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소중한 거야
“모건 데이얼.”
로터스의 입에서 나온 건 역시나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당연하지. 이안의 이름이었으면 벌써 내 귀에 들렸을 텐데.’
아침 수업 하나가 끝난 쉬는 시간.
리체는 노트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글자도 눈에 잘 안 들어왔다.
“트아리체. 크셀폰 참가한다며. 신청서는 냈어?”
옆자리의 이즈라가 말을 걸었다.
한때는 리체의 마력 친화도에 충격을 받았었지만, 그것도 옛말.
제 라이벌은 트아리체밖에 없다며 이즈라는 꼬박꼬박 리체의 옆자리를 사수했다.
[쟤는 너 싫어하는 거 같은데 일일이 챙기네. 특이하다니까.]
이즈라의 말을 들은 파이톤스가 리체의 안주머니 속에서 중얼거렸다.
“응. 지난주에 냈어. 이즈라, 너는 안 나가?”
늘 리체와 엮여 상대적으로 덜해 보였지만, 이즈라도 마법 실력이 상당한 편이었다.
작년에 크셀폰에 참가했으니, 이번에도 나가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나 지난번에 럼블라 교수님 수업 지각했잖아. 그것 때문에 교수님이 예의주시하고 있어서. 이번 학기 출석 한 번이라도 빠지면 D래.”
“크셀폰 참가 때문에 결석하는 건 영향 없지 않아?”
“출석에는 영향이 없어도 럼블라 교수님한테는 영향이 있지.”
“……내가 교수님께 말씀드려볼까?”
“됐어.”
보라색 눈의 마녀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했다.
듣는 리체도 너무하다 싶었지만, 이즈라는 덤덤해 보였다.
사실 리체가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 나갈 핑계를 만들고 있었기에, 오히려 잘 됐다 싶은 마음도 있었다.
‘트아리체가 나가는 크셀폰에 내가 뭐하러 참가해.’
리체의 실력을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뻔한 결말에 들러리로 참여할 생각은 없었다.
이즈라는 그 얘기는 이제 됐다는 듯, 다른 화제를 꺼냈다.
“로드윅 공작님께서는 뭐라셔?”
“잘하고 오라 그러셨어.”
리체는 통신구 너머로 들은 블레이크의 말을 떠올리며 답했다.
대회에 참가한다고 하면 걱정하며 반대할지도 모른다 생각했으나, 블레이크는 리체의 선택을 응원하고 존중했다.
“다치지만 말거라.”
의외로 불안해하며 호들갑을 떤 쪽은 따로 있었다.
리체의 참가 소식을 전해 들은 히베츠만 공작과 세르디야 공작이 곧바로 연락이 왔다.
르티옴인 리체가 타국 가까이로 가는 게 걱정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같이 가주마.”
“그게, 히베츠만 공작님. 보호자 없이 참석하는 거라서…….”
“보호자가 안 되면 늑대는 어떠냐! 날 반려동물이라 해라!”
[캬악. 저 건방진 세르디야 공작 놈이 어디서 내 자리를 넘봐?!]
“……무척이나 감사하지만 제 다람쥐가 무서워할 것 같아요.”
대회 장소까지 따라온다는 걸 거절한다고 애를 좀 먹었다.
거절하지 않았으면 대회에 대신 참가라도 해줄 기세였으니.
‘공작님들이 그러시는 것도 이해는 돼. 내가 르티옴이니까.’
그러니 걱정될 거다. 자신이 르티옴인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위대한 별들이 그릇을 찾아 아카데미로 왔었던 시절.
리체는 능력자들에게 들켰으니, 제 정체가 외부에 알음알음으로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식은 의외로 총장과 능력자 가문, 그 최측근에서 그쳤다. 그렇게 햇수로 7년을 보냈다.
‘그래도 언젠가는 밝혀지겠지.’
어느덧 블레이크도 41세였다. 데온의 전 세대 능력자들이 마흔을 넘기거나 가까워지고 있으니. 능력자들의 수명에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찌 됐든 리체가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비밀을 지켜보겠다는 듯했지만.
“데르케디온 선배님도? 그런데 선배님은 왠지 너 대회 나가는 거 별로 안 달가워하셨을 거 같아.”
“그게…….”
리체는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최근 크셀폰 대회보다 리체의 신경을 더 쓰이게 하는 일이었다.
“오빠가 연락이 안 돼.”
도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다니는지, 연락이 닿지 않았다.
함께 영지로 내려간 필립도 마찬가지고.
“데르케디온 선배님이? ……반나절 정도 연락이 안 된다는 거지?”
“일주일 정도 된 것 같아.”
“일주일?”
리체의 대답에 이즈라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초반에야 데르케디온이 평민 여동생을 싫어한다는 소문이 돌았었지만, 몇 년 동안 그 두 사람이 붙어 다니는 것을 보다 보니 학생들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데르케디온이 여동생을 굉장히 좋아하는구나.’
그렇게 데르케디온이 여동생 바보라는 이야기는 학생들 사이에서 조용히 알려졌다.
물론 당사자들, 특히 데온의 귀에는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되었기에, 말하는 걸 금기처럼 여기긴 했지만.
그러니 이즈라가 지금 리체의 말에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리체하고 연락을 안 해? 그 데르케디온 선배가?’
하지만 사실인 모양이었다.
리체는 나지막한 한숨을 푹 쉬었다.
걱정이다. 데온 성격에 누구한테 당하고 다니지는 않겠지만.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
* * *
“모건.”
판 대륙, 우딕 아카데미.
갈색 곱슬머리의 학생이 훈련 후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는 남학생을 불렀다.
눈부신 금발이 살랑이며 고개가 돌아갔다. 화려하지만 아름다운 얼굴에 학생이 살짝 흠칫했다.
6년을 봐왔으니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지만, 가끔 예고 없이 마주하는 얼굴에는 심장이 철렁했다.
“하마드. 여기는 어쩐 일이야?”
모건이라 불린 금발의 남학생은 반갑게 맞이하면서도, 의문을 품고 물었다.
기계과인 하마드가 검술과 건물까지 올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난번에 늘어나는 작은 무기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그거 시험품 보여주려고.”
“벌써? 빠르다. 고마워.”
모건은 하마드에게 무기를 건네받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한 손에 감싸 쥘 수 있는 크기였다. 하마드는 간단한 작동 설명 후에 모건의 손에 들린 무기의 와이어를 늘려 보이며 말했다.
“너 크셀폰 가기 전에는 완성품을 만들어야 하니까. 평상시보다 좀 더 열심히 해봤지.”
그 말을 증명하듯, 하마드의 눈그늘이 짙었다. 며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모양이었다.
모건이 미안한 얼굴을 하자, 하마드가 됐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작업복 주머니를 뒤져 동전 두 배만 한 크기의 물건을 꺼냈다.
“그때 같이 부탁한 장식도 완성됐어.”
검은 유리 두 조각을 이어 붙이고, 원형 틀 안에 굳는 성질의 투명한 액체로 고정한 장식이었다.
모건은 방금 하마드가 며칠 밤을 새워 만든 무기를 봤을 때보다 환한 얼굴이 되어 장식을 받아들었다.
‘노력 대비 반응이 영 안 맞는데.’
며칠 밤을 새워 만든 무기보다 손 풀기도 안 되는 장식에 더 기뻐하다니.
‘둘 다 대가는 이미 돈으로 받았으니 됐나.’
하마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벤치에 앉은 모건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 사이, 모건은 장식의 연결고리에 가죽끈을 묶어 제 검집에 달기 시작했다.
“나는 그게 특별한 유리일 줄 알았는데.”
하마드는 그런 모건의 행동을 구경하며 말했다.
“네가 직접 재료를 가져와서 장식으로 만들어 달라고 한 건 처음이니까. 무슨 마석이라도 되는 줄 알았지? 근데 진짜 평범한 유리더라?”
모건은 검사면서 마법도 사용하는 심상치 않은 녀석이었다. 몇 년을 겪어도 능력의 한계와 생각을 알 수 없는 무서운 녀석.
그런 모건이, 살짝 금이 갔으니 조심히 다뤄달라는 말과 함께 유리 두 조각을 건넸다.
분명 뭔가 있겠다 싶어 이리저리 조사를 해봤지만, 그저 유리 조각일 뿐이었다. 거울 같은 걸 만들 때나 쓸법한.
“맞아. 평범한 유리.”
모건이 피식 웃었다.
평범한 유리라 말하면서 그 꿀 떨어지는 눈빛은 뭐냐.
제가 비록 기계밖에 모르는 인생이었지만, 모건의 반응이 뭔지는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마드는 추리하듯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물었다.
“연인이지.”
“아니.”
이런. 틀렸나.
하마드가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이는데, 모건이 장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것보다 더 소중한 거.”
참나. 연인보다 소중한 건 또 뭐야. 남들은 그 연인 때문에 죽네 사네 하는데.
‘연인은 아니고, 소중한 거면. 짝사랑이라도 하나?’
하지만 하마드는 이내 제 생각을 철회했다.
저 얼굴로 짝사랑이라니. 기계가 사람의 말을 한다는 것만큼이나 신빙성이 없는 소리였다.
하마드는 코가 간지러워 콧잔등을 긁적거리다, 모건에게 해줄 말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모건, 이번에 너 우승 못 할지도 모르겠다고 하더라.”
“왜?”
“로크샤 제국에서 유명인이 참가한대.”
오전에 실습장에서 들은 얘기였다.
타국의 이야기는 기술 관련된 것밖에 관심을 두지 않는 하마드도, 그 인물만큼은 모르지 않았다.
“그 있잖아. 로크샤 제국 능력자 가문.”
“……능력자?”
“그래, 너 몰라?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존재들. 인간이면서 동물로 변한다거나, 물리적 힘을 가하지 않고도 호흡을 멈추게 한다든가, 순식간에 사물을 얼려버린다거나, 눈으로 본 사람의-.”
“알아. 하마드.”
“알아?”
그러면 진작 말해주지. 괜히 입 아프게 설명했네.
하마드는 능력자에 관한 이야기를 멈추고 그다음으로 하려던 말을 이었다.
“하여튼. 올해 크셀폰에 그 로드윅 공작가의 공녀가 참가하나 봐. 트아리체 로드윅. 16살. 황립 아카데미 마법과 7학년.”
“…….”
힐끔.
하마드는 모건을 곁눈질했다. 침묵하는 걸 보아하니 이번에야말로 잘 모르는 눈치였다. 그럼 또 아는 걸 말해줘야지.
“로크샤 황립 아카데미에서 주장하길, 엄청난 천재라던데? 마력 친화도가 구십팔이라더라. 그게 가능한가?”
하마드는 턱을 매만지며 제가 한 말에 의구심을 품었다.
어쩌면 로크샤 황립 아카데미의 계략일지도.
공녀란 그럴듯한 신분이 있으니, 영웅 만들기의 일종으로 비상식적인 수치를 갖다 붙여 홍보하는 걸지도 몰랐다. 서류란 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으니까.
자신은 그렇게 여겼지만, 옆이 조용한 걸 보니 모건은 그대로 믿는 모양이었다.
하마드는 생각이 많아 보이는 모건의 넓은 등을 툭 치며, 격려했다.
“모건, 내가 한 말이지만, 너무 믿지 마. 로크샤 황립 아카데미에서 지어낸 말일 지도 모르잖아? 우승은 이번에도 우리 우딕 아카데미일 거라고. 네가 있으니까.”
“글쎄.”
“거참.”
우딕 아카데미의 모건 데이얼.
자신들의 영웅은 원래도 의욕이 넘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더더욱 의욕이라곤 없어 보였다.
하마드는 모건의 등을 다시 두드리며 힘껏 말했다.
“그깟 천재 마법사. 네가 눌러 버리라고. 모건.”
* * *
경 마법과 트아리체 로드윅 크셀폰 진출 축
“…….”
리체는 본관에 걸린 문제의 그 현수막을 착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크셀폰으로 향하는 행렬, 앞줄에 선 리체에게 총장이 다가와 손을 마주 잡았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어요.”
이런 날이 무슨 날이란 말인가.
바로 우리 황립 아카데미가 우딕 아카데미를 누르는 날이지.
총장은 감격에 젖어 저도 모르게 양손에 힘을 줬다가, 금세 리체의 손을 놨다.
우리 보물에게 내가 무슨 짓을.
그런 총장의 뒤에서 응원할 타이밍을 보던 마법과 교수들은, 이때다 싶어 우르르 리체 앞으로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