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그런 걸 누가 한다고
필립은 여전히 리체의 기사였지만, 아카데미에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수행원은 한 사람뿐이었다.
리체의 1학년 겨울방학. 리체의 수행원 자리를 놓고 안나와 필립의 작은 대립이 있었다.
“수행원은 두 사람 중 누구라도 좋아.”
둘의 신경전을 본 리체가 분위기를 풀어보겠다고 한 말이었다.
리체가 필립을 수행원으로 데려갔던 건, 히켄카가 언제 필립에게 빙의할지 몰랐기 때문이니.
리체의 말에 안나는 환호했고, 필립은 좌절했다.
그렇게 필립과 안나는 매 학기가 시작되기 전, 수행원 자리를 놓고 다퉜다.
이번 학기는 안나의 승리.
“아, 안나 씨……. 한 번만 더 기회를…….”
“안 돼요.”
“큽…….”
결국 필립은 주인은 있지만 주인을 모실 수 없는 반백수 신세가 되어 로드윅 저택에 남아 있었다.
그런 필립을 주운 게 데온.
졸업식 후 리체의 개학식까지 머물러 있던 데온은, 필립을 끌고 로드윅 영지로 돌아갔다.
“내 동생 기사가 약골인 건 못 봐줘.”
약골이라니.
자신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실력이지만. 필립은 데온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때는 로드윅 영지로 돌아온 지 일주일 정도.
필립이 저녁 산책을 간다는 데온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간 날이었다.
크르릉.
끼에에엑-.
쿠우웅.
마음의 준비도 없이 도착한 곳은 마물의 숲.
어떤 제정신이 아닌, 아니, 대단하신 분께서 산책을 마물의 숲으로 간단 말인가.
닫히는 숲의 입구를 보며 필립은 등골이 싸해졌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사냥감을 발견한 마물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도, 도련님. 능력 사용은 안 하세요?”
필립은 제게 달려드는 마물을 가까스로 베며 데온에게 물었다.
르티옴인 리체 아가씨도 계시겠다, 그냥 능력으로 마물들의 호흡을 멈추게 하는 편이 마물을 상대하기에 더 수월하실 텐데.
“안 써.”
무슨 고집인지, 데온은 오로지 검으로만 마물을 상대했다.
필립은 그 옆에서 죽을 둥 살 둥 검을 휘두르며 최선을 다해 제 목숨을 지켰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아침.
정말 산책하고 숲을 나오는 듯한 데온과 달리, 필립은 진이 다 빠져 무거운 걸음을 질질 끌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을 보며, 필립은 다짐했다. 아, 다시는 도련님 따라 숲에 들어가지 말아야지.
어쨌든.
필립은 물을 들이켜는 데온의 날렵한 턱선을 바라봤다.
18살의 데온은, 이제는 필립보다도 키가 컸다. 떡 벌어진 어깨에 옷 너머로도 탄탄함을 느낄 수 있는 검술로 단련된 몸. 날카로운 데다가 퇴폐적이기까지 한 미모는 두말할 것도 없다.
“도련님, 오늘은 몇 마리나 잡으셨어요?”
“…….”
“그, 어젯밤에 리체 아가씨께 통신이 왔는데요.”
“뭐라고.”
여전히 로드윅 집안의 실세에게 빌붙어야 도련님의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처지라니.
제 도련님의 한결같음에 감탄하며, 필립은 통신 내용을 보고했다.
“이번 크셀폰 대회에 나가신대요.”
“……크셀폰?”
데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온실은 어떻게 하고?”
어느 날부터 빠진 취미 생활에 열과 성을 다하느라 영지에도 2개월 이상 머무르지 않던 리체였다.
그런데 갑자기 크셀폰이라니?
필립은 데온이 의문을 가질 줄 알았다는 듯, 리체에게 들은 말을 전달했다.
“이제는 다른 사람 손에 맡겨도 괜찮으실 것 같다던데요.”
“무슨 바람이 들어서.”
데온의 붉은 눈에 얕은 불만이 어렸다.
로크샤 제국 내 고만고만한 대회들과 달리, 크셀폰은 실력자들이 꽤 참가하는 대회였다.
더욱이 대회가 열리는 곳은 로크샤 제국과 판 대륙의 경계에 있는 곳으로, 마물이 나오는 롬 사막과 그리 멀지 않았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그…… 도련님, 아가씨가 누굴 다치게 하셨으면 하셨지, 다치실 위인은…… 아닙니다.”
사나워진 데온의 기세에 지레 찔린 필립이 고개를 저으며 주제를 바꿨다.
“이름만 들었던 대회인데 리체 아가씨께서 참가하신다니. 이제부터 좀 알아볼까 봐요. 도련님, 크셀폰 참관해보신 적 있으세요?”
“없어.”
크셀폰은 일정 수준의 실력을 갖춘 6학년 이상의 아카데미 학생이라면 누구든 참가할 수 있었지만.
예외는 있었다.
‘로크샤 제국, 네 공작 가문의 능력자는 참가 불가’.
갖고 태어난 능력이 월등히 강한 능력자들.
학생들의 순수한 실력을 겨뤄보자는 대회 취지에 맞지 않을뿐더러, 능력자들이 대회를 독식할 수 있었기에 만들어진 규정이었다.
하지만 능력자가 크셀폰에 참가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데온은 며칠 전에 받은 서신 한 통을 떠올렸다.
친애하는 데르케디온 로드윅께.
여건이 되신다면, 이번 크셀폰의 시험 교관 자리를 맡아주십사…….
예선과 본선을 통틀어 6개월이나 진행되는 대회였다.
혈기 왕성하고 실력 있는 학생들이 모인 대회. 통제하지 못하면 사건 사고가 끊기지 않을 터였다.
그렇기에 주최 측은 이맘때쯤 학생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강한 이들에게 크셀폰 간부 직책 중 하나인 교관 자리를 제안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깐깐한 기준을 통과한, 선별된 인원에게만 오는 제안.
대회가 끝나면 이력서에 교관 경력 한 줄만 채워 넣어도 어디든 갈 수 있는, 부과 명예를 단번에 쥘 수 있는 자리였지만.
‘귀찮아.’
둘 다 가진 데온에게는 귀찮은 제안일 뿐이었다.
데온은 기억을 되짚어 봤다. 서신을 어디에다 뒀지. 분명 읽고 난 뒤 구겨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것 같은데.
‘그런 걸 누가 한다고.’
데온은 필립이 끌고 온 말 위에 올라탔다.
“가자.”
“넵. 도련님, 도착하시면 바로 가주님께 가실 건가요? 제드 씨가 여쭤보라고 해서요.”
필립도 자신의 말에 올라타며 물었다.
데온은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하며 말을 출발시켰다.
“그 전에 쓰레기통 좀 뒤지고.”
* * *
“리체 누나!”
아카데미의 훈련장.
단 위에서 몸을 풀던 리체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출입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15살. 로터스가 릴리와 똑같은 얼굴로 분홍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제 쪽으로 달려왔다.
그 뒤에는 로터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지크베르트가 걸어오고 있었다.
“지크! 로터스도 같이 왔네?”
리체가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올해 17살이 된 지크베르트는, 제법 성인 남자의 티가 났다. 예전보다 깊어진 녹안이 리체를 향해 사르르 접히며 아는 척을 했다.
“리체, 안녕. 오는 길에 만났어.”
“맞아. 지크 형이 누나랑 훈련한다더라? 그래서 따라왔지.”
로터스와 지크베르트가 리체 앞에 섰다.
그러다 로터스가 리체의 얼굴을 보고는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해줄 말이 있던 게 지금 생각났다.
“누나, 현수막 걸려 있더라?!”
“현수막?”
“응. 누나 대회 나간다고, 본관 옥상 난간에 엄청 커다랗게. 누가 보면 누나가 벌써 우승한 줄? 그렇지? 지크 형?”
“우승은…….”
“리체 누나가 할 거니까 괜찮다고? 그건 그래.”
로터스가 지크의 말을 대신 이었다. 지크베르트가 멋있다며 졸졸 따라다니던 로터스는, 어느새 지크 담당의 전문 통역사가 되었다.
한편, 리체는 현수막 소식에 마음이 더 심란했다.
며칠 전.
가벼운 마음으로 대회 출전 의사를 마법과 교수 한 명에게 밝혔다. 그는 리체의 말에 목젖이 보일 정도로 입을 떡 벌리더니, 리체를 두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
혼자 남겨진 리체는 그 뒷모습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바쁘신 일이 있으신가, 다음에 다시 말해야겠다. 같은 생각을 하며 복도에 잠시 서 있다 돌아가려는데.
사냥감을 포획하러 오는 듯 달려오는 마법과 교수들과 총장을 보고 놀라 뒷걸음질했다.
“트, 트아리체 양!!”
“정말, 정말 나갈 겁니까?!”
“트아리체 학생, 필요한 거 있나? 뭐든 말해보게!”
“드디어……! 내가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니까!”
리체는 그제야 교수들과 총장이 그간 자신의 크셀폰 참가 소식을 꽤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고삐가 풀린 것처럼 ‘어차피 우승은 트아리체!’를 온몸으로 외치는데.
부담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냥 대회 경험만 할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가벼운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결국, 리체는 작정하고 우승을 노려봐야겠다고 생각하고 훈련을 시작했다.
최종 우승자는 개인전과 단체전의 성적을 종합해 뽑았기에, 릴리가 말한 작년 우승자에도 대비해야 했다.
아직 이름을 듣지 못했기에, 자신과 같은 학년이라는 것만 알았다. 불과 15세에 우승을 거머쥔 검술과의 실력자.
[그 우승자 있잖아, 정말 잘생겼을까? 궁금하네.]
파이톤스가 리체에게 말을 걸었다.
우승자 생각을 하는 건 어떻게 알고.
제 머릿속을 꿰뚫어 본 듯한 질문에 리체는 뜨끔하며, 속으로 대답했다.
‘글쎄. 릴리는 그렇게 말했지만…….’
릴리는 누군가의 외모 칭찬에 후한 편이었다. 리체는 그렇게 생각했다. 허구한 날 제 외모를 칭찬하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우승을 얼굴로 한 것은 아닐 테니 방심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 검술과인 지크베르트에게 훈련을 도와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리체는 허리춤에 찬 목검을 뽑는 지크베르트를 향해 물었다.
“지크는 본 적 있어? 작년 우승자.”
“아니.”
지크베르트 또한 능력자이니, 참가할 일이 없어 크셀폰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나는 봤어. 작년에 친구랑 결승전 보러 갔거든.”
로터스가 옆에서 대답했다.
예선이 학기 중에 치러지고, 방학 때 본선이 진행되니 그때 결승전을 보고 온 모양이었다.
리체가 흥미를 갖고 로터스에게 물었다.
“어때? 실력이 엄청나다며.”
“응. 잘 싸우던데? 그리고 눈에 엄청나게 띄었지. 머리카락이 금색인데 눈도 금색이라.”
“……어?”
그 말에 리체는 몸풀기하던 것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서는, 로터스에게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로터스?”
“온통 금색이라 눈이 간다고…… 아.”
로터스는 하던 말을 멈췄다. 왜인지 익숙한 외형 묘사라 생각했는데,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사라진 게르웨르 공작가 능력자 특징이 그거였지? 금발, 금안. 나는 하도 어렸을 때라 바로 안 떠올랐네. 지크 형하고 동갑인 형도 있지 않아? 이름이 뭐더라, 무슨 웨인. 그랬던 거 같은데.”
지크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
“이안드웨인 게르웨르.”
리체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지크베르트의 말에 덧씌워졌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6년간 이안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찾아보고, 아닌 것에 실망하고.
그렇게 별 소득 없이 반복되는 일에 지쳐, 리체는 얼마 전부터 마음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만두자. 이안은 돌아오지 않아.’
라고 다짐했는데.
이안을 연상시키는 이런 말에 설마, 하며 심장이 뛰다니.
리체는 제 다짐도 잊고, 다급히 로터스에게 물었다.
“로터스, 그 우승자 이름도 알아?”
우딕 아카데미, 검술과. 리체와 같은 7학년.
그 외의 정보는 아직 듣기 전이었다.
“리체 누나, 적극적인데? 정말 누나가 우승하겠다. 트아리체 로드윅이 진심이면 이길 사람이 없지.”
평상시에는 보기 힘든 리체의 적극적인 모습에, 로터스는 기분이 좋아 양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크베르트도 멋있긴 하지만, 그건 자신이 현실적으로 롤모델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을 따르는 거였지.
사실 로터스가 가장 동경하는 사람은 리체였다.
그러니 릴리가 말한 것처럼 아는 것을 다 털어놓아 리체 누나를 꼭 우승하게 만들겠어.
“이름도 알지.”
로터스는 입을 달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