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54)화 (54/89)

54화 어디에 있어?

리체와 데온은 로드윅 공작성에서 황도로 올라가는 마차 안에 있었다.

황립 아카데미가 마물에 입은 피해를 정비하기 위해 임시 휴교를 했던 지난 3개월.

파이톤스가 보름달이 뜬 날, 몸을 찾아 돌아왔다.

“노랑이 자식? 걔는 융합이 풀리자마자 인간계로 넘어갔어. 그대로 본체를 찾으러 갔겠지.”

“유리병은?”

“융합을 풀기 전에 무덤 어딘가에 숨긴 모양이더라. 다른 별들은 절대 못 찾을 거라고 자신만만해하던데.”

다른 별에는 파이톤스도 포함돼 있었다. 히켄카가 만든 유리병은 세계 간의 간섭을 차단해 별의 탐지가 통하지 않았으니.

그 뒤로는 소소한 일상들이 흘러갔다.

지크베르트가 가끔 놀러 오고. 로벤하프도 데온과 실없는 내기 벌칙을 하고 돌아간 뒤에 한 번 더 놀러 오고. 

별다른 사건도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아카데미 개학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빠가 안 계시니까 더 잘해야 한단 말이야.”

“잔소리.”

데온은 그만하라는 듯 손으로 리체의 입을 막았다.

리체는 개의치 않고 데온의 손바닥 아래에서 입술을 움직였다.

“겅졍이라구(걱정이라고).”

아직 개학하려면 2주는 더 있어야 했지만, 데온과 리체는 황도에 미리 가 있기로 했다.

촉박하게 가면 아카데미로 오는 마차들로 길이 붐빌 테니 여유 있게 일정을 잡아 출발한 것이었다.

블레이크도 같이 이동하려고 했으나, 출발 직전에 영지에 급한 일이 생겨 3주쯤 뒤에나 황도로 올라온다고 했다. 

“알았으니까 그만 조용히 해.”

“웅(응).”

리체는 데온의 손을 잡아 내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창문에 쳐진 커튼의 틈 사이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번화한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마차가 황도에 들어왔다.

‘아카데미 가기까지 2주 정도 남았으니까. 여유가 꽤 있네.’

잘 됐다. 마침 확인해 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이안은 잘 지내고 있나.’

로드윅 공작성으로 한번 놀러 온다던 이안은, 휴교 기간 내내 연락이 없었다.

게르웨르 공작가로 통신을 신청해도, 따로 편지를 보내봐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처음에는 게르웨르 공작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바쁜가 싶다가도, 짧은 안부 인사조차 오지 않으니 점점 걱정됐다.

‘게르웨르 공작가도 황도에 저택이 있으니까, 짐 풀고 내일쯤 찾아가야겠다.’

이안도 부지런하니 미리 와 있을지 몰라.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익숙한 대문 앞에 마차가 멈춰 섰다.

“데온 도련님, 리체 아가씨. 도착했어요.”

필립이 마차 바깥에서 저택에 도착함을 알렸다.

먼저 내린 데온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는데, 리체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저, 아가씨.”

처음 보는 사람이 리체에게 말을 걸자 필립이 그사이를 가로막으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저희 아가씨께서 잠시 만나 뵀으면 하십니다.”

귀족 가문의 하녀인 듯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눈짓한 곳에는 길목에 정차한 고급마차 한 대가 있었다.

로드윅의 마차가 도착할 때까지 저곳에서 기다리던 모양이었다.

마차의 몸통에 날개를 펼친 하얀 새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문양의 가문을 알아본 데온이 미간을 좁혔다.

“컨트 가?”

“……설마 저희 아가씨께 용건이 있으신 분이 셀린느 컨트 아가씨이십니까?”

필립의 목소리에 경계가 실렸다.

복도에서 무릎을 꿇으라던 첫 만남의 악연.

때문에 필립에게 박힌 셀린느의 인식은, 리체를 적대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셀린느 선배가 저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고요?”

리체의 물음에 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데온이 가지 마, 라 말하고 필립이 그 말에 격하게 동의했지만.

“…….”

리체는 잠시 고민하다 셀린느와 얘기를 나누고 온다며 컨트 가의 마차로 향했다.

‘여기까지 온 거면 중요한 용건이 있는 거겠지.’

리체가 제 쪽으로 오는 걸 창문으로 엿보고 있었던 셀린느는, 마차 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트아리체 양. 오랜만이에요.”

리체도 인사를 건네며 마차에 올랐다. 그러고는 셀린느와 마주 보며 자리에 앉았다.

셀린느는 초조한 기색에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어요?”

리체가 그런 셀린느를 향해 묻자, 그녀는 여유 없는 말투로 곧장 본론을 꺼냈다.

“저, 제가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하시는 말씀을 우연히 엿들었는데. 아, 엿들은 게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 근처를 지나가다-.”

“오해 안 할 테니 그냥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엿들었다고 말을 하고는 귀족의 체면을 신경 쓰는 듯했다. 리체는 괜찮다는 말을 건네고 셀린느의 이어지는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능력자분의 이야기라서요. 저 혼자 고민하는 게 맞나 싶기도 하고…… 하지만 트아리체 양이 알면 좋을 거 같아서…….”

“……혹시.”

낯익은 상황에 리체가 입을 열었다.

기숙사 휴게실에서 셀린느가 제게 이안의 몽유병을 목격한 것을 털어놓았던 때도 지금과 비슷한 말을 했었다.

“설마 이안드웨인 선배 이야기예요?”

“마, 맞아요.”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이 부모님의 대화에서 들은 이야기를, 지금도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리체에게 털어놓았다.

“그제, 게르웨르 공작가의 사람들이 증발했대요.”

“……네?”

“증발은 아버지께서 표현하신 걸 그대로 말한 거고, 아마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사라졌다니.

리체가 놀란 얼굴을 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두……가 누구를 말하는 건데요?”

“모두요. 일하는 사람들도, 기사들도. 얼음 속에 있는 게르웨르 공작님도.”

셀린느는 심각한 얼굴로 사라진 사람들을 나열하다, 잠시 숨을 멈췄다.

그런 뒤, 리체를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리체를 찾아온 가장 큰 이유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이안드웨인도.”

* * *

“황도에 있는 게르웨르 저택으로 찾아가 보세요. 이안드웨인 군을 일주일 전쯤에 황도에서 봤거든요.” 

셀린느가 증발했다고 들은 건 게르웨르 영지의 저택이라 했다. 

일주일 전에 이안이 황도에 있었다면, 이안은 영지로 내려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날 밤.

“혼자 가십니까?”

마부는 머리부터 발까지 가린 로브를 입은 사내를 향해 물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묵한 손님이네. 어쩌면 목소리가 콤플렉스인지도 몰랐다. 맨 처음 목적지를 말했을 때의 목소리가 방정맞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벼웠으니.

‘큰 체격을 보니 사내는 맞는데…….’

마부는 사내를 유심히 살폈다.

외형과 옷차림을 볼 수 없으니 평민인지 귀족인지도 몰랐다.

이럴 때는 정중하게 대하는 편이 나았다. 

평민 대하듯 했는데 재수 없게 귀족 나리였으면, 다음 날 불경죄로 처형당할 수도 있으니.

“밤은 비용이 더 붙는데 괜찮으십니까?”

이번에도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마부는 군말하지 않고 마부석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타시면 출발하겠습니다.”

마부석에 마부가 앉고, 사내가 마차에 올랐다.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마차가 기우는 정도가 작았다. 

저 정도 체격이면 발을 디뎠을 때 마부석의 제 몸이 훅 처지는 기분이 들어야 하는데.

마부는 의아했으나, 이내 마부석 쪽 창으로 사내가 내민 금화 한 닢에 사내를 향한 모든 의문을 내려놓았다.

별문제 없이 마차가 출발하자, 파이톤스가 낄낄거렸다.

[보라니까. 전혀 의심을 못 하지?]

‘응.’

후드 안쪽에 얼굴을 숨긴 리체가 파이톤스의 말에 대답했다.

파이톤스는 리체의 로브 안주머니에 숨어 제 능력의 대단함을 자랑했다.

파이톤스의 인지 조작 능력으로 마부의 눈에는 리체가 건장한 사내처럼 보일 터였다.

로드윅 저택, 리체의 침대 위에는 커다란 강아지 인형이 주인을 대신하고 있었고.

[다들 그 인형을 너라고 생각할걸?]

‘대단하다. 파이톤스.’

[그렇지?]

파이톤스는 그렇게 뻐기면서도 찜찜함을 감출 수 없었다.

데르케디온은 알아볼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괴물이 두 마리다. 제 계약자와 데르케디온이 왜 피가 안 통하는지 모르겠다니까.

파이톤스의 중얼거림에 리체가 못 들었다며 되물었다. 파이톤스는 시치미를 떼며 리체의 주머니 밖으로 나왔다. 그러다 한 건물을 보고 창밖을 가리켰다.

[저거, 게르웨르 저택 아니야?]

리체는 그 말에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반듯하고 깔끔한, 커다란 저택의 뒷부분이 보였다.

이전 생에서는 게르웨르의 영지 밖으로 나올 일이 없었으니, 황도의 게르웨르 저택은 본 적이 없지만.

아그네스가 있던 저택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리체도 파이톤스의 말에 동의했다.

‘맞는 것 같아.’

일부러 게르웨르 저택과 두어 골목 떨어진 곳을 목적지로 불렀다.

마차에서 내린 리체는, 마차가 골목을 벗어나자 걷던 것을 멈추고 게르웨르 저택으로 달려갔다.

철장 대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었지만, 그쯤은 리체와 파이톤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리체는 자물쇠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정원을 가로질렀다.

저택의 문을 다행히 잠겨 있지 않았다.

끼익.

어느정도 예상했지만, 리체의 예고 없는 방문에도 뛰어나오는 이 없이 저택은 고요했다.

“이안?”

리체는 로비를 걸으며 조심스레 이안을 불렀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리체의 구두 굽과 만나 또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렇게 시린 소리는 오랜만이었다. 아그네스가 지냈던 게르웨르 공작의 저택은 늘 이랬다. 조용하고, 차분하고, 삭막했다.

이안의 세계도 항상 그랬을까.

리체는 과거의 자신과 이안이 어쩌면 같은 풍경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안!”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초조하게 외친 리체의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네가 아는 마지막이 오지 않을 거란 장담은 못 해.” 

히켄카.

“네가 겪은 건 더더욱 짧았고.”

너는 누구의 마지막을 말한 거야?

불안함에 행동이 빨라졌다. 리체는 파이톤스와 함께 저택의 방문을 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했다.

“계약자, 없어.”

“……여기도.”

하지만 그 어디에도 이안은커녕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망연자실해 복도에 서 있는 리체를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리체는 바람이 분 방향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복도의 가장 끝쪽 방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파이톤스, 네가 연 거야?”

“나는 아니야.”

나도 아닌데.

리체는 마른침을 삼키며 방으로 걸어갔다. 

방문처럼 창문 또한 활짝 열려 있었다.

커튼이 잔잔한 바람에 너울거리고 달빛이 창틀을 타고 들어와 방을 비췄다.

달빛은 타원형의 전신 거울에 걸쳐 있었다.

“거울 맞아?”

파이톤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만도 했다. 깨진 조각들을 이어 붙인 거울은, 여기저기 빈 조각들이 있는 데다가, 틈을 말끔히 메꾸지 못해 누더기처럼 지저분했다.

무엇보다.

“…….”

리체는 천천히 거울 앞으로 걸어가 쪼그려 앉았다.

시선이 닿는 거울의 나무틀 하단부. 어린애가 칼로 새긴 듯한, 삐뚤빼뚤한 글자가 있었다.

내가 사는 이유

한동안 가만히 글자를 응시하던 리체는 시선을 위로 올렸다.

누군가 이어 붙인 표면은, 거울이란 말이 무색하게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마치 이안을 영영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미래처럼.

공허함. 왜인지 모를 커다란 구멍이 가슴에 뚫린 듯했다.

이안이, 사라졌다.

“나는 앞으로도 살 거야. 널 위해서.”

울상 짓는 리체의 은빛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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