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그걸 물어보면 어떻게 해?
“너무 부담 갖지 말게! 평상시대로만 하고 오면 되지! 트아리체 학생은 천재니까! 아무렴.”
“무슨 선물을 사 온다고 그래요. 올 때 우승컵 하나만 가져오면 되는데.”
부담스러운 마법과 교수들의 인사가 끝나자, 식물과 교수들도 질세라 리체에게 다가왔다.
“트아리체 양. 온실은 알려준 대로 저희가 잘 관리해보죠.”
“내 살면서 쌓아왔던 모든 지식과 기술을 동원해 지금처럼 유지해 보겠네.”
“잘 부탁드려요. 교수님들.”
[돌볼 것도 없지. 그냥 둬도 알아서 잘 자랄걸.]
파이톤스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무려 마력을 가둬 키워, 그걸 양분 삼아 자라는 식물들이었다.
그동안 리체가 일군 땅의 마력이 안정돼있는 이상, 온실은 별문제 없을 터였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대회에 참가하는 학생들과 인솔 교사들, 잡일을 봐주는 인부들의 행렬이 출발했다.
리체는 달리는 마차 안에서 블레이크가 준 황금 펜던트를 만졌다.
“무탈하길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
엊그제, 인사차 들린 저택에서 블레이크에게 받은 것이었다.
블레이크는 그렇게 말하며 리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늘 한결같은 블레이크. 리체에게 우승하고 오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뭐든 좋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오거라. 다치지는 말고.
‘아빠가 최고야.’
블레이크를 떠올리니 출발 전 받은 부담감이 옅어졌다. 리체는 이전보다 편안한 심정으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다 블레이크처럼 제게 우승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또 한 사람이 생각나 눈살을 찌푸렸다.
‘데온은 어디에 있는 거야?’
제드에게 듣기로는, 필립과 함께 로드윅 영지를 떠났다고 했다.
도대체 뭘 하기에 이렇게 얼굴도 못 볼 정도로 바쁜지.
‘앞으로 몇 달은 못 보겠네.’
작별 인사도 못 했으니 서운함과 아쉬움이 컸다.
대회장에 도착하면 편지나 통신을 할 수 있는지부터 알아봐야지. 리체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그렇게 생각했다.
한편, 같은 마차의 맞은편에 앉은 학생은 트아리체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표정을 보며 숨을 삼켰다.
트아리체랑 같은 마차라니. 이렇게 긴장되는 일이 또 있을까.
천재라 불리는 만큼 성적도 좋고, 미인에, 집안도 좋았지만.
다 떠나서. 트아리체는 데르케디온과 남매였다.
‘그렇게 무서운 데르케디온 선배와 함께 다녔던 걸 보면…….’
트아리체도 겉은 천사처럼 보여도 속은 무서울지 모른다. 무려 암살자 가문의 막내딸이니.
‘트아리체 앞에서 실수하면 나는 아마 그날로 죽을지도…….’
비슷한 오해를 하는 학생들이 몇 있었지만, 오해는 이틀을 채 가지 못했다.
리체가 먼저 나서서 살갑게 학생들을 대한 덕분이었다.
“필요한 건 없어요?”
“그래? 내가 교수님께 말씀드릴게.”
학생들 사이에서 트아리체의 이미지가 무시무시한 암살자에서 믿음직스러운 동료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는 것이 많은 데다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주변을 잘 돌보며 신경 써준다. 나중에는 무슨 일이 생기면 교수보다는 트아리체를 먼저 찾을 정도였다.
그렇게 평화로운 4박 5일이 흘렀다. 그리고. 대회장에 도착하기 바로 전날 밤.
[계약자!]
“……!”
야영을 위해 친 천막 위로 불길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리체의 천막이 커다란 새의 발톱에 꿰뚫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화들짝 잠에서 깬 리체의 눈에 보인 건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이었다.
리체는 곧바로 간이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적을 확인했다. 독수리 떼처럼 몰려든 조류형 마물이었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건 일곱 마리.
도망치는 인부에게 리체가 소리쳐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롬 사막에서 건너온 마물들입니다!”
대회장이 마물 서식지인 롬 사막과 가깝다 보니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일어나는 일이었다. 먹이를 찾는 마물에게 야영하던 무리가 습격받는 일.
그리고 마물의 습격을 받은 아카데미는, 전날 마물과의 전투 여파로 참가 자격 심사에서 많은 수의 학생들이 떨어지곤 했다.
지금 상황을 맞닥뜨린 로크샤 제국 황립 아카데미에도 해당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내일을 위해 학생들의 체력을 아껴야 해.’
리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인근 지역에서 고용한 용병들이 익숙하게 대처했다. 당황했던 학생들도 이내 전투 태세를 갖춰 싸우는 중이었다.
리체는 바닥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우며 소리쳤다.
“모두 뒤로 물러나요!”
그 소리에 학생들은 뒷걸음질 쳤고, 용병들은 계속해서 싸우다 학생들의 손에 끌려나갔다.
“왜, 왜들 이래! 저걸 잡아야지! 이대로 죽을 생각이야?”
“아저씨! 방해하지 말고 이리 와요!”
“방해는 너희들이 하는 거지!”
“아, 그냥 멀리서 구경하시라니까요.”
뭘 구경하라는 건가. 손 놓고 있다가 마물에게 학생들이 잡아 먹히는 걸 구경이라도 하라는 건가.
이를 아득 갈던 용병들은, 이내 힘없이 아래턱을 턱 내렸다.
전투와는 거리가 먼 듯한 청초한 은발을 휘날리는 귀족 여학생.
명화를 찢고 나온 듯한 그 고귀하고 아름다운 외모의 리체를 처음 본 용병들은 그녀가 비전투 종목에 참가하는 고위 귀족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크셀폰에는 지식을 겨루는 종목도 있으니.
그런데 그 여학생이, 공중을 나는 거대한 조류형 마물들을 향해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뭣들 해! 말려!”
용병 하나가 다급히 소리쳤지만 학생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리체는 차고 있던 마석 목걸이를 벗어 한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공중으로 던졌다.
짧은 영창과 후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마물들의 머리 위까지 올라간 돌멩이는, 이내 물로 변했다. 물은 거대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 마물들을 적셨다.
“오. 복합 영창.”
“너 가능해?”
“무리지.”
이어진 다음 영창에 강한 번개가 마물들에게 내리쳤다.
물에 한차례 젖은 마물들은 제 몸을 태우는 번개에 비명 한 번 내지 못하고 하나씩 떨어져 땅을 울렸다.
그 상황을 목격한 용병들은 할 말을 잃었고, 마법과 학생들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몇 번을 봐도 적응 안 되는 실력이긴 하다.
“우승은 트아리체라니까…….”
그러다 자신들 쪽으로 돌아와야 할 리체가, 갑자기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트아리체! 어디가?”
“아, 저기!”
학생 중 한 명이 리체가 달려가는 이유를 알았다는 듯,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가리켰다.
저 멀리, 땅을 달리는 마물들에게 누군가 쫓기고 있었다.
* * *
[별 조각이라니까! 계약자, 너도 느꼈지?]
달리는 리체의 머리 위로 올라간 파이톤스가 소리쳤다.
조류형 마물을 쓰러트린 순간, 미약하게나마 느껴진 별의 힘.
‘응. 멀리 떨어졌는데도 느껴질 정도면 강한 거 아니야?’
[당연하지. 이 정도면 상급 힘을 가졌던 별이야.]
파이톤스는 흥분해 콧김을 내뿜었다.
리체가 땅의 마력을 빼내겠다고 아카데미에만 있는 통에, 별 조각은 예전에 로드윅 가의 도서관에서 찾았던 것이 전부였다. 그것도 생전에 중간급 힘을 가졌던 별의 조각이었는데.
이런 곳에서 새로운 별 조각을 발견할 줄이야.
[마물? 마물이 들고 있는 건가?]
파이톤스는 가까워지는 전갈형 마물 세 마리를 유심히 살폈다.
그 앞에 인간 한 명이 마물의 공격을 피하며 열심히 달리고 있었지만, 파이톤스의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계약자! 맨 오른쪽 마물이야!]
파이톤스가 별 조각의 힘이 느껴지는 마물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미 리체도 알고 있을 테니 제가 말하는 게 별 의미는 없겠지만.
그러나 당연히 그곳으로 달려갈 줄 알았던 리체는, 중앙의 마물 앞으로 가 마법 주문을 영창했다.
반투명한 커다란 방패가 나와 마물 세 마리를 동시에 막아냈다. 앞길을 막힌 마물들이 울부짖었다.
[오른쪽이라니까. 왜…… 아.]
그제야 뒤를 돌아본 파이톤스가 그 이유를 깨달았다.
“허억, 허억, 고, 고, 고맙습니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 리체를 향해 감사 인사를 건네는 인간.
짧은 갈색 곱슬머리에 얼굴에 주근깨가 있는, 리체 또래의 여자였다.
방금까지 마물에게 쫓긴 탓에, 크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너, 설마. 별 조각 말고 인간 구하러 달려온 거야……?]
“…….”
[맞네. 맞아.]
그러면 그렇지. 네가 웬일로 별 조각에 환장해서 달린다 했다.
파이톤스는 짜게 식은 눈으로 세 마리의 마물을 바라봤다.
[그러면 빨리 해치우고 별 조각이나 찾자고.]
‘응.’
리체는 뒤에 있는 사람을 힐끔 보며 말했다.
“도망칠 수 있어요?”
“네?”
“보호막을 해제할 거예요. 휘말릴 수 있으니까 도망치세요.”
“네, 네! 감사합니다! 로크샤 황립 아카데미 분!”
리체의 교복으로 출신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다른 학교 학생인가? 작업복을 입고 있어서 몰랐네.’
여학생이 도망치는 것을 확인하자, 리체는 보호막을 해제하고 제게 달려드는 마물을 향해 파이톤스의 힘을 사용했다.
폭발로 쓰러지는 마물들.
한 마리.
두 마리.
그리고,
[뭐야! 저건 우리 건데!]
하늘에서 번쩍이는 금빛 하나가 검으로 마물을 갈랐다.
두 동강 나 양옆으로 갈라지는 마물 사이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낯선 교복을 입은 장성한 남학생. 몸을 감싼 하얀색의 옅은 오러가 마치 후광처럼 은은히 빛났다.
리체의 시야에 남자의 찬란한 금발이 들어왔다. 시선을 내린 보석 같은 금안의 시선이 쓰러진 마물에게서 리체에게로 옮겨갔다.
“…….”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감쌌다.
리체의 은빛 눈동자와 사내의 금빛 눈동자가 마주쳤다.
어두운 밤하늘에 동시에 떠오른 달과 태양처럼. 그렇게 적막 속에 서로의 시선이 얽혔다.
잠시 후, 먼저 눈을 피한 건 리체였다. 리체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안이 아니야.’
순간 착각할 뻔했다. 이안이 자란다면 저런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남자는 이안과 닮았지만.
가슴께에 쌓인 기운이 보이지 않았다. 능력자가 아니다.
‘작년 우승자겠지?’
리체는 제 앞에 선 남학생이 누군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우딕 아카데미 교복, 금발과 금안, 오러를 사용하고 단칼에 마물을 해치울 정도의 뛰어난 검술 실력.
[그 우승자가 게르웨르 꼬맹이일 리가. 이안드웨인이 검은 몰라도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잖아? 능력자니까.]
파이톤스의 말처럼 리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도 마주친 눈이 이안을 떠올리게 할 만큼 따뜻해서, 저도 모르게 기대하고 이내 실망해버렸다.
우딕 아카데미의 남학생, 모건은 여전히 리체를 보고 있었다.
리체는 발치에 굴러온 반지를 주워 남자에게 물었다.
“그쪽 거예요?”
[으악. 이 바보가! 이게 별 조각인데 물어보면 어떻게 해!]
리체의 말에 파이톤스가 기겁하며 머릿속에 소리쳤다.
주운 사람이 임자인데, 그걸 남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저 남자가 자기 거라고 대답하면, 이 욕심 없는 계약자는 홀랑 줘 버릴 게 분명했다.
[절대 안 돼!]
모건의 시선이 리체의 머리 위에서 털을 부풀리며 성내는 다람쥐에게로 향했다.