지 리체의 팔을 타고 어깨로 올라와 파이톤스에게 들리지 않게 귓속말했다.
“……다음에 인간계에 나왔을 때 또 봤으면 좋겠거든.”
리체는 히켄카를 말없이 바라봤다.
그런 뒤, 둘은 다시금 리체에게 작별을 고하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리체는 열린 창문 너머 환한 보름달을 바라봤다.
방금 히켄카에게 들은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번에 저 녀석들의 계획을 막았지만, 네가 아는 마지막이 오지 않을 거란 장담은 못 해. 조심하라고. 르티옴.”
인간은 생이 짧잖아?
그렇게 말한 히켄카는 다음 말을 덧붙였다.
“네가 겪은 건 더더욱 짧았고.”
* * *
리체는 블레이크의 서재로 향했다.
도서관을 다녀온 리체의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이전처럼 블레이크가 그림책을 읽어주는 건 아니었지만, 리체는 글자만 있는 책을 읽기 시작한 뒤에도 종종 블레이크의 곁에서 독서 시간을 갖곤 했다.
“왔구나.”
리체가 서재로 들어오자 블레이크가 슬쩍 미소 지었다.
그의 책상 옆에는 리체가 언제든 와서 있을 수 있도록 책상 하나가 더 붙어 있었다.
블레이크는 그 책상의 의자를 빼며, 신나서 제게 걸어오는 딸을 바라봤다.
“아빠, 오늘 도서관에서 재밌어 보이는 책을 찾았어요.”
“그래?”
“얀도 읽은 거라는데 후반부가 무척 흥미진진하대요! 아빠, 이거 읽어보셨어요?”
리체는 블레이크에게 가져온 책을 보였다. 블레이크가 손을 뻗어 책을 건네받으려던 그때.
똑똑.
리체가 들어오면서 닫은 서재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폴이군.
자주 방문하는 이들은 노크하는 소리만으로도 구분이 됐다.
블레이크가 들어오라 말하자, 집사 폴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폴은 난감한 얼굴로 블레이크를 향해 말했다.
“저, 가주님.”
“무슨 일이지?”
“세르디야 공작님께서…… 성에 방문하셨습니다.”
세르디야. 그 작자가 왜.
세르디야 공작의 방문이 썩 내키지 않았다. 블레이크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지크네 아빠가 우리 집에?’
리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에 지크베르트를 데리러 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로드윅 공작성에 방문한 적 없는 인물이었다.
더욱이 로드윅과 세르디야는 타고난 성향이 맞지 않은 탓에, 본능적으로 적대하는 관계였다.
‘세르디야 공작이 왜 왔지?’
그러면 지크도 같이 왔을까.
리체는 블레이크를 따라 인사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블레이크는 그런 리체를 손을 잡고 말했다.
“리체, 도서관에 가 있거라.”
“세르디야 공작님께 인사 안 드리고요?”
“안 해도 괜찮아.”
블레이크는 리체를 도서관으로 피신시키려 했으나, 세르디야 공작이 더 빨랐다.
응접실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무시하고 폴의 뒤를 따라 블레이크의 서재까지 온 것이었다.
갈색 피부에 파이톤스 못지않은 근육, 잔디처럼 짧은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폴을 지나쳐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블레이크 로드윅! 오랜만이군!”
호탕한 웃음이 서재에 울렸다.
리체는 그런 세르디야 공작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뚱한 얼굴이어서 지크처럼 과묵한 사람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말이 많은 듯했다.
‘세르디야 공작이 기분파라는 게 이런 의미였나?’
사람들이 말하길, 세르디야 공작은 상당한 기분파라 오전과 오후의 성격이 다르다고 했다. 그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발소리마저 조심하며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도 있었다.
다행히도 오늘의 세르디야 공작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들뜬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으니.
“이 아이가 자네 딸인가? 반갑군. 총장한테 들었다. 네가 르티옴이라고?”
그래서였군.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블레이크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리체가 르티옴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능력자들, 그리고 그들의 최측근.
문제는 총장이 로벤하프와 히베츠만 공작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것이었다.
블레이크와 히베츠만 공작은 총장에게 경고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아, 알겠습니다. 능력자분들만 알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래 놓고 세르디야 공작에게 말한 모양이었다. 그도 능력자라고.
사실 총장의 입을 막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세르디야 공작의 귀에 리체의 이야기가 들어갔을 테지만.
이렇게까지 성에 멋대로 찾아와 리체를 만나려고 한 것은 달갑지 않다.
조용히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블레이크는 세르디야 공작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미안하군. 오늘은 손님을 맞을 상황이 아니니 이만 돌아가게.”
하지만 세르디야 공작에게 그 말은 통하지 않았다. 원래 듣고 싶은 말이 아니면 한쪽 귀로 듣고 반대쪽 귀로 흘리는 작자니.
기어코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 소파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 맞은편, 리체와 나란히 앉은 블레이크가 세르디야 공작을 바라봤다.
“온 이유가 뭐지.”
“정화, 되나?”
누가 들으면 맡겨 놓은 줄 알겠군.
블레이크는 불쾌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리체의 능력은 제 것이 아니니. 거절도, 승낙도. 리체의 것이었다.
다행히 리체는 세르디야 공작에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안 돼요.”
사실을 말한 것이었다.
파이톤스가 몸을 되찾으러 무덤으로 넘어갔으니, 돌아올 때까지 능력자들을 정화할 수 없었다.
아플 것을 각오하면 해줄 수야 있지만, 기운 때문에 당장 세르디야 공작의 생명이 위험한 건 아니었다. 거절하는 게 나았다.
‘숲을 돌아서 온 건가? 여기까지 왔는데 죄송하네.’
지크처럼 마물의 숲을 가로질러 오지 않았을 테니, 세르디야 공작은 자신을 보겠다고 먼 거리를 돌아온 것이었다.
헛걸음하게 한 듯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려던 차.
리체는 자신을 관심 있게 보는 세르디야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
“왜 그러지. 세르디야 공작.”
블레이크가 한쪽 팔을 뻗어 세르디야 공작의 시야에서 리체의 얼굴을 가린 채 물었다.
“자네 딸, 크면 상당한 미인이 되겠는데.”
어쩌라는 건가.
세르디야 공작이 굳이 말을 꺼내 칭찬하지 않아도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미모뿐만인가. 사랑스럽기도 하지. 거기다 똑똑하기도. 뛰어난 마법 재능은 두말할 것도 없다. 제 딸이 잘난 걸 다 얘기하려면 밤을 새워도 부족할 정도였다.
블레이크는 세르디야 공작을 바라봤다.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할 거면 이제 돌아가 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블레이크가 주는 눈치를 세르디야 공작이 알아차렸을 리가. 그는 블레이크의 팔 너머의 리체와 대화하는 중이었다.
“지크베르트와 친구라고?”
“네.”
“그러면 둘이 결혼할래?”
맥락 없이 튀어나온 소리에 블레이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미쳤군. 세르디야.
응접실 안의 십수 쌍의 눈이 일제히 세르디야 공작을 향했다.
순식간에 자신을 적대하는 로드윅의 분위기에도, 세르디야 공작은 천연덕스럽게 턱을 어루만졌다.
“내 자식도 인물은 어디 가서 빠지는 편이 아니고. 어떤가, 로드윅 공작. 나쁜 생각은 아니지?”
반기는 사람 하나 없는 소리였다.
당사자로 지목된 리체는 덤덤히 앉아 상황을 지켜봤다.
‘어른들 농담은 정말 이렇구나.’
안나의 말대로였다.
주변에서 결혼 상대로 자신이 아는 사람을 마구 갖다 붙인다며 진절머리를 앓던.
“다 빈말이에요. 그냥 나이만 엇비슷하면 잘 어울린다고 하는 거라니까요.”
진담으로 들을 필요도 없다고,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다가 리체는 아직 열 살이었다. 그러니 세르디야 공작이 자신과 지크베르트를 두고 농담하는 게 분명할 텐데.
“내 딸은 아무한테 못 주겠는데.”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한 블레이크는, 진심으로 세르디야 공작을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농담이 아닌 것은 세르디야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내 아들이 아무나는 아니지! 무려 로크샤 제국의 공작 후계자라고? 아, 내가 말했나? 얼마 전에 지크베르트한테 황녀의 약혼자 자리는 어떠냐고 연락이 왔네.”
“잘됐군. 황녀와 약혼하면 될 테니. 내 딸은 건들지 말게. ……그리고 그깟 공작 후계자.”
리체를 넘보면서 고작 내미는 게 공작 후계자 자리라니.
저 인간과는 더 할 말도 없다. 세르디야 공작이 성을 나갈 생각이 없다면 자신이 리체와 장소를 옮기면 그만이다.
블레이크는 리체를 안아 들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세르디야 공작이 또다시 블레이크의 발을 잡았다.
“그래도 말이야. 결혼이란 게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면 더 좋지 않나? 내 아들은 좋아한다고 하던데. 자네 딸을.”
“친구로서 좋아하는 거겠지.”
다른 주제였다면 벌써 응접실을 떠났다.
리체의 이름이 나오는 게 은연중에 걸린 블레이크가 이번에도 세르디야 공작에게 대꾸했다.
응접실 한쪽에 선 제드는 그런 블레이크를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우리 가주님, 리체 아가씨 얘기라면 한 마디도 지려 하지 않으신다니까.’
딸바보는 무섭다.
‘세르디야 공작도 왜 저러나 몰라. 리체 아가씨로 우리 공작님 계속 자극해봤자 좋을 게 없는데.’
평안히 가시길. 세르디야 공작.
제드가 안식을 비는 와중에도 두 공작의 이상한 대립은 계속됐다.
“친구? 지크베르트는 자네 딸이랑 결혼해도 좋다고 하던데?”
세르디야 공작이 블레이크에게 말한 그 순간이었다.
쩌저적.
바닥에 얼음이 순식간에 깔리기 시작했다.
밟으면 깨질 정도로 얕은 얼음.
리체는 블레이크의 발치에서 멈춘 얼음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응접실의 문에 로벤하프가 서 있었다.
놀러 온다던 날이 오늘이었나. 리체가 반갑게 손을 들어 인사하려던 그때였다.
“로벤하-.”
“저도.”
늘 장착하는 사회형 미소였으나, 안면 근육이 살짝 경련하고 있었다.
로벤하프는 바삭바삭 깨지는 얼음을 밟으며 블레이크와 리체를 향해 걸어갔다.
어느 정도 가까이 온 로벤하프는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트아리체랑 결혼하고 싶은데요. 로드윅 공작님.”
“……어?”
“뭘…… 하고 싶다고?”
“……?”
리체, 블레이크, 세르디야 공작, 그리고 응접실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까지.
그들은 블레이크에게 리체와의 결혼을 통보하는 로벤하프를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눈이 돈 제 도련님을 말리려 뒤쫓아오던 히베츠만 가문의 사용인은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난…… 안 할 건데.”
이어 리체의 입에서 나온 당황한 목소리.
끔찍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세르디야 공작마저 로벤하프의 눈치를 보며 슬쩍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사람들이 목격한 건 당사자에게 청혼하기도 전에 거절당한 로벤하프의 처참한 프러포즈 실패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