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만만치 않은 상대야
“리체 언니, 그거 재밌어?”
릴리는 모종삽으로 땅을 파는 리체를 보며 물었다.
티테이블의 쿠키를 집는 릴리의 움직임을 따라 살짝 구불거리는 분홍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때마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동색 배지가 반짝였다. 릴리가 입은 아카데미 교복 깃에 달린 배지였다.
“나름?”
리체는 장갑 낀 손으로 능숙하게 꽃모종을 땅에 심으며 대답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을 보아하니 정말 재미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재미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저렇게 흙을 만지고 땀이 날 정도로 움직이는 건 질색이었다.
릴리는 한 입 베어먹은 쿠키를 접시에 내려놓고 찻잔을 들었다.
‘그래도 꽃은 예뻐.’
황립 아카데미 내에 있는 거대한 유리 온실은 사방이 꽃이었다.
모두 리체가 키운 것들이었다.
올해로 설립 7년째.
로벤하프가 창설한 디저트 연구회는, 우스갯소리로 트아리체의 꽃 연구회란 별칭이 붙었다.
설립 인원 다섯 명, 같은 해 한 명 탈퇴, 다음 해 신입생인 히베츠만 쌍둥이 가입, 그리고 올해 봄에 두 명 졸업.
불과 4명이 전부인 소규모의 동아리가 거대한 유리 온실이 딸린 별채를 동아리방으로 사용 중이었지만.
아카데미 내에서는 누구도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었다.
첫째로는, 올해 봄에 졸업한 작년 학생회장, 데르케디온과 부회장인 로벤하프의 권력이 막강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여기다가는 팬지를 심을까?”
리체는 쪼그리고 앉았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숙였던 상체가 펴지며 유리를 통과해 퍼진 빛에 결 좋은 은발이 반짝였다.
마치 신비로운 강에서 태어난 미모의 여신 같은 모습이었다.
릴리는 들고 있던 찻잔도 내려놓고 트아리체를 바라봤다.
‘아, 엄청 예뻐.’
내가 이거 보려고 이 여름에 여기까지 오는 거지.
여름이라 생색내기엔 트아리체가 마법으로 만들어 준 그늘과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쾌적한 온실 환경을 조성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강의실에서 온실까지 오는 길이 땡볕이니 릴리로서는 꽤 불편함을 무릅쓴 행동이긴 했다.
‘이러니까 다들 우리 동아리방이 불공평하다는 소리를 못 하는 거야.’
학생들이 디저트 동호회의 동아리방에 불만을 토로하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
트아리체 로드윅이 꽃이 가득한 온실 속에 있는 모습을 보면 항의할 마음이 쏙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성역이야.”
황립 아카데미에서 트아리체의 미모를 온전히 담을 수 있는 곳은 그곳밖에 없다며, 학생들은 암묵적으로 협의를 끝냈다.
디저트 연구회의 온실은 건드리지 말자.
사실, 온실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식물과 교수들의 든든한 지지가 한몫했다.
이상하게 같은 씨앗, 비슷한 조건의 환경인데도 트아리체의 손을 거치면 전혀 다른 결과물이 탄생했다.
식물들의 빠른 성장 속도와 튼튼함, 맺히는 열매의 탐스러움…….
전혀 싹이 틀 가망이 없던 타지의 씨앗도, 트아리체라면 싹을 틔우는 것이 가능했다.
수십 년간 식물 외길을 걷던 교수들의 눈에도 그 재배 실력은 경이로울 정도였으니.
‘트아리체 양은…….’
‘대지의 손을 가졌어!’
식물 학계에서 전설로만 내려오던 대지의 손이, 트아리체에게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마법과가 아니라 식물과로 왔어야 할 인재를 놓쳤다.
“트아리체 양의 식물과 복수 전공을……!”
“안 됩니다.”
식물과 교수들이 울부짖었으나 황립 아카데미의 실세는 마법과였다.
리체에게 제안할 기회조차 단칼에 거절당했으니.
한동안 식물과 교수실의 인사말은 “트아리체 양…….” 이라는 한숨 섞인 말이었다.
차마 리체를 포기할 수 없었던 식물과 교수들은 결국 자신들의 학과 부지 일부를 트아리체에게 빌려주는 조건으로 식물 재배를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게 일개 신설 동아리였던 디저트 연구회가 황립 아카데미의 전설, 트아리체의 꽃 연구회가 된 배경이었다.
“리체 언니, 마법과 교수님들이 난리던데, 들었어?”
“난리? 교수님들은 아무 말씀 없으셨는데.”
리체는 허리까지 오는 긴 은발을 하나로 올려 묶으며 릴리에게 대답했다.
‘이럴 줄 알았어. 교수님들은 언니 앞에서 한마디도 못 한다니까.’
릴리는 오늘 마법 수업에서 교탁을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던 교수의 모습을 떠올렸다.
“여러분, 이제 2년 남았습니다.”
“……?”
“저희 황립 아카데미의 자랑이자 여러분의 선배인 트아리체 양이 활약할 수 있는 기간이……!”
“교수님, 우세요?”
“가증스러운 판 대륙의 우딕 아카데미, 우리 트아리체 양이 나가기만 하면 당장에 콧대를 짓눌러 줄 텐데-!”
올해로 16살, 7학년의 트아리체 로드윅.
최근 3년간 열린 로크샤 제국 내의 마법 관련 대회의 우승은 모두 트아리체의 것이었지만.
딱 하나.
판 대륙과 로크샤 제국 내의 아카데미들이 참가하는 크셀폰 대회만큼은 예외였다.
“저 크셀폰은 나가기 힘들 거 같아요.”
“왜, 왜죠?”
“예선에서 결승까지 6개월은 걸리니까요.”
“그게 왜……?”
“식물 관리할 시간이 없는걸요.”
트아리체의 불참.
덕분에 황립 아카데미는 만년 2등 자리를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식물 관리할 시간이 없다는, 그 발언에 환호한 식물과 교수들이 다시 트아리체의 식물과 영입을 꿈꿨지만.
“트아리체 양의 복수 전공……. 좋아요. 다만, 트아리체 양을 크셀폰에 나가게 설득해주세요. 대회 기간에 트아리체 양의 온실도 대신 관리해주시고. 그런 다음에 트아리체 양이 좋다고 하면, 복수 전공을 허가하죠.”
총장의 말에 조용히 희망을 접었다.
설득이야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온실의 식물들은 트아리체가 아니면 관리가 안 됐다.
“리체 언니, 올해도 참가 안 할 거야?”
“음…….”
릴리의 말에 리체는 온실을 둘러보았다.
그간 열심히 가꾼 덕에 이제는 몇 달쯤 다른 사람들 손에 맡겨도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괜찮을까?’
[괜찮을걸.]
리체의 물음에 파이톤스가 대답했다.
본인 전용으로 설치한 해먹에서 햇볕을 받으며 노곤하게 누워 있는 모습이 새삼 세월의 변화를 느끼게 했다.
‘몇 년 동안 이맘때쯤이면 난리가 났었는데.’
6년 전, 히켄카와 무덤으로 간 파이톤스는 무사히 제 몸을 돌려받고 리체의 곁으로 왔다.
문제는 인간계의 환경.
사념체일 때는 영향받지 않던 것이, 본체로 활동하니 몸에 부담이 쌓였다.
더욱이 계약자인 리체의 곁을 떠날 수가 없다는 게 파이톤스에게 치명적이었다.
마물의 숲과 멀리 떨어진 황립 아카데미. 그리고 전교생 기숙사제.
파이톤스는 한 학기에 한 번씩은 축 늘어져 입에 호숫가를 달고 살았다.
그래도 이제는 인간계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됐는지, 작년부터는 방학에 한 번 호숫가를 찾는 것으로도 몸이 버텨주는 듯했다.
[땅에 마력도 많이 빠졌고. 이제는 가끔만 빼줘도 마물 소굴은 안 될 거야.]
파이톤스는 옆 나무의 이파리를 손으로 건드리며 말했다.
리체가 꽃을 일구기 시작한 건, 히켄카가 위대한 별들의 사념체를 가지고 무덤으로 가고 난 뒤. 아카데미에 돌아오면서부터였다.
“아카데미가 마물의 숲처럼 변한다고?”
“그래. 몇 년 안에.”
……
“그러면 네가 막는 건 어때?”
“내가? 어떻게?”
“파이톤스도 알걸.”
리체는 아카데미가 마굴 소굴이 되지 않는 방법을 파이톤스에게 물었다.
[마력을 빼내려면 한 가지밖에 없어. 네가 땅에서 마력을 빼내고 그 마력이 다시 땅에 들어가지 않게 흡수할 생명체를 기르는 거지. 농사를 짓거나, 정원을 가꾸거나? 그걸 꾸준히 해줘야 한다고. 귀찮게.]
그래서 처음에 선택한 게 꽃을 심는 거였다.
초반에는 조금 힘들었지만, 파이톤스와 주변 사람들이 도와준 덕분에 나름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마력을 빼내는 작업 때문에 두 달 이상 아카데미를 떠나지 못했는데, 이제 반년 정도 자리를 비워도 된다니.
‘크셀폰 대회…….’
내심 졸업하기 전에 나가보고 싶기는 했다. 6학년 이상의 학생들만 참여할 수 있는 대회이니, 올해와 내년밖에 기회가 없었으니까.
결정을 내린 리체는 릴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는 크셀폰 대회도 참가할래.”
“헉. 정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리체의 대답에, 릴리가 놀라 되물었다.
‘총장님이랑 교수님들 무척 좋아하시겠네.’
조만간 축제라도 열리는 거 아니야?
솔직히 릴리는 그런 재미없는 대회에 관심도 없었지만.
리체가 참가한다고 하면 이야기가 달랐다. 최대한 알짜배기 정보만 모아와 리체 언니에게 전해주리라.
릴리는 머리를 재빠르게 굴렸다.
‘로터스랑 지크 오빠한테도 협조하라고 해야지. 검술과의 정보도 물어오라고.’
요즘 사업하느라 바쁜 장남한테도 협조를 구해볼까.
졸업하기 전에 리체에게 고백한다던 로벤하프는, 6년 전 공개 청혼 실패가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리체 앞에서 다시 뚝딱거리다 그대로 졸업했다.
그러고는 올해 봄에 갑자기 제 고민 상담을 쌍둥이에게 털어놨다.
“릴리, 로터스. 나는 대륙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가 될 거야.”
“정말? 그럼 나 요트.”
“형, 나는 검. 제일 비싼 거.”
“들어 봐. 동생들아. 그러고 나면 리체한테 처, 처, 청……..”
“……나 요트 안 사줘도 돼.”
“……내 검은 형 가져.”
쯧쯧. 릴리는 딱하고 바보 같은 장남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가능성 전혀 없어 보이는 일이었지만, 일단은 내심 응원하는 중이었다. 리체와 가족이 되면 좋은 건 저였으니까. 뭐, 저번 달에 시작한 사업도 꽤 잘 되고 있다고 들었고.
“아, 맞다.”
릴리는 탈의실에서 나오는 리체를 향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왜?”
리체가 묶었던 머리를 풀며 릴리에게 물었다.
작업복에서 교복으로 갈아입은 리체의 옷깃에는 은색 배지가 달려 있었다.
“언니, 우딕 아카데미에 실력이 굉장한 학생이 한 명 있대.”
“마법과?”
“검술과. 그런데 마법도 사용할 줄 안다던데?”
크셀폰 대회는 관심 없었지만, 그래도 주워들어 아는 이야기도 있긴 했다.
우딕 아카데미의 실력자. 작년의 크셀폰 우승을 거머쥔 인물이었다.
“그래도 검술과면 나랑 마주칠 일은 없겠네?”
“아니야. 단체전 종목이 있잖아. 과 상관없이 아카데미별로 겨루는.”
“아. 그렇구나.”
리체는 릴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단체전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참가하겠다는 것도 지금 막 결정한 거라, 대회에 관해 정확히 아는 건 몇 안 되었다.
“언니 조심해. 만만치 않은 상대거든.”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거지? 응. 조심할게.”
“아니야.”
“실력이 아니면 뭐가 만만치 않은데……?”
“얼굴.”
“……응?”
릴리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잘생겼대. 엄청.”
* * *
로드윅 공작령. 마물의 숲.
‘열린다……!’
필립은 열리기 시작하는 숲의 입구를 긴장해 바라봤다.
밤사이, 마물의 숲에서 지냈던 데온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올해로 18살.
보는 이들의 감탄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장성한 제 도련님은…….
“물.”
“넵!”
여전히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