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왜 이렇게 불쌍해 보여?
“…….”
“오빠, 왜 이래?”
“형, 말라버린 해삼 같아.”
“해삼? 그게 뭔데?”
“있어. 못생긴 거.”
올해 9살.
릴리와 로터스는 히베츠만 공작과 로벤하프를 따라 로드윅 공작성으로 놀러 왔다.
분홍 머리의 쌍둥이는 멍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은 로벤하프를 두고 진지한 토론을 시작했다.
“리체 누나한테 차였대.”
“헐. 고백한 거야?”
“했다던데? 제드가 말해줬어.”
“바보. 로벤하프. 내가 리체 언니는 안 될 거라고 했는데.”
지난 3년간 로벤하프가 리체의 친한 오빠 자리를 노리며 로드윅 공작성에 드나들 때, 쌍둥이도 끈질기게 로벤하프를 따라다녔다.
덕분에 릴리와 로터스도 로드윅 공작성 사람들과 꽤 안면을 텄다.
쌍둥이는 넋이 나간 로벤하프의 볼을 양쪽에서 쿡쿡 찔렀다.
무자비한 동생들의 손길이 아플 만도 한데, 로벤하프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귓가에 쉴 새 없이 맴도는 리체의 “난…… 안 할 건데.”란 말이 로벤하프를 괴롭게 했으니.
다 망쳤다. 한층 한층 쌓아 올리던 첫사랑이란 이름의 모래성을 제 손으로 무너트리다 못해 발로 밟고 그 위에서 뛰기까지 했다.
“형, 재미없어.”
“로터스. 우리 오빠 두고 리체 언니한테나 갈까?”
“리체 누나한테 로벤하프 형 왜 찼는지 물어보게?”
“아니?”
그런 당연한 걸 왜 물어보려고?
제가 리체 언니라도 오빠를 찼을 거다. 완벽한 리체 언니한테 우리 오빠라는 흠이 남겨지면 그렇잖아?
릴리는 소파에서 폴짝 뛰어 내려왔다.
“리체 언니 보고 싶어서.”
* * *
한편, 응접실에서 나온 리체는 데온의 방으로 도망치듯 들어왔다.
그러고는 데온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로벤하프가 한 결혼이라는 말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중이었다.
‘깜짝 놀랐어.’
세르디야 공작이야, 지크 본인이 한 말을 직접 들은 게 아니니 당연히 애를 두고 하는 어른의 농담이라고 여겼지만.
로벤하프는 절 앞에 두고 블레이크에게 그렇게 말했다.
‘진심으로 말한 건가?’
진담이든, 농담이든. 바로 앞에서 로벤하프 본인이 자신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다니. 그것도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데.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당황한 리체의 머릿속이 꼬였다. 나는, 나는, 결혼을…….
“난…… 안 할 건데.”
그래서 입 밖으로 나온 게 그 말이었다.
그 뒤에, 충격받은 얼굴의 로벤하프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블레이크가 응접실 밖으로 데리고 나와줬다. 그 길로 곧장 데온에게 온 참이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직도 볼이 붉었다.
‘제대로 말했어야 했는데, 말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났어.’
상상해본 적도 없는 일이라 더더욱 그랬다.
사실 리체는 누군가 절 이성으로 좋아할 거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그네스의 삶까지 통틀어 봐도 리체에게는 그런 경험이 전혀 없었으니.
로벤하프에게 다시 가서 제대로 거절하는 편이 좋을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해도 좋을지 몰랐다.
‘파이톤스는 알려나.’
수천 년을 살았다는 파이톤스가 곁에 있었다면 조언을 구해볼 텐데. 아직 다음 보름달이 뜨기 전이라 돌아오지 않았다.
리체는 소파 팔걸이에 기대 누운 데온을 바라봤다. 데온은 맞추던 나무 큐브에 싫증이 났는지, 가볍게 던져 받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오빠, 누구 좋아해 본 적 있어? 연애 감정으로?”
“뭔 소리야.”
뜬금없는 소리에 데온이 인상을 썼다.
조금 전.
데온은 로벤하프가 왔다는 소식에 바로 리체에게 가려고 했으나, 리체가 도리어 절 찾아왔다.
덕분에 방에서 나갈 틈이 없게 된 데온은, 지금 로드윅 가를 떠들썩하게 만든 로벤하프의 공개 청혼 실패담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 게 어딨어.”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런 걸 하지 않아도 크면 대충 가문에 맞는 사람을 찾아 결혼할 터였다. 로드윅 가문의 대는 이어야 하니까.
로드윅은 태생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으니 대부분 그런 식으로 결혼 상대를 찾았다. 연애 결혼을 한 블레이크가 무척이나 드문 경우였다.
‘볼은 왜 붉어.’
데온은 리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여기면서도, 리체의 옅은 색으로 붉게 물든 볼이 신경 쓰였다.
느낌이 좋지 않다. 로벤하프가 제 동생에게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했다.
“너, 걔한테 무슨 소리-.”
그러다 누군가 방문을 노크하고 문고리가 돌렸다. 살짝 열린 문의 틈 사이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데르케디온 오빠. 리체 언니 여기 있어?”
“릴리?”
“어, 언니 목소리 들린다! 여기 있었구나!”
리체의 말에 릴리는 그제야 문을 벌컥 열고는 데온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로터스가 따라 들어왔다.
쌍둥이는 소파에 앉은 리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리체는 순식간에 두 사람에게 껴안긴 꼴이 되어 물었다.
“왜, 왜 그래?”
“언니! 우리 오빠가 말린 해파리가 됐어!”
“못 봐주겠어. 누나한테 차인 게 충격인가 봐.”
쌍둥이는 징징거리면서 리체의 볼과 어깨에 제 얼굴을 마구 비볐다.
명목은 히베츠만 가문의 장남 걱정이었지만, 행동은 명백한 사심 채우기였다.
“야. 쌍둥이.”
그러다 낮게 깔린 데온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쌍둥이는 리체의 양 팔을 하나씩 잡아 나무의 매미처럼 찰싹 붙었다.
“데르케디온 오빠.” “형.”
쌍둥이가 동시에 말했다.
“로벤하프가 차였어? 내 동생한테? 그게 무슨 소리야?”
꿀꺽. 쌍둥이는 침을 삼키고 자신들을 향해 몸을 일으키는 사신을 바라봤다.
데온에게서 로벤하프를 지켜야겠다며 혈육의 의리를 다짐했지만. 의리는 3초도 가지 못했다.
쌍둥이는 데온의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고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우리 오빠가 리체 언니한테.”
“결혼하자고 했어.”
잠시 뒤.
“데, 데르케디온 오빠! 우리 오빠 죽이면 안 돼!”
“혀, 형! 같이 가!”
쌍둥이는 방을 달려 나가는 데온의 뒤를 쫓았다.
방에 혼자 남은 리체는 순식간에 휑해진 주변에 황당해 눈을 깜빡였다.
* * *
‘결혼?’
리체가 능력자들의 기운을 정화해도 다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데온은 능력자만큼은 리체와 이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능력자가 안 되는 건지, 로벤하프가 안 되는 건지, 다른 사람이라면 괜찮은 건지. 데온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로벤하프는 양심도, 염치도 없다는 것.
‘리체한테 정화 받아서 이어가는 삶이야.’
제 동생은 능력자들이 탐을 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데온은 당장에라도 로벤하프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달려갔다.
쌍둥이가 말한 대로, 손님용 방 소파에 로벤하프가 앉아 있었다.
문제는,
“뭐야.”
“…….”
‘왜 이렇게 불쌍해 보여?’
사람이 방에 들어온 지도 모르고 조각상처럼 하얗게 질린 로벤하프.
데온은 인상을 썼다. 이건 리체한테 보여줘서는 안 된다.
이렇게 불쌍한 걸 보여주면 그 멍청이는 마지못해 넘어갈 게 분명했으니.
“오빠, 나 로벤하프 오빠랑 결혼할게.”
“뭐?”
“불쌍하니까…….”
데온의 머릿속에서 로벤하프의 손을 잡고 우물쭈물 말하는 리체의 모습이 떠올랐다.
절대, 안 되지.
로벤하프가 리체에게 청혼한 것은 용서 못 할 일이었으나.
리체가 로벤하프를 받아주는 것은 가능성의 싹조차도 뽑아버려야 했다.
데온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가라앉히고 로벤하프의 팔을 툭툭 쳤다.
그걸로는 반응이 없었다.
“…….”
잠시 고민하던 데온은 옷 소매를 길게 빼고 제 손바닥을 감쌌다.
그러고는 그 손으로 로벤하프의 볼을 양옆에서 눌렀다.
그제야 로벤하프의 눈이 데온을 바라봤다.
“야. 내가 농담이라고 말해줄게.”
“……무어을?(뭐를?)”
“내 동생한테 너 청혼한 거. 나랑 한 내기에 져서 벌칙으로 한 거라고 말해줄 테니까. 없었던 일로 하라고.”
“…….”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줬는데, 못 알아듣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리체가 오기 전에 이 자식을 덜 불쌍해 보이게 만들어야 했다.
로벤하프는 데온의 말을 곱씹다가, 눈을 반짝였다. 그 반응에 데온은 로벤하프의 볼에서 손을 떼고 옷 소매를 팡팡 털었다.
“없었던 일로 하라고?”
“그래.”
데온의 제안은 상당히 훌륭했다. 애초에 로벤하프를 가장 상심하게 한 건, 틀어진 그의 계획이었으니.
12살. 이때는 아직 친절한 오빠 친구여야 했다.
오늘처럼 미래에 관한 주제를 진지하게 꺼내기 시작하는 건 리체가 18살. 리체의 데뷔탕트가 있는 해에 시기를 봐서, 였다.
그 단계는 그 전에 호감도를 마구 쌓아놔야 갈 수 있는 단계였다. 지금처럼 바닥에 있는 호감 정도가 아니라.
‘데르케디온의 말대로 없었던 일로 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오늘 일은 명백한 실수였다.
지크베르트한테 리체의 약혼자 자리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 정신이 나갔었다.
설마하니 세르디야 공작님이 멋대로 말한 말인 줄이야.
“이거, 히베츠만 공자가 자네 딸이랑 꼭 결혼하고 싶은가 보군? 내 아들은 결혼해도 안 해도 상관없다고 하던데.”
“그건 지크베르트가 결혼하고 싶다고 한 게 아니잖나.”
“뭘 그렇게 빡빡하게 따지나. 그 말이 그 말이지. 안 그래?”
리체에게 차인 후, 굳은 자신을 보며 세르디야 공작과 로드윅 공작이 나눈 대화였다.
야속하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을 듯했다. 지금 자신에게 구원이란 이름의 신의 사자가 내려왔으니까.
“데, 데르케디온. 진짜 그렇게 해 줄 거야?”
“그래.”
내키지 않은 행동이었기에, 데온은 자신이 제안하고 그러겠노라 하면서도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안 죽었구나!”
“형, 살아났어? 왜 마르지 않았지? 데르케디온 형이 물이라도 뿌려준 거야?”
때마침. 손님방으로 들어온 쌍둥이가 로벤하프의 앞에 서서 걱정을 쏟아놓았다.
로벤하프가 갑자기 살아난 것을 보고 로터스는 달려오는 도중 가져왔던 물 한 잔을 등 뒤로 감췄다.
이제, 데르케디온을 쫓아온 쌍둥이처럼 리체만 절 걱정해 달려오면 됐지만.
“…….”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
한 시간 십 분이 지나 데온이 지겹다며 자리를 뜰 때도.
그 이후에도.
리체는 로벤하프가 있는 손님방으로 오지 않았다.
후에 로벤하프가 데온에게 죽을까 걱정하지 않았느냐는 쌍둥이의 질문에,
“우리 오빠가 로벤하프 오빠를 다치게 할 리가 없잖아.”
라는 어리둥절한 리체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로드윅 공작성을 떠나기 전.
로벤하프에게 달달 재촉당한 데온이 리체를 찾아갔다.
다행히 데르케디온이 해준 말에 리체가 섣부른 데다가 멋도 없던 제 청혼을 장난으로 받아 들여줬다.
로벤하프는 히베츠만 영지로 돌아가서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다.
* * *
“수업 잘 듣고.”
“어.”
“땡땡이치지 말고.”
“어.”
리체는 귀찮다는 기색이 가득한 데온의 얼굴을 보며 한소리 했다.
“오빠, 내 얘기 듣고 있어?”
“듣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